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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59. 네 가지 이미지와 자연의 심판 또는 신의 섭리

- 앤드류 스탠튼, 〈월-E〉

by 김정수

C59. 네 가지 이미지와 자연의 심판 또는 신의 섭리 – 앤드류 스탠튼, 〈월-E〉(2008)

비디오테이프의 이미지

저더러 〈카우보이 비밥〉(와타나베 신이치로, 1998∼1999)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감명 깊게 본 단 하나의 장면을 꼽으라면 저는 ‘비디오테이프 장면’을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내는 미래 사회에 몇 남지 않은 희귀한 비디오테이프를 애지중지하며 20세기의 TV멜로드라마를 눈물을 흘려가며 감명 깊게 봅니다. 스파이크는 기록매체인 테이프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 이게 뭐냐며 사내가 보던 비디오테이프를 무신경하게 죽죽 잡아 빼지요. 스파이크의 그 날벼락같은 만행에 새파랗게 질리며 자지러지는 사내의 표정이 잊히지 않습니다.

조금 과장하면, 이 장면을 보던 저 또한 사내만큼이나 새파랗게 질려버렸지요. LP음반에 대한 애착, 카세트테이프와 비디오테이프에 대한 향수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장면을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봐 넘길 수 없지 않을까요.

한데, 이 똑같은 장면을 〈월-E〉에서 목도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명실공히 수많은 아이디어의 터질 듯한 보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픽사의 아홉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월-E〉를 보다가 저는 바로 이 장면에서부터 확실히 꽂혔지요.

한갓 로봇이 20세기 인간의 뮤지컬을, 그것도 비디오테이프로 보며 하루의 피로―로봇의 피로!―를 푸는 바로 이 장면, 이 순간부터 이 로봇은 저한테 이미 로봇 이상의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CD나 DVD보다도 먼저 퇴조한 비디오테이프를 ‘월-E’가 무려 7백 년이나, 아마도, ‘보존’했다니, ‘월-E’는 수집에만이 아니라 보존에도 남다른 능력, 또는 재능과 의지를 지니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니, ‘월-E’는 정말 신묘한 로봇, 아니, 신묘한 피조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7백 년을 한결같이 지구를 청소하는 본연의 임무에 우직하리만큼 충실하게 복무한 이 앙증맞은 고물―7백 년이나 묵었으니, 고물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일까요―로봇이 진 캘리의 뮤지컬을 좋아하는 서정적인(!) 복고 취미에, 일종의 쓰레기 골동품―‘월-E’ 자체가 이미 골동품 중의 골동품이지요―수집벽까지 있다는 것은 참 혀를 내두르게 하는 설정입니다.


나무를 심은 사람의 이미지

이것은 보이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단지 한 대의 청소 로봇이 7백 년 동안이나 줄기차게 지구를 청소한 끝에 마침내 지구가 식물이 서식할 수 있는, 그러니까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의 땅으로 되살아난다는 것―. ‘월-E’, 그가 죽음의 땅 지구를 살린 것이지요.

이 갸륵한 로봇 ‘월-E’는 이 순간 장 지오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프레데릭 백의 애니메이션 〈나무를 심은 사람〉(1987)에서 오랜 세월 줄기차게 나무를 심는 일에 우직하리만큼 충실하게 복무한 끝에 마침내 불모의 땅을 생명의 숲으로 탈바꿈시키고야 만 바로 그 사내, 그 ‘사람’의 자리에 올라섭니다. 이 마법 같은 성실의 표본.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황무지―.

이 보이지 않는, 그러나 가슴을 뛰게 하는 눈부신 이미지―.

글쎄, 이것을 기계문명, 또는 과학기술에 대한 희망의 표명으로 읽는 것이 적절할까요. 차라리 지구를 구하는 것은 과학기술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의지요 성실함이라는 메시지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요. 아니, 그 편이 더 옳지 않을까요.

과학기술이 희망이라는 말과 인간의 성실함과 의지가 희망이라는 말의 이 부정할 수 없는 뉘앙스 차이―.

아무리 지구가 형편없이 파괴되어도 결국 ‘나무를 심은 사람’의 그 무한한 성실함과 의지가 그 모든 참담한 사태들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는 희망이 진짜 희망이 아닐까요. 저는 이 희망에 희망을 걸어보고 싶네요.


낙하, 또는 추락의 이미지

처음에는 그것이 그냥 추락인 줄 알았습니다. 추락도 그냥 추락이 아니라, 한없이 매혹적인 낙하의 이미지였지요.

그래도 그것이 문자 그대로 추락이라면, 그것은 그저 단순한 사고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추락은 멈추지 않고 계속됩니다. 추락의 무한 연쇄―. 이제 그것은 더는 추락이 아닙니다.

그 옛날 백제가 무너질 때 의자왕의 3천 궁녀가 낙화암에서 몸을 던지던 이미지가 그랬을까요. 그들은 그야말로 천 길 낭떠러지, 그 잔혹하리만큼 가없이 치솟은 거대한 마천루 밑으로 망설임 없이 훌쩍 몸을 내던집니다.

거기에는 추호의 망설임도, 일말의 후회도, 실낱같은 공포도, 터럭만 한 절망도 없습니다. 거기에 있는 것은 오로지 몸을 던지는 행위, 그 자체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토록 ‘순수한’ 자살의 이미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자살이라기보다는 자기 파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오로지 자살을 위한 자살입니다. 그 무도한 자기 파괴의 행위, 그 순수성을 구현하기 위한 목적 이외의 아무것도 그들은 노리지 않습니다.

〈카우보이 비밥〉의 자살 이미지도 아름답기는 했을망정 결코 M. 나이트 샤말란의 〈해프닝〉(2008)의 자살 이미지처럼 가혹하리만큼 순수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순수함이 끔찍합니다. 이 순수함의 주체가 식물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끔찍합니다. 식물마저 인간에게 복수를 감행한다면 인간은 도대체 어디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하는 암담한 의문이 생깁니다.

하지만 여기에 이미 해답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사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입니다. 그 어떤 파라다이스에서 살든,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파멸은 필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어 먹은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지요.

〈해프닝〉에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한 가혹한 자기 인식이 있습니다.


노아의 이미지, 또는 신의 섭리

여기서 〈해프닝〉과 〈월-E〉는 문득 연결됩니다.

인간이 선(善)의지를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가지 않는다면 천지 만물은 언제든 인간을 심판할 수 있다는 것, 늘 그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심판 이후에라도 선의지와 성실함은 그 심판 이후를 구원할 수도 있다는 것―.

〈월-E〉는 〈해프닝〉의 미래일 수 있고, 〈해프닝〉은 〈월-E〉의 과거일 수 있습니다. 이 과거가 이 미래로 넘어가기 직전 어디쯤에 지금 인류는 머무르고 있다는 것, 이 자각의 준엄함―.

〈월-E〉는 여기서 조금 이상합니다.

그토록 과학기술문명이 발달했는데, 지구의 파괴 앞에서 인류가 그토록 속수무책일 수가 있을까요? 한갓 고물 청소 로봇 한 대에 인류 전체의 미래가 달려 있을 만큼요? 어쩌면, 어떤 거대한 흉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러니, 탐사 로봇 이브를 지구로 보낼 때 인간은 도대체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요? 무엇이 지구를 깨끗이 ‘청소’할 수 있으리라고 소망하게 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저 지구의 자정능력을 믿었던 것일까요?

그렇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심지어 인간은 지구를 청소하는 것조차 포기했습니다. 더욱이 이 포기는 7백 년이나 지속된 포기입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이 탐사를 계속했던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어쩌면 인간은 그 옛날 노아가 방주 속에서 뭍을 찾아 헤맸듯이, 언젠가는 반드시 있을 신의 섭리를 믿었던 것일까요?

그렇다면 ‘월-E’는 결국 신의 뜻일까요? ‘월-E’는 방주의 노아에게 희망의 소식을 전해준 비둘기인 것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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