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님은 먼 곳에〉& 〈크로싱〉
C58. 삶의 터전을 떠난 사람들의 비극 – 김지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 이준익, 〈님은 먼 곳에〉(2008) & 김태균, 〈크로싱〉(2008)
가슴이 아팠다?
〈크로싱〉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님은 먼 곳에〉를 보고 가슴이 아팠다고 말하는 것도 별로 이상하지 않지요.
그렇다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이 영화는 신나는 액션 활극으로 널리 홍보되었고, 감독도 그렇게 봐주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또, 관련 평론이나 리뷰들도 대체로 그런 관점을 기본적으로 채택하거나, 적어도 언급 정도는 하고 넘어가는 양상이었지요. 실제로 관객들도 그렇게 반응했고요. 이는 기왕에 익히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들입니다.
결국 이 영화를 보고 가슴이 아픈 사람은 어딘가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까지 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분명히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 이야기를 좀 해보고 싶군요.
드라마와 전쟁과 활극, 또는 이 땅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이 세 편의 영화는 장르의 성격은 서로 다를지언정, 테마 자체는 서로 비슷하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요컨대, 장르 구분을 하자면, 〈크로싱〉은 드라마, 〈님은 먼 곳에〉는 전쟁,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활극으로 우선은 분류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래도 따지고 보면 세 편 모두가 결국은 자기가 나고 자란 땅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물론 여기서 이 땅은 결국 ‘이 땅’, 곧 우리가 나고 자랐고, 지금도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이지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시대순으로 보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일제 강점기로 가장 앞서고, 그다음이 〈님은 먼 곳에〉의 베트남 전쟁 시절이며, 〈크로싱〉이 바로 지금 이 시대의 이야기로 가장 나중입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 있는 분위기만을 놓고 본다면 〈크로싱〉이 가장 끔찍하고, 그다음이 〈님은 먼 곳에〉이며,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가장 즐겁습니다.
산산이 부서진 가족의 이야기
하지만 그런 겉보기의 분위기가 감추고 있는 이면, 곧 바닥에 깔린 비극성의 정도를 따지면 ‘글쎄?’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됩니다.
〈크로싱〉에서 차인표와 그의 가족이 겪는 비극의 정도는 너무도 선연하고 자명합니다. 거기에는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의 어떤 준엄함마저 깃들어 있습니다.
하긴,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로 이루어진 단란한, 또는 단란해야 할 한 가정이 그야말로 산산이 부서지는 이야기이니,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분단 상황이라는 가장 기본적이고 엄혹한 비극적 운명이 그 바탕에 놓여 있기도 하지요.
히스토리가 아닌 허스토리
그렇다면 〈님은 먼 곳에〉는요?
이 작품은 감독의 말대로 ‘히스토리’가 아닌 ‘허스토리’로서, 베트남전에 대한 일종의 속죄이자 성찰의 영화라는 데 저는 이견이 없습니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저는 아마도 여성의 시각 또는 입장에서 베트남전에 대하여 어떤 논평을 가하는 영화로서는 이 작품이 거의 독보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게다가 아내가 남편을 찾아 한창 전쟁 중인 베트남의 지옥경, 그 살벌한 복마전 속으로 들어간다는 일 자체의 즉물적인 끔찍함은 물론이고, 여기에 그 만남이 결코 행복한 만남이 아니라는 어처구니없는 부조리의 상황까지 가세해 있는 형국입니다.
간절한 소망? 노!
하지만 제 생각에 이 영화의 이야기가 비극인 진짜 이유는 이 영화의 여주(女主) 수애의 베트남행이 그 자신의 간절한 소망의 결과가 아니라는 데 놓여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너무너무 사랑하여 미치도록 보고 싶은 나머지 죽을 각오로 그 위험천만한 베트남을 향해 달려간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이유라면, 기실 수애의 베트남행이 지니는 간절함은 애니메이션인 〈짱구는 못 말려 극장판 제10탄 - 태풍을 부르는 장엄한 전설의 전투〉(2002, 하라 케이이치)에서 바야흐로 적군과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이고 있는 사랑하는 비룡 장군의 안위가 너무나 걱정되어 그 모습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보고자 빗발치는 유탄 세례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모노 차림으로 미친 듯이 달려가는 그녀 ‘연이 누나’의 간절함에도 턱없이 못 미친다는 것이 제 느낌입니다.
냉혹한 타율적 떠남
바로 여기에 영화의 종착점에서 이 스토리가 겉으로 향하고 있는 극적 목표인 수애와 그 남편과의 만남이 성사되었는데도 그것을 도저히 해피엔딩으로 볼 수 없는 까닭이 놓여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곧, 그것은 수애의 소망이 아니었기에 이 엔딩은 해피엔딩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님은 먼 곳에〉는 〈크로싱〉과 동류가 됩니다.
〈님은 먼 곳에〉의 수애는 〈크로싱〉의 차인표처럼 자신이 나고 자란 여기 이 땅에 도저히 머무를 수가 없어서 베트남으로 떠난 것입니다.
남편은 다른 여자한테 마음을 빼앗겨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시어머니는 아이를 가지지 못한다는 이유로 허구한 날 구박이고, 친정에서는 출가외인이라며 냉정히 문전박대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작정 상경이라도 하여 홀로 새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하지 않는 한 그녀가 여기 이 땅에서 머무를 수 있는 곳은 더는 없는 것입니다.
출분한 여자의 미래
만일 그 시대에 그녀가 만난을 무릅쓰고 기어이 과감하게 출분(出奔)을 감행했더라면 아마 그녀는, 입센의 명작 희곡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가 집을 나간 뒤 어떤 신세가 되었겠는가에 대하여 중국의 문호 노신(魯迅)이 감행했던 추정대로, 십중팔구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지 않았을까요.
결국 그녀는 정말 어쩔 수 없이 베트남으로 간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도 행복을 찾아서가 아닙니다. 실제로 행복을 찾지도 못한 것 같습니다. 그 만남이 행복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으며, 그것이 행복이어서도 안 될 듯하다는 것이 관객으로서 저의 솔직한 심정이니까요.
무엇보다도 그녀 자신이 그 만남의 현장에서 행복해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베트남이라는 곳이 장현수의 〈라이방〉(2001)에 나오는 그 딱한 사내들에게처럼 그녀가 살아갈 삶의 터전일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가혹한 비극입니까.
액션 활극의 무대로서 만주의 성격
그렇다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요?
겉 포장은 정말 그럴듯한 신나고 웃기는 액션 활극이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면 세상에 이처럼 슬픈 비극이 또 있나 싶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일제강점기의 만주가 나라 잃은 우리 백성에게 신나는 활극의 무대일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이는 개척 시대의 미국 서부가 신나는 활극의 무대일 턱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거기는 그 어느 곳보다도 더욱 가혹한 삶의 현장일 뿐이었지요.
어찌 되었든 그 세 ‘놈’들 또한 갈데없는 나라 잃은 백성일진대 ‘찢기는 가슴 안고’ 내 나라 내 고향을 떠난 그들이 남의 나라 땅 만주에서 뭐가 그리 신나고 즐겁겠습니까.
미국의 서부는 적어도 나라 잃은 백성들이 오갈 데가 없어 찾아드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드넓고 황량한 만주 벌판 앞에서 눈부신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며 가슴 벅차 했을 조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었을까요.
빼앗긴 땅을 그리며 한없이 슬퍼하거나 자포자기하지나 않으면 다행 아니었을까요. 기껏해야 영화 속 송강호처럼 ‘양반 밑이나 일본 놈 밑이나 그게 그거’라며 애써 자위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동족상잔의 맞총질
더욱이 그 셋은 무어니 무어니 해도 결국 같은 조상에 같은 피를 나눈 동족입니다. 따라서 그 셋의 총질은 어디까지나 동족끼리의 총질입니다.
우리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지 않고 독립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때를 배경으로 했다면, 그들 셋의 맞총질을 혹 〈석양의 무법자〉(1966, 세르지오 레오네)의 삼각 맞총질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구경(!)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일제강점기 만주벌판’이라는 시공간적 배경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사실 조금 괴로웠다고 고백해야겠습니다.
물론 이는 어느 만큼은 〈크로싱〉과 〈님은 먼 곳에〉의 탓이기도 합니다. 개봉 순서와도 연관이 있지만, 저는 〈크로싱〉을 제일 먼저 보았고, 그다음으로 〈님은 먼 곳에〉를, 그리고 맨 나중에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보았거든요.
곧, 〈크로싱〉과 〈님은 먼 곳에〉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보았다는 뜻이지요. 덕분에 저는 이 세 편의 영화를 어떻게든 연관시키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나고 자란 삶의 터전을 떠난 사람들, 아니,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볼 수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광복, 분단, 전쟁, 탈북이라는 미래
그러니까 저는 유감스럽게도 이 영화를 마음껏 즐길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슬펐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세가, 그들의 운명이.
물론 그들의 앞에 놓인 것은 역사적으로 언젠가는 찾아올 광복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분단이기도 하며, 동족상잔의 전쟁이기도 하며, 나아가 베트남전이기도 하며, 급기야는 탈북자의 비극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님은 먼 곳에〉와 〈크로싱〉의 비극은, 어찌 되었든, 그들 ‘세 놈’의 미래가 필경은 안게 될 운명의 일부분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