- 아그니에츠카 홀랜드, 〈카핑 베토벤〉
C56. 유머가 있는 베토벤 – 아그니에츠카 홀랜드, 〈카핑 베토벤〉(2007)
에드 해리스의 베토벤
조금 헷갈립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본 것이 베토벤을 보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에드 해리스를 보기 위해서였는지―.
하긴, 베토벤과 같은 압도적인 역사적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 쉬운 일일 턱이 없지요.
캐스팅부터가 문제입니다. 설사 남아 있는 사진은 없더라도 초상화로 널리 통용되고 있는 외모의 이미지가 존재할 경우 캐스팅 과정에서 선택의 폭은 그리 넓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베토벤 역을 맡은 에드 해리스는 〈불멸의 연인〉(1994, 버나드 로즈)에서 베토벤 역을 맡았던 게리 올드먼과는 또 다르게 그만의 베토벤을 구현하는 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베토벤 연기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중핵이 되는 성격의 특성은 아무래도 신경질적인 괴팍함, 또는 막무가내의 다혈질 정도일 텐데, 여기에 에드 해리스는 유머를 곁들여놓았다는 점에서 새롭습니다.
베토벤이 세 들어 사는 위층의 자기 방에서 거리낄 것 없는 분방한 태도로 머리를 감을 때 아래층 사람이 물 샌다고 베토벤 들으라고 고래고래 고함치는 상황이 그 한 예입니다.
베토벤은 청력에 이상이 있어 그런 소리쯤 듣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 텐데도 아래층 사람은 때마다 어김없이 성실하게(!)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줍니다.
반면, 베토벤은 그에 아랑곳없이 그저 즐겁기만 하지요.
이 대조가 참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가슴이 아픕니다.
이 사뭇 다른 두 개의 감정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는 에드 해리스의 연기가 유니크합니다.
이 특장을 감독이 조금 더 밀고 나아가지 않은 것이 유감스러울 정도지요. 그랬더라면 기왕에 완전한 허구의 인물을 설정하여 베토벤 곁에 둔 의도에 더하여 또 다른 의미로운 영역을 개척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입니다.
요컨대, 베토벤이라는 이 한없이 위대하면서도 문제적인 인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참으로 오랜만에, 정말로 실현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관객의 욕망과 감독의 의도
하지만 영화는 제가 보기에 어느 지점에서 아차 하는 순간 방향을 잃는 느낌입니다. 또는, 여러 가지 방향에 물색없이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영화는 전체적으로 뭔가 살짝 허전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 문제들입니다. 또 하나의 베토벤 전기 영화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에 대한 저의 기대는 사실 다른 곳에 놓여 있었거든요.
바로 음악입니다.
큰 극장에서 훌륭한 사운드 시스템을 통하여 베토벤의 음악을 실컷 듣고 싶다는 욕망, 이 지극히 마땅하고도 원초적인 욕망이 어느 만큼 충족되느냐가 이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서 제 마음속 깊이 감추어진 진짜 동기이자, 이 영화에 대하여 만족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리는 바로미터였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는 영화를 보는 올바른 태도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베토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는 속절없는 노릇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영화는 저의 기대를, 역시나, 상당히 저버렸습니다. 선곡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음악에 대한 몰입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편집도 문제였고요. 이것이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불멸의 연인〉이 자꾸 그리워졌던 까닭입니다.
하지만 감독의 의도를 저는 존중합니다. 감독이 그런 방식의 편집을 통하여, 또는 그런 선곡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그 무엇을 인정할 준비는 넉넉히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토탈 이클립스〉(1995)의 감독에 대한, 그러니까 과감하게 시인 랭보의 생애를 그려냈던 바로 그 감독에 대한 예의라고나 할까요.
또는, 액션 페인팅의 잭슨 폴록(구글 표기는 ‘폴록’이지만, 영화의 제목은 ‘폴락’입니다.)을 그린 영화 〈폴락(Pollock)〉(2000)의 제작자이자 감독이자 주연이었던 에드 해리스에 대한 예의라고 해도 괜찮고요.
하지만 저는 지극히 평범한 관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선곡과 편집 방식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긴, 이는 음악 애호가가 음악 영화를 대할 때 속절없이 취하게 되는 태도로서, 일종의 기본값이지요. 이 기본값의 충족이라는 면에서는 퀸의 프레디 머큐리를 그린 〈보헤미안 랩소디〉(2018, 브라이언 싱어)가 발군이었지요.
어쨌거나, 바로 이 지점에서 관객의 원초적인 욕망과 감독의 예술적인 의도 사이에 피하기 힘든 불일치가 생깁니다.
이것이 제가 이 영화에서 다른 요소들은 차치하고 오직 에드 해리스를 취하는 데 주력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괜찮다는 것이 이 영화에 대한 제 평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