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질투, 첫 번째
29. 질투, 첫 번째
인적이 드물다.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다. 조용하다. 따뜻하다. 그늘만 조금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생각에 빠져들기에 참 좋은 장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다. 시계도 휴대전화도 가져오지 않았다. 앉아 있는 동안 딱 한 사람이 지나갔다. 검은색 비니를 눈썹까지 다 덮도록 눌러쓰고 배낭을 둘러멘 깡마른 젊은 남자가 계단 저 위에서 이 밑에까지 일직선으로 달려 내려갔다. 배낭은 그의 등판을 거의 다 덮을 만큼 컸지만, 규칙적인 리듬으로 들썩거리는 것으로 미루어 어쩐지 솜이불처럼 부피만 큰 느낌이었다. 이 날씨에 저런 차림으로 덥지 않을까 싶었다. 머리도 길었다. 비니 밖으로 비어져 나온 부분이 바람에 가오리연의 꼬리처럼 휘날렸다. 모양새가 그럴듯했다. 내 머리도 제법 많이 자란 상태다. 시술을 받은 뒤로 지금까지 이발하러 가지 못했다. 나는 손을 들어 수북한 뒷머리를 두어 차례 만지작거렸다.
남자는 단 한순간도 멈칫거리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마치 피아노 조율사가 정신을 집중하여 건반을 하나하나 눌러서 끈질기고 집요하게 현의 장력을 조정하여 이상적인 음의 상태를 찾아 구현해 내듯 백스물한 개의 돌계단을 마치 도장을 찍듯 하나도 빼놓지 않고 알뜰하게 다 밟으면서 내려갔다. 바로 그것이 이 계단으로 들어선 목적이라는 듯이. 너무나 기계적인 동작이어서 사람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벽에 등을 대고 앉은 자세 그대로 남자를 물끄러미 구경했다. 어쩐지 급한 일이 있어서 서두르는 기색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남자가 앉아 있는 내 바로 앞을 휙 지나쳐갈 때 강렬한 스킨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발소나 목욕탕에 흔히 비치해 놓는 싸구려는 아니었다.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집을 나서기 직전에 면도를 했을까. 남자의 턱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내 앞을 지나칠 때도 남자는 나한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남자는 뚫어지게 앞만 보고 달려 내려갔다. 밑에서 올려다보아 더욱 그랬겠지만, 키가 전봇대를 연상시킬 만큼 껑충하니 컸다. 저러다 발목을 접질리고 휘청하며 넘어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남자의 두 다리는 이 계단에 아주 익숙한 모양이었다. 남자는 계단을 다 내려가고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동안 골목 저 편 어딘가로 쉬지 않고 멀어지는 남자의 거침없고 규칙적인 발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탁탁, 탁탁…….
문득 몸이 가벼워졌다고 느낀다. 슬그머니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새로 자신감이 치솟는다. 역시 남자한테 자극을 받은 것일까. 다시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가슴속 한 귀퉁이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다. 여기서 더 걸어도 될지, 몸이 그걸 허락할지, 백 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다. 내가 가려는 방향은 밑이 아니라 위다. 도전하는 기분으로 눈을 슬며시 치켜떠 하늘을 올려다본다. 파랗다. 분명히 파란데도 어딘가 모르게 초록빛이 도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역시 내 몸속을 흐르는 피가 온전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흰 구름이 군데군데 떠 있다. 두꺼운 구름이 아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은데, 잠깐 눈길을 다른 데로 옮겼다가 돌아오니 살짝 자리가 바뀐 듯하다. 어쩌면 저 높은 곳에서 부는 바람에 천천히 떠밀려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눈이 부셔 오래 보지는 못한다. 걸어보기로 한다. 일어선다. 다리에 힘이 붙는 느낌이다. 다행이다. 예전에는 이 계단을 쉬지 않고 뛰어서 오르곤 했다. 체력 단련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뭔가 내 앞을 가로막는 단단한 것과 맞서 싸우는 기분으로 뛰어올랐다. 그렇게 미친 듯이, 나 자신을 학대하듯이 함부로 뛰어오르고 나면 몸은 힘들어 거칠게 숨을 헐떡여도 잠시나마 부풀어 오른 머릿속 두뇌의 부기가 빠져서 헐거워진 느낌이 들었다.
계단을 한 단 한 단 세면서 되도록 천천히 걷는다. 무리할 까닭이 없다. 그러면서 알맞은 속도를 찾는다. 걷는다는 것조차 잊고 생각에 깊이 몰두할 수 있는 절묘한 속도. 그러나 시나브로 걸음은 자꾸만 빨라진다. 숨이 차다. 그게 신호다. 나는 얼른 보폭을 줄이고 걷는 속도를 늦추면서 호흡을 조절한다. 몸과 생각이 따로 논다. 몸은 생각을 따르지 않고, 생각은 몸을 다스리지 못한다. 몸과 생각, 어느 쪽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결국 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몸이 허락하지 않으면 걸을 수 없고, 뜻대로 생각의 끈을 이어 나갈 수도 없다. 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내 온몸의 신경은 지금 한껏 날이 서 있다.
질투는 사람들 사이에 생각보다 넓고 깊게 퍼져 있는 감정이다. 겪어보니 그렇다. 내 사회생활은 온전히 그걸 확인하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내 주변의 누군가가 어느 날 느닷없이 얼른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동을 해서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 때 나중에 알고 보면 결국 질투 때문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아주 많았다고 해도 좋다. 심지어 겉으로는 질투가 아닌 것처럼 보여도 의심의 눈초리로 속을 좀 더 깊이 파헤쳐 들어가 보면 그 맨 밑바닥에는 결국 다른 것으로 허울 좋게 포장한 질투가 가만히 도사리고 있곤 했다. 먼젓번 직장을 그만두고 새 직장으로 옮길 때 내가 겉으로 내세운 이유는 더 높은 보수, 더 나은 장래성, 더 쾌적한 근무 여건, 그리고 집에서 회사까지 출퇴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더 짧다는 것 정도였다. 앞의 세 가지는 사실과 달랐고, 마지막 것은 그리 중요한 이유는 아니었다. 속 깊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상사의 질투를 피하는 것. 따지고 보면 내 이직은 다름 아닌 도피였던 셈이다. 그 무렵 나에 대한 상사의 질투는 내 인내심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언젠가 직장의 아는 사람을 통해서, 그러니까 한 다리 건너서 회장의 에세이집 손질을 의뢰받은 적이 있다. 말이 좋아 에세이지 결국 흔해 빠진 자서전이었다. 자수성가해서 벌어놓은 돈은 많아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명사는 못 되는 사람들이 자기 삶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싶은 마음에 자비를 털어서 내곤 하는 자서전. 한심한 일이라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가로 주겠다는 원고료가 그냥 놓치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많았다. 어쨌거나 문장을 다듬는 일이니, 평소에 늘 하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성격의 작업이라 부업하는 셈 치고 받아들였다. 그 결과가 회장 마음에 쏙 들었던 모양이다. 회장은 그 일감을 소개해 준 사람을 통하여 나한테 자기 회사에 들어와 일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다. 일종의 스카우트였다. 그때 다니던 직장에서 받는 것보다 더 높은 보수와 보직을 보장해 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솔깃했다. 아닌 게 아니라, 어딘가 모르게 늪에 빠지듯 정체되는 느낌에 직장생활이 시들해지고 있었고, 그게 조금 지치는 느낌으로 발전하려는 즈음이었다.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 그 무렵 둘째가 생긴 것도 현실적인 타산 쪽으로 마음을 두게 하는 동기였다.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사직서를 냈을 때 나는 새로 옮길 직장에 벌써 마련되어 있는 내 책상까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다음이었다.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나는 옮기려 했을 것이다. 그때쯤에는 진작에 다니던 직장에서 마음이 떠나버린 뒤였다.
내가 경솔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 직급은 차장. 바로 위에 나보다 일곱 살이 많은 부장이 있었다. 회장은 처음에 곧잘 업무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일들을 나한테 시켰다. 회장이 여기저기 작은 지방 신문이나, 나는 처음 들어보는 낯선 잡지에서 청탁받은 짤막한 잡문들을 손질하는 일이었다. 내가 받은 느낌으로는 주로 회장의 고향 쪽이거나 사업 관계로 알고 지내는 지인들과 관계가 있는 매체들인 것 같았다. 근래 그런 작은 규모의 언론사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없어지고 한다는 사정쯤은 나도 어지간히 알고 있었지만, 회장이 자기 이름으로 글을 발표하는 신문이나 잡지가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다. 자서전도 그 가운데서 적당한 글들을 추려 모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내용은 거의가 다 신변잡기였다. 이런 걸 눈여겨 읽을 독자가 과연 있을까 싶은 허드레 글들. 회장은 급여와는 별도로 때마다 소정의 원고료를 나한테 지급해 주었다. 나로서는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다가, 따로 소득세도 낼 필요가 없는 일종의 부수입인 셈이어서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내가 부장의 눈치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처음 알아차린 것은 다섯 번인가 여섯 번쯤 그렇게 회장의 글을 손질해 주고 나서였다. 그러니까 내가 네 번인가 다섯 번쯤 회장한테서 원고료를 받은 다음이었다. 언제나 회장은 내가 손질을 끝낸 원고의 프린트를 비서를 통해서 받아 읽어본 뒤에 따로 나를 회장실로 불러 원고료가 든 봉투를 나한테 건네주곤 했다. 그러니까 내가 기다리던 회장의 호출을 받고 다섯 번인가 여섯 번째 원고료를 받으러 회장실로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참이었다. 부장의 책상 쪽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꽤나 커서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쪽으로 획 고개를 돌렸을 정도였다. 칸막이로 가려져 있어서 똑똑히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부장이 주먹으로 자기 책상을 내리친 것 같았다. 무슨 일인가로 화가 났는지 거칠게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들었다. 회장실로 가려면 부장의 책상 앞을 지나야 했다. 그때 부장과 잠깐 눈이 마주쳤다. 기분 나쁜 눈빛이었다. 나도 부장도 반사적으로 얼른 고개를 돌려 상대의 눈길을 피했다. 잔상은 오래 남았다. 증오나 혐오로 읽어도 될 만큼 사나운 눈빛이었다. 비록 짧았지만, 어째서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때는 그것이 꼭 나 때문이라는 생각은 못 했다. 때마침 무슨 일로 기분이 몹시 상했는데 하필이면 그 순간 우연히 나하고 눈이 마주친 것뿐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잊었다.
부장이 나를 고의로 성가시게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내가 확실히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그 얼마 뒤부터였다. 별것 아닌 일로 자꾸 트집을 잡았다. 되도록 빨리 새 직장에 적응하여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어느 때보다도 꼼꼼하고 빠르게 일처리를 하려고 애를 쓰던 참이어서 부장의 그런 처사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가,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누구도 이보다 더 일을 잘할 수는 없을 텐데. 역시 텃새인가, 하고 넘겨짚어보면서도 우선은 부장의 요구에 맞추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부장의 트집은 점점 더 심해졌고, 치졸해져만 갔다. 그러다 언젠가 부장이 내가 교정해 놓은 간단한 문장에서 토씨 하나를 물고 늘어졌을 때 결국 참다못해 폭발하고 말았다. 문법적으로 아무 하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내가 손질해 놓은 문장이 애초의 것보다 읽기에 훨씬 더 부드러운데,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따지고 들었다. 그때 부장은 딱 한 마디로 내 말문을 닫았다. 내 마음에 안 들어. 됐나?
이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물러났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부장이 나한테 악의를 품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일까. 모를 일이었다. 회장과 직접 의논해볼까도 싶었지만, 부장과 회장의 오랜 동반자 관계를 익히 들어서 알고 있던 나는 섣불리 회장 눈 밖에 날 일은 하지 않는 편이 좋으리라고 생각했다. 회사 안의 복잡한 역학관계를 고려해야 했다. 게다가 아무리 괴로워도 또다시 직장을 옮기기에는 시기가 너무 일렀다. 그래도 부장이 나한테 왜 그러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풀어야 했다. 결국 알았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고민을 털어놓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한숨짓는 내게 동료가 딱하다는 표정으로 넌지시 일러주었다. 질투야. 질투 때문이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모든 게 선명해졌다. 그랬다. 그렇게밖에는 볼 수 없었다. 부장은 나를 질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