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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60. 유황도의 기억

-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by 김정수

C60. 유황도(硫黃島)의 기억 –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2007)

단편소설 〈이오지마〉 또는 〈유황도〉

저한테는 ‘이오지마’보다 ‘유황도(硫黃島)’라는 이름이 더 익숙합니다.

이것을 왜 ‘이오시마’가 아닌 ‘이오지마’로 읽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히로시마(廣島)’를 ‘히로지마’로, ‘쓰시마(對馬島)’를 ‘쓰지마’로 읽지는 않는데 말이지요.

제가 처음 ‘유황도’라는 이름을 접한 것은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저 일본의 소설가 기꾸무라 이다루(菊村到)의 아쿠다가와 상 수상작인 〈유황도〉―원제가 ‘硫黃島(유황도)’였는데, 번역 과정에서 이것을 그냥 우리식 한자음으로 읽어 표기한 것입니다―라는 단편소설을 통해서였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일본에 ‘유황도’라는 섬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더욱이 그것이 미국과 패망 직전의 일본이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치른 격렬한 전투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은 더더욱 알 길이 없었지요. 실은 관심조차 없었다고 해야 맞습니다.

이 ‘유황도’를 일본어 발음으로는 ‘이오지(시)마’라고 읽는다는 사실 또한 일본어에 대한 지식이 없던 그 시절에는 알 까닭이 없었고, 역시 관심도 없었지요.

물론 제목 그대로 단편소설 〈유황도〉는 그 유명한 ‘이오지마 전투’와 관련이 있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예의 전투가 벌어졌던 1945년이 아니라, 전쟁 자체가 끝난 뒤인 1951년입니다. 게다가 작가는 이 소설에서 전투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극적 목표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관련은 분명히 있습니다. 이오지마 전투에 참가했다가 살아남은 병사의 이야기가 골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거지반은, 이제는 민간인 신분이 된 그 병사가 전쟁이 끝나고 불과 6년 뒤에 일종의 민간인 출입 금지 구역이었던 문제의 유황도를 찾아가려 갖은 애를 다 쓰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그 병사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그 유황도를 찾아가는 데 성공하여 그곳에서 자살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분량이 길지 않은 단편이라 굳이 그곳까지 찾아가 스스로 제 목숨을 끊어야만 했을 정도로 절박했던 그 병사의 내면 풍경이 상세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적어도 독자로서 저는 유황도가 그 병사에게는 너무나 절절한 현장, 꿈에도 잊지 못할 장소, 반드시 다시 돌아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해야만 그 어떤 마음의 짐을 덜어낼 수 있는 장소라는 점만은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리로만의 이해였지요. 그 절박함이 제 심금을 울리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설을 저는 이내 잊었습니다.


영화가 불러낸 기억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아버지의 깃발〉과 함께 느닷없이 세상에 나타났지요. 그리고 저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의 일본어 제목에서 ‘硫黃島(유황도)’라는 세 글자를 발견하고 소스라쳤습니다.

이어 기다렸다는 듯 깊이 오래도록 파묻혔던 기억이 두꺼운 먼지를 털어내고 불쑥 솟아올랐습니다. 유황도! 이오지마!

유황도가 ‘유황’도인 것은 말 그대로 이 섬에서 유황 가스가 분출하기 때문입니다. 농사를 짓고 살 수 없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군사적인 전략 요충지가 아니라면 차라리 버려두는 편이 나을 섬이지요.

하지만 당시 이 섬은 어쩌면 전쟁의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만큼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이것이 이 섬의 운명을 결정했고, 60년 뒤 마침내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와타나베 켄 또는 쿠리바야시

와타나베 켄은 더없이 적절한 캐스팅이라고 생각됩니다.

영화의 제작 연도를 기준으로, 그 20년쯤 전이었다면 아마 다카쿠라 켄이 이 역을 맡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봅니다.

물론 그랬더라면 조금은 이 영화 속 쿠리바야시의 이미지도 달라졌겠지요.

하지만 여기서 와타나베 켄은 누구보다도 쿠리바야시답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선택은 적절했다고 여겨집니다.

이 역사적 실존 인물인 쿠리바야시는 이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 나오는 한 부관의 입으로 비판받듯이, 명실상부한 무장(武將)이라기보다는 학자 타입의 책상물림에 가까운 인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책임을 맡은 이오지마의 전략적 가치를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간파했고, 또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하여 일본 군부 내의 온갖 전략전술상의 비판과 옥쇄(玉碎)의 종용을 이겨내며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만일 그가 이 가치를 오판하고, 도처에 펼쳐진 전선에서 상황이 불리해지면 일본군이 예외 없이 선택했던 저 끔찍한 자살 공격을 그 또한 결국 감행했더라면 일본의 패망은 그의 열망과는 반대로 분명히 좀 더 앞당겨졌을지도 모르지요.

물론 그 당시 일본의 패망 자체는 우리의, 그리고 세계의, 또 미국의 소망이었지만, 일본의 군인이었던 쿠리바야시는 이오지마를 미군에 내주지 않기 위하여, 또 그럼으로써 조국 일본의 패망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하여 말 그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미군의 일본 본토 공격을 늦추는 것이었지요. 이오지마를 하루 더 지키면 본토가 하루 더 무사하다―. 이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가 수립하고 실행에 옮겼던 전략도 이 생각에 기반을 둔 것이었고요.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

이오지마는 그 당시 미군의 주력 폭격기였던 B29의 항속거리를 고려할 때 전략적으로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 섬이었습니다. 이오지마를 기지로 쓸 수 있다면 일본 본토는 미군의 ‘사정거리’ 안에 그대로 들어오는 셈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미군의 공격 앞에 일본 본토는 무방비 상태가 되는 셈이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이오지마가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으로 일컬어졌던 까닭입니다.

영화에서는 스쳐 지나가듯 간단하게 묘사되지만, 쿠리바야시는 먼저 이오지마의 지형 구조와 상태를 완벽하게 파악한 다음 그에 맞는 전략 전술을 수립했습니다.

그래서 상륙작전을 펴는 적을 맞아 싸우는 상식적인 전술들을 부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모두 다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굴을 파서 버티는 게릴라 식의 지구전을 택했지요.

덕분에 미군은, 쿠리바야시의 계획대로, 이 작은 섬을 함락시키는 데 오랜 시일과 엄청난 인명 손실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오죽하면 미 해병대조차 이 전투를 가리켜 ‘역사상 최악의 전투’나 ‘지옥 중의 지옥’이라고 부르며 두려운 마음으로 일컬었겠습니까.


모범적인 지휘관

하지만 영화는, 아니,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쿠리바야시의 군사적 활약상을 그리는 데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이 영화는 훨씬 더 잔혹하고 끔찍한 스펙터클 전쟁영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가, 영화는 쿠리바야시 한 사람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않습니다.

요컨대 감독이 관심을 기울이고 주안점을 둔 것은 이오지마에 주둔했던 일본군 개개인의 내면과 외부의 ‘사정(事情)’들입니다. 그것을 그려냄으로써 전쟁의 ‘어떠함’을 드러내 보이려는 의도라고 하면 될까요.

이 영화가 〈아버지의 깃발〉의 짝패라는 의미를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지점도 바로 여기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비로소 예전에 읽었던 단편소설 〈유황도〉 속의 그 병사가 왜 그토록 이오지(시)마로 돌아가고 싶어 했는지, 그리고 끝내는 왜 전우들이 죽어간 그곳에서 마침내 스스로 죽으려 했는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듯한 심정이 되었습니다.

쿠리바야시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먹는 것에서부터 모든 것을 일반병사들과 다름없이 하는, 지휘관으로서 그의 솔선수범하는 모습뿐만이 아니라, 가족에게 끊임없이 소소한 내용의 편지를 써 보내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함께 알 수 있게 되어 감회가 유달랐지요.

더욱이 그는 자신의 전략을 완수하기 위하여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 만한, 또는 불필요한 희생이 예상되는 요소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과단성도 발휘했습니다.

그는 전투를 앞두고 몇 되지 않는 민간인을 굳이 섬 밖으로 모두 소개(疏開)시킨 것은 물론이고, 전 일본군 전선을 통틀어 ‘아마도’ 유일하게 위안소도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는 이오지마를 하나의 성지(聖地)로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 속에서 와타나베 켄의 입으로 말해지듯, 이오지마는 일본인 모두가 기리는 성지가 되었고,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성지를 자칫 훼손할 수도 있는 전투 장면을 다른 곳에서 찍어야 했지요.


전투가 끝난 뒤

아마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바로 이런 소소한 인간적인 면모들에 매력을 느끼지 않았을까, 넘겨짚어 봅니다. 감독은 이오지마가 일본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인가를 충분히 사려 깊게 헤아린 듯합니다.

감독의 그런 태도는 어디 한 군데에서도 스펙터클을 위하여 소소한 인간적인 요소들을 희생시킨 흔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쿠리바야시의 최후를 그리는 방식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려 해도 쿠리바야시의 최후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조차 스스로 지휘관임을 증명하는 아무런 표찰도 몸에 지니지 않고 전투에 참가했다는 것입니다. 일반병사들과 똑같은 처지에서 최후의 항전을 했다는 뜻이지요.

이오지마 전투가 끝나고 남은 전사자들 가운데서 쿠리바야시라고 알아볼 수 있는 주검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쩌면 발견은 되었어도 훼손 상태가 심하여 그것이 쿠리바야시라고 확증할 길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이라면 유전자 검사라도 할 수 있었겠지만, 그 당시에는 언감생심이었겠지요. 또, 그의 최후를 증언해 줄 병사도 남아 있지 않았고요. 그러니 그의 최후를 그리자면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감독으로서는 이 최후를 어떻게 그릴 것이냐가 매우 큰 고민거리였을 법합니다. 저 같으면 피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기록도 증언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가장 정직한 방식이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영화 속에 쿠리바야시의 최후를,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해 놓았습니다. 아마 여기에 이오지마를 대하는, 그리고 쿠리바야시를 대하는 감독의 본마음이 걸려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의 최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쿠리바야시가 미군의 총탄에 맞아 절명하는 것으로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부하의 손을 빌려 일본도로 할복을 완수하는 식으로 그리지도 않았고요.

쿠리바야시는 자신의 목숨을 그 스스로 끊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순간 그가 사용한 도구가 미국에 있을 때 절친하게 지냈던 한 미군 장교에게서 선물로 받은 권총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상상하는 쿠리바야시의 최후입니다. 아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적어도 그런 모양새여야 한다고요.

전 일본군을 통틀어 아마도 유일하게 섣부른 최후의 자살 공격을 허락하지 않았던 사령관, 어쩌면 군인답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인간적인 면모를 끝까지 유지했던 사내, 병사들의 목숨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겼던 지휘관, 조국과 가족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가슴이 뜨거웠던 남자,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끈질김, 바로 그 끈질김이 마초적인 군인상과는 정반대인 인간적인 면모의 중핵을 이루는 인물, 어쩌면 일본인들에게는 이오지마와 이음동의어일지도 모르는 이름 쿠리바야시―.

그래도 아마 이런 요소들에 대한 사려 깊은 헤아림과 상상의 주체가 다른 누구도 아닌 거장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아니었다면 저는 일본을 또는 일본군을 그리는 이 영화의 태도에 이 정도나마 감응하기는 힘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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