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달아난 꿩
10. 달아난 꿩
밥상에 낯선 반찬들이 올라와 있다. 갓 담은 열무김치, 부추와 시래기 무침, 건 보리새우볶음. 한입에 먹을 수 있는 크기로 가지런히 잘라놓은 파전도 있다. 어머니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미묘한 느낌의 차이가 있다. 빛깔에 윤기가 많다. 재료가 다듬어진 상태도 조금 거칠어 보인다. 나는 이내 알아차린다. 여동생이 가져온 것이다. 나를 위해 만들어 온 반찬이라는 어머니의 설명을 들으며 한 젓가락 집어 입에 넣는다. 맛도 어딘가 모르게 다르다. 한데도 역시 닮았다. 어머니한테 어지간히 길이 든 손맛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는 같아지기 힘들지도 모른다. 시댁과 친정의 입맛 사이에서 어떤 접점을 찾아야 할 테니까. 그게 여동생의 자리다. 아내요 며느리다. 그래도 병원에서 먹던 것보다는 한결 낫다. 제법이다. 기특하다. 고맙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인다.
마음을 쓰고 있네. 나를 위해. 오빠를 위해. 처음 먹어보는 여동생의 음식이다. 맛을 내기보다는 맛을 내지 않으려 마음 쓴 흔적이 짙다. 내가 먹기에 좋도록 간을 짙게 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보기에는 좋지만 잘 먹히지는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먹기보다는 삼킨다는 기분으로 씹는다. 모양새는 같아도 기억을 배반하는 맛이다.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는다. 하루 세끼, 식후마다 약을 삼켜야 하니 억지로라도 배를 채우기는 해야 한다. 어쨌거나 빈속에 약을 집어넣을 수는 없으니까. 그 짐스러움이 또 입맛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햇볕에 널어놓고 바짝 말린 것처럼 혀가 까끌까끌하다. 그 혀 위에서 침과 반찬이 깊이 섞이지 않는다. 잘 안 맞는 틀니를 억지로 끼운 채 음식을 씹으면 이런 기분일까. 내 입, 내 혀, 내 이가 아닌 것 같다. 누구 씹어주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 같다.
그 시절 어머니는 기역자로 꺾인 너른 마당 반쪽에 옥수수 말고 다른 것도 심었다. 마당은 반 너머가 전부 밭이 되었다. 알뜰하게 흙을 갈아엎은 자리에 배추, 상추, 고추, 깻잎 따위를 심었다. 맨 구석에는 자그마한 우리를 만들어 닭도 키웠다. 우리 집은 그때 하나의 어엿한 작은 농가였다. 덕분에 밥상에는 언제나 신선한 채소가 올라왔고, 암탉들이 갓 낳은 따스한 달걀은 우리의 귀한 영양식이었다. 어느 날 우리 집에 어디선가 꿩이 한 마리 날아 들어왔다. 그 생김새를 보고 엄마가 말했다. 까투리네. 장끼는 수컷, 까투리는 암컷. 그때 처음 알았다. 신기했다. 꼬리가 닭보다 더 길었고, 늦가을 땅에 떨어져 말라붙은 진한 낙엽빛깔의 몸에 군데군데 작고 검은 반점까지 섞여 있었다. 움직임도 어딘가 모르게 닭들보다 둔했다. 하지만 내가 거기서 느낀 것은 점잖음이었다. 닭들한테서는 본 적이 없는 품위. 꿩은 무슨 요량인지 도로 날아가지 않고 우리 집 마당에 계속 머물렀다. 혹시나, 싶어 닭 우리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꿩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다친 몸은 아니었다. 엄마는 그 꿩을 굳이 내쫓지 않았다.
닭 우리 한 귀퉁이는 곧 꿩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꿩과 닭은 서로 다투지 않았다. 그래도 칸막이를 따로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꿩은 알을 낳기 시작했다. 달걀과 모양이 달랐다. 크기는 더 작아서 탁구공만 했고, 거의 완전한 구형에 색깔도 흰색이 아니고 갈색과 밤색의 중간쯤이었다. 꿩은 알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 우리 안에 손을 집어넣어 알을 꺼내려 하자 꿩은 날개를 사납게 파닥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나는 놀라서 얼른 손을 밖으로 빼냈다. 한동안 꿩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꿩은 알을 품었다. 배 밑에 알을 깔고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모성 본능. 그제야 알았다. 신기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저것은 새끼를 깔 수 없는 알이라고 말했다. 수컷 없이 암컷 혼자 낳은 알이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결국 꿩의 알은 엄마 손에 들어왔다. 억지로 앗은 것은 아니었다. 암컷이 잠시 자리를 옮겨 한눈을 파는 사이에 재빨리 손을 집어넣어 꺼냈다. 엄마는 살며시 그걸 내 손에 쥐어주었다. 꿩이 낳은 알은 작고 동그랗고 따스했다. 프라이한 것이나 삶은 것이나 맛은 달걀보다 더 고소했다. 듣기로 꿩고기는 맛이 씁쓸하다는데, 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 맛을 잊지 못한다.
생각났다, 바로 그 맛이. 하필이면. 먹어보고 싶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식욕이었다. 입 안에 침이 고였다. 두 볼의 안쪽 살이 아렸다. 하지만 지금 꿩알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나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설사 정말로 꿩알을 구해다 먹는다고 한들 뭐가 달라질까. 기억 속의 맛과 똑같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오히려 달라서 실망할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내 식성도 어지간히 변했다. 아내와 했던 연애는 그걸 바꾸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이제 막 생기기 시작한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는 곳에 아내를 따라서 처음 갔을 때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메인 요리에 곁들여 나온 멀건 미역국뿐이었다. 어째서인지, 그때는 신기하게도 미역국이 나왔다. 그마저도 온전한 맛은 아니었다. 차라리 미역 줄기가 들어간 스프라고나 해야 할 만한 것이었다, 그것은. 피자도 스파게티도 샐러드도 다 내 식성에 맞지 않았다. 모든 재료가 모래 알갱이들처럼 혀 위에서 겉돌았다. 그저 느끼해서만은 아니었다. 그것만으로 표현하기에는 한참 모자란 어떤 깊은 거부감이 있었다. 지극히 토속적인 어머니 손맛에만 오래도록 줄기차게 길들어온 식성이었다. 하지만 아내를 만나는 동안 내 혀는 아내가 좋아하는 서양 음식들에 자꾸 노출되었고, 그러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내 식성은 속절없이 바뀌어 갔다. 마침내 나는 그런 것들을 아내 못잖게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아내가 내 식성을 바꾸어놓은 셈이다. 아니, 입맛의 계발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까.
꿩은 가을의 막바지, 겨울이 시작될 즈음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철망으로 된 우리의 문짝이 어쩌다 잠시 열려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그 한 귀퉁이가 낡아서 찢어진 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이 분명치 않다. 꿩이 날아가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분명 날아갔을 것이다. 담을 넘어 어디론가 훌쩍. 어느 날 느닷없이 그렇게 찾아왔던 것처럼, 꿩은 어느 날 예고도 없이 그렇게 떠나가 버렸다. 잘 있으라는 인사말 한마디 남겨놓지 않고. 마치 처음부터 꿩 같은 건 거기에 없었던 양 우리 속의 꿩이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닭들은 보았을까, 꿩의 탈출을. 보고도 가만히 있었던 것일까. 보았다면 무슨 심정이었을까. 아니면 꿩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가 닭들이 잠든 틈을 타 몰래 달아난 것일까. 자유를 찾아서? 닭들도 바로 곁의 꿩 우리가 어느 날 아침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을까. 그래서 그동안 정들었던 꿩의 부재를 아쉬워했을까.
그 며칠 전에 안 좋은 일이 있었다. 쥐가 우리 안으로 침입해 닭 두 마리를 물어뜯어 죽였다. 그 시절에는 쥐가 흔했다. 학교에서 쥐약을 나눠주기도 했다. 하긴 쥐 잡는 날이 따로 정해져 있기도 하였으니까. 국가적인 행사였다. 쥐는 없는 곳이 없었다. 어디서든 쥐는 시도 때도 없이 출몰했다. 한밤중에 화장실에 가려고 방문턱을 넘다가 마루를 휙 하니 지나가는 쥐를 밟을 뻔한 적도 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물컹물컹한 쥐의 등줄기, 그 징그러웠던 감촉을 내 발바닥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아무리 거듭 비누칠을 해서 씻어도 깡그리 지울 수는 없었다, 그 발 저림 같은 낭패스럽고 불쾌한 느낌을. 천장을 돌아다니는 쥐의 느닷없는 발소리는 없으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우리는 그 시절 쥐들과 한데 어울려 살았다.
닭의 하얀 목덜미는 새빨간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흰색과 빨간색. 그 눈이 시릴 만큼 선명한 대조. 소름이 돋았다. 하루는 저녁 무렵 갑자기 닭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 요란한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어머니를 따라 득달같이 우리로 달려갔다. 쥐는 벌써 어디론가 달아난 뒤였다. 손전등 불빛 속에 닭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런 눈빛은 처음 보았다. 닭한테도 표정이라는 게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살아남은 닭들은 목을 물어뜯긴 채 처참하게 죽어 있는 두 마리 닭의 둘레를 실성한 듯 배회하며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발걸음이 평소와 달랐다. 허방을 짚는 모양새였다. 눈빛이 와들와들 흔들리고 있었다. 초점이 없었다. 말 그대로 공황 상태였다. 엄마는 죽은 닭들을 서둘러 우리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 사건이 꿩한테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일까. 그래서 어쩌면 여기가 더는 살 곳이 못 된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그렇다. 꿩은 그때부터 탈출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다른 안전한 보금자리를 찾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을 법도 하다.
우리의 문짝이 왜 열려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꿩이 애써 열어젖혔는지도 몰랐다. 철망에 꿩의 깃털이 몇 개 묻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걸 꿩이 문짝을 밀어 열려고 노력한 증거로 새겨도 될지는 알 수 없는 문제였다. 아니면 비좁은 틈으로 빠져나가려다 남긴 흔적이었을까. 어쩐지 나는 꿩이 그곳이 싫어서 달아났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우연히 문이 열린 것을 알아차리고 시험 삼아 한 번 나가본 정도로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꿩이 조만간 다시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꿩한테도 비둘기처럼 귀소본능이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거기에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꿩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어쨌거나 문짝은 열렸고, 그 틈새로 꿩은 미련 없이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나는 그래도 닭을 더 계속해서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닭들은 곧 처분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가운데 어느 쪽의 결정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도 머지않아 헐려 다시 밭이 되었다. 그 닭들 모두가 우리 식구의 밥상에 오르지는 않았다. 아마도 시장의 닭집에 내다 팔았거나 이웃집에 나눠주었을 것이다. 어느 날 방과 후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휑하니 비어 있었다. 바람에 문짝이 헐겁게 덜렁거렸다. 올 것이 왔구나. 나는 망연자실하면서도 받아들였다. 어쩌면 그런 일이 생기리라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지레 넘겨짚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예감이었다. 각오가 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때는 시장통에 있는 닭집에서 주인이 손수 닭을 잡아주었다. 숫제 거기다 우리를 만들어놓고 닭을 키웠다. 주문을 받으면 그 가운데 한 마리를 꺼내 손님이 보는 데서 바로 손을 보았다. 닭집 주인은 우선 여봐란듯이 닭을 끓는 물에 집어넣기부터 하였다. 자신감에 찬 우악스러운 손길로. 뚜껑 덮인 커다란 양은 찜통 속에서 닭이 파닥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찜통은 무슨 못 먹을 것을 삼킨 듯 진저리를 쳤다. 주인은 뚜껑이 열리지 않도록 손잡이를 꼭 붙잡고 힘껏 내리눌렀다. 오래가지 않았다. 이윽고 닭의 움직임이 멈추고 조용해지면 주인은 뚜껑을 열고 그걸 꺼내어 깃털을 벗겨냈다. 축 늘어진 몸, 흠뻑 젖은 깃털. 이미 생명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주인은 털을 다 뽑은 그 닭을 무수히 칼자국이 나 있는 커다란 통나무 도마 위에 올려놓고 묵직한 식칼을 가차 없이 내리쳐 목을 잘랐다. 주인의 모든 동작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손님들은 그걸 즐겼다. 신기한 볼거리, 잔혹한 눈요깃감. 놓칠 수 없는 구경거리였다. 끔찍해하면서도 나는 내내 주인의 손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우리 집 닭들도 다 그런 신세가 되었겠지.
그때 그 꿩은 어디로 날아갔을까. 본디 살던 곳을 다시 찾아갔을까. 아니면 어디 또 다른 집으로 날아들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차지했을까. 어쩌면 꿩 또한 속절없이 어디선가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던 닭들과 똑같은 신세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