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아버지의 과거, 두 번째
28. 아버지의 과거, 두 번째
꼴이 흉한 벽이다. 원래 있던 벽을 완전히 허물고 다시 쌓은 것이 아니다. 애초의 벽에다 조금 높게 덧쌓은 모양새라 어딘지 모르게 위태롭고 이상하게 보인다. 불균형. 미학적인 고려를 전혀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손으로 슬쩍 밀어본다. 보기와는 달리 제법 튼튼하다. 내 한 몸 의지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는 걸 그렇게 나는 기어이 확인한다. 이윽고 거기에 마음 놓고 등을 기댄다. 누구 지나가는 사람이 없나, 계단 아래위를 재빨리 휘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이대로 상태가 더 나빠지면 모르는 사람한테라도 도움을 받아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일종의 응급상황이다. 조금 불안해진다. 심장 박동 수가 늘어난다. 최악의 경우 의식을 잃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어쩐다? 난데없는 상상이다. 터무니없다는 생각에 짐짓 체 머릴 떤다. 한데도 슬그머니 두렵다. 나는 침착하게 숨을 가다듬으면서 몸이 안정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또 더운 바람이 불어온다. 눈을 감고 그 바람을 느낀다. 소리가 좋다. 목덜미에 와닿는 감촉도 부드럽다. 결 고운 감으로 짠 머플러를 곱게 두르고 있는 듯하다. 나는 바람이 나한테 안겨주는 촉각과 청각에 가만히 집중한다.
아버지한테 책임을 묻는 것이 과연 올바른 태도일까. 아버지의 불행을 아버지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바로 그 누가 봐도 분명하다는 사실 자체가 나는 못마땅하다. 누가 봐도 분명하니까 거기에 시비를 거는 순간 내가 나쁜 인간이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책임을 묻는다면 아버지가 약삭빠르고 냉정하게 처신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일 뿐이다. 그 정황에서 아버지가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을 발휘하여 눈앞에 아른거리는 혈육의 정 따위에 휘둘리지 않고 단호하게 대처할 마음을 먹어 다짜고짜 그 사람을 당국에 신고했더라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죄인이 아니라 어쩌면 국가유공자 대접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굳이 책임을 묻는다면 그렇게 하지 못한 심약함과 어리석음에 대해서만 물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아버지한테, 아버지라는 인간한테 그런 타산적인 행동거지를 기대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아버지는 그저 성실하게 열심히 공부했을 뿐이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악감정을 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아가 실제로 자신이 그 악행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할 만큼 순박하고 순수했을 뿐이다. 그런 성정 자체에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지나치게 부당한 처사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불행의 다음. 몰락의 다음. 전락의 다음. 추락의 다음. 여기서부터는 내 인생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나는 이미 세상에 나와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미처 인생을 시작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빠진 불행의 늪에 발 한쪽을 깊숙이 집어넣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시작된 인생이 제대로 풀려나갈 턱이 없다. 시작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고약한 출발이다. 그에 대한 책임은 누구한테 물어야 하는가. 나는 그 책임을 아버지한테 물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자기가 빠진 불행 속으로 자기 아들도 끌고 들어가 버렸다. 그것이 아버지의 자발적인 뜻이었든 아니었든, 결과가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어쨌거나 아버지한테 있다. 그리고 그걸 본뜻이든 아니든 곁에서 거든 어머니도 그 결과에 대한 책임에서 아주 자유롭지는 않다고 해야 한다.
재판은 아버지한테 유리하게 풀려나가지 않았다. 눈부신 학벌에 번듯한 직장을 가진 아버지는 하나의 표적이 되었다. 일벌백계의 더없이 훌륭한 본보기로서 가장 두드러진 표적. 집안사람들 가운데서 실제 재판까지 간 사람은 아버지뿐이었고, 이례적이게도 빠른 속도로 진행된 그 재판의 최종심에서 아버지는 결국 실형을 선고받고 말았다. 불고지죄, 한없이 치졸한 죄목이었다. 어떤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받는 형벌. 이에 대면 미필적 고의는 차라리 사치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확실한 죄목이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인생은 거기에서 결정적으로 무저갱 속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만 셈이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그 재판 과정에서, 그리고 최종선고를 받고 복역하는 동안 수도 없이 자문해보지 않았을까.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처음 어머니한테서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난 뒤로 내가 수없이 되새겨본 의문도 바로 이것이었다. 도대체 아버지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물론 아버지는 여기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도 나한테 들려주지 않았다. 나도 물어보지 않았다. 묻고 싶지 않았다. 물어서 들을 수 있는 종류의 대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와 나는 궁금한 것을 서로 묻고 거기에 친절히 답해주는 관계가 아니었다.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나는. 아버지의 한쪽 귀가 안 들린다는 것도 한 가지 중요한 이유였다. 아버지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번거로운 일이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그런 이야기마저도 끝내는 아들한테 들려주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시위 도중 경찰에 붙잡혀가는 사태가 빚어지지 않았더라면 정말 나는 그 일을 영영 모르는 채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것은 오로지 나 혼자만의 분석이요 해석이다.
한 인간이 도대체 어떤 잘못을 저지르면 그 대가로 인생 전체가 송두리째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참담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을까. 그래도 되는 것일까. 그저 운명이라고 치부해 버리면 속은 편하겠지만, 어째서 하필이면 그런 운명이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까지 무시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그런 의문에 부딪히면 그 운명을 혹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인생의 어떤 지점을, 나아가 그 지점에서 자신이 저지른 어떤 잘못을 기어이 찾아보게 될 것이다. 집요해지지 않을 수 없는 국면이다. 그러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울 테니까. 아버지도 그렇지 않았을까. 나도 그랬으니까.
몸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는 기미가 느껴진다. 정신이 맑아진다. 이른 새벽 동녘 하늘이 희붐하게 밝아올 때의 맑은 대기를 호흡하는 느낌이라고 하면 될까. 회복되고 있는 것이다. 슬그머니 자신감이 솟아오른다. 그래도 아직 햇살은 지나치게 눈부시고, 지나치게 황색이다. 눈을 크게 뜰 수 없다. 조리개를 너무 많이 열고 찍어놓은 사진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빈혈 때문이다. 내 피에는 지금 헤모글로빈이 모자란다. 그게 정상 수치까지 올라가려면 시일이 좀 더 필요하다. 의사들 사이에서 수혈에 대한 이야기가 한두 번 오갔다. 얼마간 더 지켜보자고, 여기서 조금만 더 수치가 내려가면 수혈을 하자고, 그때까지 주의 깊게 기다려보자고, 그렇게 결론이 났다. 의사의 판단이었다. 거기에 따르기로 했다. 수혈을 받아 빨리 빈혈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남의 피를 내 몸 안에 집어넣는 일에 대한 이물감이 내 속에서 충돌하고 있던 터였다. 어쨌거나 의사의 판단을 따르면 되니, 그런 면에서는 환자만큼 속 편한 처지도 없다. 필요한 건 인내심이다. 그거라면 어지간히 충분하다. 인내심이라는 것도 훈련이 되는 모양이다. 환자로 생활하는 동안 느는 것은 인내심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이다. 나는 짐짓 조금 더 가늘게 실눈을 만든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딱 그만큼 보기가 더 편해진다. 눈을 아주 감지는 않는다. 그랬다가 갑자기 눈을 뜨면 또 현기증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이미 몇 차례 겪어본 일이다. 대비해야 한다. 선글라스가 있다면 쓰고 싶다. 빛이 불편하다. 따뜻한 것은 좋아도 밝은 것은 좋지 않다, 적어도 지금의 나한테는. 그러고 보니 이 계단에는 그늘이 하나도 없다.
열쇠가 되는 말을 찾으라면 역시 질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은밀하고 격렬한 질투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질투, 시기, 질시, 증오, 부러움……. 어떤 말이라도 좋다. 아버지는 자신이 질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아마 몰랐을 것이다. 알았어도 충분히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감정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농사를 짓는 일가붙이들 가운데서 유독 아버지만이 대처로 나가 상급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나라 최고의 명문대학에 당당히 합격했다. 아마 신분이 달라졌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저 녀석은 저렇게 출셋길로 들어서는데 우리는 여전히 시골 무지렁이 신세로구나. 이렇게 자조하지 않았을까. 갑자기 벌어진 그 격차를 확인하면서 그들은 아버지를 두고 그저 얌전히 칭찬과 부러움만 표시했을까. 그저 감탄하기만 했을까. 실은 참을 수 없는 질투에 사로잡혀 눈앞이 어두워지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이 정말 하나도 없었을까.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싶은 점이 몇 가지 떠올랐다. 그래 생각해 보았다. 어째서 나는 지금까지 그것을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을까. 어째서 나는 거기에서 뭔가 미심쩍은 낌새조차 못 느꼈을까. 광태다. 아버지의 광태가 모든 것을 가려 덮었기 때문이다.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 광태 때문에 나는 도무지 다른 데로 눈길을 옮겨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다른 것들을 차분히 의심해 보거나, 하나하나 따져볼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내 시야는 지극히 협소했다. 만일 그런 문제에 내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아버지는 보기 좋게 뜻을 이룬 셈이었다.
아버지는 고향에 가기를 싫어했다. 나는 아버지가 고향 쪽 사람들, 그러니까 아버지의 친가 쪽 사람들과 어떤 식으로든 왕래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전화 연락조차 변변히 하지 않았다. 친가 쪽 집안의 어떤 행사에도 아버지는 참석하지 않았다. 아버지 쪽에서 완전히 발길을 끊은 형국이었다. 그런 관계들만 놓고 보면 아버지는 마치 고아 같았다. 또는 전쟁 통에 일가친척을 모두 잃고 혼자 남은 사람 같았다. 그렇다고 외로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외로워하다니, 천만에. 아버지는 어쩌다 멀리 돌고 돌아 들려오는 친가 쪽 사람들 소식마저도 지긋지긋해하였다. 그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조차 아버지는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기색을 숨기지 않을 만큼, 아니, 숨기지 못할 만큼 아버지의 마음은 그쪽 사람들에 대한 환멸로 가득 차 있었던 셈이다. 그래, 환멸이었다. 그것은 그저 싫어하거나 증오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내가 아버지의 얼굴에서 읽은 것은, 맞다, 환멸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는 어머니 쪽, 그러니까 처가 쪽도 거의 찾아가는 일이 없었다. 어머니의 고향이 아버지의 고향과 지척이었기 때문이다. 행여 그쪽으로 발걸음을 했다가 자기 집안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아버지는 늘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 탓에 나도 자라면서 친가는 물론이고 외가 구경도 변변히 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니 아무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아버지는 단단히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들 모두를 싸잡아 거부하고 백안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