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기다림_20

- 20. 탯줄

by 김정수

20. 탯줄

문득 내 뱃가죽에 꼽혀 있는 것이 탯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막 태어난 신생아다. 한데 탯줄을 끊지 않았다. 또는 못했다. 탯줄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아직 독립된 생명체로 세상에 우뚝 서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머니한테, 어머니 몸에 내 몸이 아직 이어져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몸이 그 탯줄을 통해서 내 몸에 공급해 주는 영양분이 끊기면 나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 지금 내 몸은 어머니의 몸에 온전히 의존하고 있다. 실제로 그렇다.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니 속절없는 노릇이다. 나는, 내 몸은 하루하루, 한 끼 한 끼 어머니의 손으로 연명되고 있다. 어머니가 탯줄을 끊고 일손을 놓으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다.

끔찍하다. 내 신세가 딱하다. 밥을 먹고, 약을 먹고, 잠을 자고, 배설을 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뱃가죽의 관이 꼽힌 부위에 드레싱을 하는 일도 날마다 한 번씩 반복해야 한다. 언젠가 병원에서 처음 그 용어를 들었을 때 샐러드에 끼얹는 드레싱이 생각나 기분이 묘했다. 먹는 약과 바르는 약, 또는 끼얹는 약. 약을 먹을 때와 약을 바를 때 기분이 조금 다르다. 끊어지지 않은 탯줄을 썩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 탯줄은 끊어서는 안 되는 탯줄이 아닐까. 끊는 순간 나는 정말로 죽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 탯줄은 내가 영원히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할, 몸에 달고 살아야 할 생명줄이 아닐까. 어쩌면 이 탯줄은 병원에서 새로 달아준 것이 아니라, 날 때부터 지금까지 내 몸에 온전히 붙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걸 모르고 여태껏 살아온 것이 아닐까. 그러니 병원에서는 단지 그 숨겨진 탯줄을 찾아내서 내가 볼 수 있도록 겉으로 드러내어 주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이게 당신의 실존이야, 하고 선언하듯이. 당신은 이 탯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못돼, 하고 경고하듯이. 이 탯줄을 끊거나 잡아 뽑는 순간 내 생명도 덩달아 끝장나는 셈이라고. 앞으로 무사히 목숨 부지하고 살아가고 싶다면 이 탯줄을 결코 무시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그동안 내가 해온 짓이 바로 그런 위험천만한 만행이었다고.

아이들이 돌아간 자리가 휑하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렇게 느껴진다. 내 마음이 휑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은 별말이 없었다. 나를 보고 잠시 멋쩍은 웃음을 안쓰러이 입가에 지어 보였을 뿐, 살갑게 다가오지도 않았고, 요란하게 떠들어대지도 않았다. 한없이 낯선 자리였을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험한 꼴로 몸져누워 있는 아버지. 처음 보는 광경. 처음 겪는 자리. 아이들 마음은 어땠을까. 오랜만에 제 아비를 보고 그저 반갑기만 했을까. 아니면 새삼 걱정스러워졌을까. 모르겠다. 아이들의 낯빛이나 행동거지만으로는 알 수 없다. 아이들은 조용히 앉아 있다가 다시 제 엄마를 따라서 조용히 일어나 돌아갔다. 어쩌면 그 마음 한 귀퉁이에 전에 없던 상처가 새로 생겼을지도 모른다. 혈육 사이에서만 감돌 법한 살가운 기운과 오래도록 적조한 사이였음을 알려주는 어색함이 한데 공존하는 기묘한 자리. 그 어색함은 아이들의 것이기도 하였고, 내 것이기도 하였고, 아이들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것이기도 하였다. 어떻게 견뎠을까. 어떻게 참아내었을까. 아이들도 그 모든 어색함을 고스란히 다 느끼지 않았을까.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화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곤혹스럽지 않았을까.

어쨌든 그 시간은 이제 끝났다. 지나갔다. 다행이다. 한데도 이 휑한 가슴속에 무슨 찌꺼기처럼 남아 있는 아린 느낌은 도대체 무엇일까. 자꾸 떠오른다. 망막에 맺힌 아이들 모습의 잔상이 새삼 진하다. 내 아이들 같지가 않았다. 그 새 훌쩍 더 자란 것 같았다. 실제로 자랐다. 자라지 않았을 턱이 없다. 낯설다. 내가 없는 동안, 내가 보지 못하는 동안 벌어진 일이다. 그 편차가 거북하다. 이토록 낯설 줄은 몰랐다. 거기에 나는 아무런 이바지도 못했다. 아이들은 아비가 없어도 자란다. 정말 그렇다는 것을, 그 말이 맞다는 것을 나는 속절없이 확인한 셈이다. 내가 곁에 계속 있었다면 그 양상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아마도. 필경은. 그렇다면 자라되 지금과는 조금 다르게 자라지는 않았을까. 의문. 의심. 어쨌거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변화라면, 이건 내가 책임지지 못할 변화다. 어쩌면 책임져서는 안 되는 변화일까.

문득 이 자리를 계기로 아이들이 갑자기 철이 들기 시작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은 그저 그런 줄로만 알고 지내왔던 문제에 대하여 새삼 나름의 느낌과 판단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중학생과 초등학생, 아직 어린 것은 분명하지만, 아이들은 어떤 일을 계기로 갑자기 철이 들기도 한다. 어른들은 그걸 모른다. 또는 까맣게 다 잊어버린 걸까. 자신이 그런 식으로 철이 들면서 어른이 되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이 자리가 아이들한테 바로 그런 계기가 된 것은 아닌지. 흐뭇하지 않다. 걱정하고는 다르다. 싫다. 철이 드는 순간 아이들은 이미 아이들이 아니다. 몸이 어느 정도 성장했는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아이들이 아이들인 것은 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이 드는 순간 아이들은 아이다움을 잃어버린다. 내 아이들이 그렇게 되는 것이 나는 싫다. 아이다운 아이들로 오래도록 남아 있어 주면 좋겠는데, 이제 다 글러버린 걸까. 어쩐지 참담하다. 이토록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건강을 다시 회복한들 그게 무슨 소용일까 싶기까지 하다. 아이들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건져내어 그 어디로도 가지 못하게 붙잡아놓고 싶다. 아이들의 아이다움을 되돌려놓고 싶다. 되찾고 싶다. 헛된 욕망임을 알기에 더더욱 안타깝다.

탯줄이다. 어쩌면 아이들 몸에도 내가 관리해 주어야 할 탯줄이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세상에는 그런 것이 참 많지 않은가.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도, 창조주의 섭리도, 다 그런 것이다. 아이들이 돌아간 뒤의 허전한 자리를 목도하고 나니 비로소, 아니, 다시금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아버지로서 지금껏 그것을 관리해 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하지만 지금 나는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마땅히 해주어야 할 그 노릇을 못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나는 다른 어떤 일도 못하고 있다. 처자식을 먹여 살린다는 거룩한 소명은 숫제 놓아버린 지 오래다. 나는 하루아침에 무능한 가장, 소용없는 아버지, 쓸모없는 남편이 되어버렸다. 나는, 내 몸은 지금 한 가지 쓰임새밖에 없다. 아들로서의 쓰임새. 오래도록 방기해 왔던 아들이라는 자리. 나는 참으로 한참 만에야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그동안 못다 한 아들 구실을 하는 데 내 존재를 송두리째 바치고 있다. 이건 내 뜻이 아니다. 한데도 어쩔 수가 없다. 이것이 지금 이 순간 단 하나뿐인 나의 존재가치다. 인정해야 한다.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아들다운 아들이 아니다. 너무 먼 길을 돌아왔다. 또는 너무 멀리 가버렸다. 몸은 여기 있지만, 내가 있는 자리는 여기가 아니다. 뭔가 크게 어긋나 있다. 어머니는 그걸 억지로 다시 꿰맞추려 하고 있다. 잘 될 턱이 없다. 가버린 것은 가버린 대로 인정해야 한다. 떠나간 버스다. 흘러간 강물이다. 그게 맞지 않을까. 하지만 어머니는 그걸 되돌려놓으려 하고 있다. 그 의지가 느껴진다. 거북하다. 거기에 말려들면 안 된다. 하지만 말려들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하는 것이 맞을까. 거부할 수도, 저항할 수도, 부정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받아들이는 것뿐인데. 지금 어머니는 내 그런 약점을 잘 알고 있다.

돌아가고 싶다, 집으로. 역시 아이들을 보았기 때문일까. 예전의 생활이 그립다. 아니, 그립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내 몸이 예전의 생활 감각을 욕망하고 있다. 그게 느껴진다. 뱃가죽에 꼽힌 것을 확 잡아 뽑고 떨쳐 일어나 이 집을 탈출하는 내 모습이 환영처럼 눈앞에 아른거린다. 기시감. 예전에 내가 지겹도록 두고두고 시달렸던 환영이다. 나는 늘 집을 떠나는 내 모습을 상상하곤 하였다. 그것만이 내가 살 길이라는 생각. 그러지 않고는 내가 내 명대로 살 수 없으리라는 생각. 하루하루 내 생명이 벌레들에 갉아 먹히는 듯한 느낌. 타고난 생명력의 소진. 아버지는 부지런히 나를 짓밟았고, 어머니는 나를 지켜줄 여력이 없었고, 동생들은 아직 어렸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자주 아팠던 것은? 자주 아팠어도 마음 놓고 아프지는 못했다. 앓는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길이 사나웠다. 아버지는 앓는 나를 바라보며 싫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것은 아비가 싫어하는 일을 아들로서 앞으로 다시는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나 협박 같았다. 어쩌면 그것도 아버지다운 사랑이었을까. 그 한 표현 방식이었을까. 그랬는지도 모른다. 예전에 내 아이들이 아플 때 나도 모르게 기분이 나빠지려 하는 걸 느끼고 흠칫 놀란 적이 있다. 아버지도 내가 아플 때 그런 식으로 기분이 나빴던 것일까. 덕분에 나는 단 한 번도 마음껏, 떳떳하게 앓지 못했다. 아픈 것은 곧 죄였다. 내 아이들이 그런 죄책감을 느끼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거야말로 죄가 아닌가. 아비로서 저지를 수 있는, 그러나 저질러서는 안 될 고약한 죄.

어쩌면 내가 집을 떠나고 싶었던 것은 그런 죄책감을 더는 느끼고 싶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른다. 떳떳하게 앓아보고 싶어서였는지도. 아픈 것은 죄가 아니다. 죄여서는 안 된다. 한데도 나는 지금 그 죄책감을 다시금 느낀다. 아버지가 마루를 서성일 때마다 그걸 느낀다. 아버지의 사나운 눈길을 의식한다. 거기에서 나를 책망하는 기운을 느낀다. 마음이 못내 불편하다. 아버지를 의식할 때마다 몸이 뻣뻣이 긴장한다. 이 느낌이 싫다. 징그럽다. 여전히 나는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무엇을 보게 될까 두렵다. 아버지가 헛기침할 때마다 가슴 한 귀퉁이가 철렁 내려앉는다. 나에 대한 질책처럼 들려서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다.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말 한마디도 나직하게 하려고 애쓴다. 되도록 나한테로 눈길을 보내지 않는다. 아버지도 나를 의식하고 있다. 내가 불편해한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그렇게 서로를 불편해하면서 조심하고 있다. 언제나 내 몫이었던 것을 이제는 아버지가 나누어 맡고 있는 셈이다. 제법 공평해졌다.

지금 이 집에서 떳떳하고 당당한 사람은 오로지 어머니뿐이다. 나를 돌보는 데, 나를 간호하는 데, 나를 먹이고 씻기는 데 어머니는 거리낌이 없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어머니의 손길에는 자신감이 넘친다. 낯설다. 조금 지나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거기에 감염이 되어 나도 덩달아 떳떳해진다. 이건 좋은 점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어머니를 방해하지 않으려 애쓴다. 감히 훼방 놓지 못한다. 그게 눈에 보인다. 아버지는 정말 변한 것일까. 믿어도 될까. 이러다 느닷없이 뒤통수를 맞는 것은 아닐까. 나는 아직 안심하지 못한다. 그래도 이게 사실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부정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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