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기다림_18

- 18. 허기와 배설

by 김정수

18. 허기와 배설

아프지 않게 일어나는 방법을 어지간히 익혔다. 몸의 어느 부위에 힘을 주고 어느 부위에 힘을 주지 않아야 하는지 이제는 거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래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 일이 더는 어렵지 않게 되었다. 통증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그걸 피해 갈 수 있는 요령을 터득한 것이다. 남은 문제는 현기증이다. 이건 피할 도리가 없다. 아프지 않게 일어나 앉아도 현기증 때문에 금세 도로 눕게 된다. 아니, 눕는 일 자체도 쉽지만은 않다. 그 짧은 시간에 몸은 벌써 앉아 있는 자세에 적응해 버린다. 누우려면 그 균형 잡힌 상태를 다시 허물어뜨려야 한다. 두 겹의 불편이다.

몸의 자세를 바꿀 때 중력이 내 몸에 미치는 영향을 느낄 수 있다. 지구가 내 몸을 잡아당기고 있다. 걸리버가 난쟁이들한테 포박되어 해변에 누워 있을 때도 이런 느낌 아니었을까. 이보다 더 확실한 감각이 또 있을까. 내 온몸 구석구석이 분명하게 그걸 감지한다. 어쩌면 고맙다고 해야 할까. 충분히 잡아당겨 주지 않으면 내 몸은 위태롭게 허공에 떠 있어야 할 테니까. 그렇다면 도저히 현기증을 떨쳐내 버릴 도리가 없을 것이다. 바닥에 온몸을 밀착시킨 채 누워 있을 때가 제일 편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분명 중력 덕분이다. 뉴턴 물리학, 고전 물리학의 세계다. 가장 안정된 상태. 불안에서 가장 먼 상태. 인간이 비로소 편안히 잠들 수 있는 상태.

피가 더는 나오지 않는다. 적어도 눈으로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또렷한 붉은색은 이제 없다. 치유. 그래, 아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 과정이 느리지만 차근차근 멈추지 않고 진행되고 있다. 체액의 양도 많이 줄어들었다. 하루가 다르게 그 양이 줄어들고 있다. 어머니는 그걸 정확하게 측정하고 있다. 가계부를 쓰듯 날마다 때마다 측정한 양을 수첩에 꼼꼼히 기록해 둔다. 그 수첩이 내 머리맡에 놓여 있다. 가끔 그걸 들춰본다. 그 숫자들을 자료 삼아 머릿속으로 그래프를 그려본다. 완만하지만 명백한 하강 곡선이다. 거의 직선에 가깝다. 방향이 확실하다는 뜻이다. 낫고 있다.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해석은 해석이고, 몸은 몸이다. 체액의 색깔이 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아직 내 몸은 통증과 현기증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통증과 현기증은 두 가지 행동을 힘겹게 한다. 하나는 식사요, 또 하나는 배설이다. 통증이 일 때마다, 현기증이 치밀 때마다 식욕이 한 눈금씩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멀미할 때처럼 속이 메슥거린다. 식욕이 바삐 달아난다. 먹는 일이 고역이 된다. 그러고 보면 먹는 일은 언제나 힘겨웠다. 먹는 일을 그 자체로 즐겨본 기억이 거의 없다. 언제나 시간에 쫓겼고, 허기를 면하려고 억지로 먹었다. 먹지 않고 일을 할 수는 없으니까. 먹지 않고 공부를 할 수는 없으니까. 먹지 않고 연애를 할 수는 없으니까.

연애할 때는 사랑의 감정에 취하여 배고픔도 잊는다는 말은 거짓이다. 나는 연애할 때 더 깊이 허기를 느꼈다. 먹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이상한 갈망에 늘 시달렸다. 그래서 아내를 만나면 언제나 밥부터 먹자고 졸랐다. 연애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었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랬다. 아내와 데이트를 하고 집에 돌아가면 밤늦게까지 시험공부를 하고 났을 때보다, 몇 날 며칠 야근을 하고 났을 때보다 더 피곤했다. 먹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바로 연애였다. 그러니 나한테 식사는 즐거운 여흥이 아니라 속절없이 감당해야 할 끼니였다. 엄연한 한몫의 끼니. 어쩌자고 그렇게 살았을까.

이상하리만큼 먹는 일과 관련된 즐거운 기억이 없다. 나한테 그런 기억이 없다면 어머니한테도 그런 기억이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자식들한테 충분히 해먹이지 못했다. 그것은 어머니한테 깊은 부채감으로 남아 있다. 나는 그걸 느낀다.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머리에 앉아 즐겁게 먹어본 기억이 없다. 충분히 먹어본 기억도 이렇다 하게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돌이켜 보니 나는 언제나 허기져 있었다. 늘 허기져서 그 상태에 익숙해지면 허기지지 않은 상태는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있을 때처럼 어색하고 낯설게 된다. 그래서인지, 과식할 기회도 드물었지만, 어쩌다 과식하게 되면 그것은 거의 어김없이 배탈로 이어졌다. 배부르게 먹을 수가 없었다. 배가 부른 상태에, 배가 부를 만큼 먹는 일에 나는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서 죄책감 같은 것마저 느꼈다. 밥을 한 그릇 더 달라는 말을 어머니한테 해본 기억이 없다. 나는 어머니의 사정을 다 알고 있었다. 우리 집이 실컷 먹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는 제법 눈치 빠른 아이였던 셈이다.

적게 먹는 일도 버릇처럼 익숙해지면 그런대로 견딜 만하다. 물론 허기의 느낌이 아주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건 사라질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허기는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깊은 갈망과 비슷하다. 늘 시달린다. 하지만 견딜 수는 있다. 그랬기에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그랬기에 어머니도 살아 있고, 내 동생들도 살아 있는 것이다. 허기는 그런 것, 그런 정도의 것이다.

배설 문제는 조금 더 심각하다. 적어도 아직은 그렇다. 화장실까지 걸어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막상 화장실에 가서도 똑바로 서서 오줌을 누지 못한다. 뱃가죽의 통증과 현기증이 동시에 치밀어 오른다. 앉아야 한다. 소변은 그나마 낫다. 딱히 힘을 주지는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 쪽은, 역시 힘겹다. 쥐가 이빨로 벽에 구멍을 뚫듯이 무한한 인내심을 발휘하여 야금야금 힘을 모아 조금씩, 조금씩 쥐어 짜내야 한다. 어느 한순간도 호흡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 그러면 힘을 그러모아 쥐어 짜내는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밟아야 한다. 변비하고는 다르다. 그런 따위 문제가 아니다. 그래도 어머니의 손을 빌리지 않고 내 힘으로 화장실까지 가서 일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라고, 감사해야 한다고 애써 마음을 다독인다. 하지만 좌변기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그렇듯 하염없이 오랜 시간을 들이고 있다 보면 문득 우울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어김없다. 참담하다.

먹는 일과 배설하는 일, 이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조건이 지금 나한테는 결핍되어 있다. 먹는 일과 배설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야 알겠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단순히 불편하고 안 불편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인간으로서의 자존심, 나아가 존엄성과 관련이 있는 문제다. 이제야 알겠다. 이렇게 곤혹스러울 수가 없다. 거동하기가 편치 않은 노인들이나 지체장애인들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듯한 기분이다. 이 문제만 해결이 된다면, 여기에서만 해방이 된다면 통증이나 현기증 따위는 얼마든지 참고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뱃가죽에 차고 있는 것을 하루빨리 떼어내야 한다. 그 길밖에는 없다. 그러자면 체액의 양이 현저하게 줄어들어야 한다. 하나도 안 나온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의사는 그걸 신호로 판단할 것이다. 회복의 신호. 언제쯤에나 그렇게 될까. 조바심이 인다. 늦어도 다음 외래 예약 날까지는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문득 아이들이 보고 싶다. 실은 병원에 있을 때부터 줄곧 보고 싶었다. 그러니 문득이 아니라, 또 보고 싶다고 말해야 옳다. 자꾸 보고 싶다. 그저 오래도록 서로 떨어져 있어서 그리운 것하고는 다른 감정이다. 어떤 끈 같은 것이다. 놓치면 영영 끝장이라는 느낌. 그래서 어떻게든 잡고 있어야 하는 것. 내가 그 끈을 여전히 굳게 잡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잡고 있다면 안심이 된다. 위안이 된다. 어째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질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슬며시 주먹을 쥐어본다. 마치 그렇게 그러쥔 내 손아귀에 아이들과 나를 이어주는 끈이 들어 있다는 듯이. 그걸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야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참고 있다. 참았다. 아이들한테 내 몸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아비의 이런 몸을 아이들이 본다면 분명히 마음에 상처를 받을 것이다. 꼭 상처가 아니더라도 어떤 개운치 않은 이미지가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을 것이다. 그게 싫다. 두렵다. 꺼려진다. 창피하거나 부끄러운 것하고는 다르다. 그런 감정이라면 이미 나는 무감각해졌다. 그만큼 환자의 처지, 환자의 상태에 깊이 적응하고 있다. 한데도 아이들이 보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그 또한 깊은 갈망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아마도 이 갈망을 아내가 눈치챈 모양이다. 하긴 눈치채지 못할 까닭이 없다. 알 만하다.

말 그대로다.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아이들을 데려오겠다는 말도 없이 아내가 저녁나절 갑자기 아이들과 함께 나타났다. 어머니하고 미리 얘기가 오갔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아내는 요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알아서 어머니와 연락을 취하고 있다. 눈치가 그렇다. 나는 거의 체념상태로 방임하고 있다. 간섭할 처지도 아니다. 잘 안다. 하지만 너무 느닷없지 않은가. 이건 적이 다른 성질의 문제다. 내가 아이들이 보고 싶은데도 참고 있는 것은 꼭 내 딱한 몰골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아이들과 아이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사이의 문제다. 차원이 조금 다르다.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설명 없이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아이들은 바보가 아니다. 제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의 관계에 대한 나름의 느낌이나 생각이 있을 것이다. 충분히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대충 얼버무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어떻게? 여기서 나는 속절없이 막막해진다. 그러니 아이들이 보고 싶다고, 한번 데려오라고 어찌 대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결론을 내리지 못 한 채로 끝날 수도 있다.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는 문제임을 잘 알고 있다. 섣불리 대처해도 괜찮은 문제가 아니다.

한데,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내 생각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되어버렸다. 아내의 어느 구석에 이런 과단성이 숨어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아내 같지가 않다. 내가 알고 있는 여자가 아닌 것 같다. 낯설다. 아이들을 오랜만에 본 느낌도 반가움보다는 낯설음에 가깝다. 이 낯설음 자체가 또 몹시 낯설다. 나는 한 발짝 떨어져서 텔레비전 드라마 속 한 풍경을 보고 있는 기분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아이들. 거기에 잔뜩 머물고 있는 어색함이 손끝으로 만져질 듯하다. 그 이물감에 소름이 끼친다. 문득 아내의 이런 소행이 괘씸하다. 이 괘씸함에 힘입어 나는 통증도 못 느낀 채 벌떡 일어나 앉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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