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계단을 넘어서
31. 계단을 넘어서
마침내 계단 꼭대기다. 다 올랐다. 힘든 대로 견딜 만하다.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계단의 맨 위에 발을 딛고 서자 가슴이 걷잡을 수 없는 만족감으로 뿌듯해져 온다. 흥분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숨이 차다. 가벼운 현기증이 여름밤의 하루살이들처럼 소리 없이 바쁘게 머릿속을 맴돈다. 한동안 입을 벌린 채 호흡조절을 한다. 괜찮다.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그렇게 불안에 사로잡히려는 마음을 애써 다독인다. 뒤로 돌아선다. 햇살이 진하다. 눈이 아리다. 실눈을 뜨는 것만으로는 모자라서 경례하듯 손을 눈썹에 대고 그늘을 만든다. 발밑으로 저 멀리 백스물한 개의 계단이 거침없이 곧게 뻗어 내려가고 있다. 눈을 살짝 든다. 바닷가 바위틈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거북손처럼 빈틈없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주택가의 울긋불긋한 기와지붕들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든다. 바람이 시원하다. 그 새 몸 여기저기에 배어 나온 땀이 그 바람을 기분 좋게 맞는다.
내가 이 동네를 떠난 뒤로 세월이 제법 흘렀는데도 아파트가 없는 동네라서 그런지 많이 변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뉴타운으로 지정된 곳이다. 어쩌면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도 머지않아 아파트촌으로 바뀔지 모른다. 이 시대에는 어디나 그렇듯 이 동네도 세련되고 삭막한 모양새로 변할 것이다. 이 계단도 끝까지 헐리지 않고 버티기는 어려울 테고. 그러면 이렇듯 탁 트인 넓은 광경을 다시는 눈에 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문득 씁쓸해진다. 안타깝지는 않다. 나한테 좋은 기억을 거의 남겨주지 않은 인색한 동네다. 어떻게 변하든 내 알 바가 아니라고 해야 정직할 것이다. 한데도 조금 허전하다. 이상하다. 역시 몸이 온전치 않기 때문일까. 나하고 직접 관계가 없는 문제에도 감정의 움직임이 크다. 통제가 잘 되지 않는다. 역시 마음은 몸을 따르는 모양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돌아선다. 걷는다. 경차 한 대를 가까스로 주차해 놓을 수 있을 만큼 좁은데도 굳이 아스팔트를 구석구석 곱게 깔아 둔 골목이다. 웬 정성인가 싶다. 왁스를 발라놓은 듯 반드르르 윤이 나는 그 검은 빛깔이 사뭇 낯설다. 기분 탓인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바닥에 부드럽게 탄력이 느껴진다. 깔아놓은 지 얼마 안 되는 새 아스팔트다. 어차피 죄다 갈아엎을지도 모르는데, 예산 낭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흔한 일이다. 예산이야 어차피 돌고 도는 것이다. 분명히 세금 낭비지만, 누군가는 그것으로 이득을 보게 마련이다. 한쪽에는 손해가 되는 일이 다른 쪽에는 이득이 되는 사태야 어디에나 널려 있지 않은가. 그러면 경제는 돌아간다. 그런 원리로 경제가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떫다. 속절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지적해도 그런 문제가 바로잡히지 않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긴 이로써 누군가 먹고 살아갈 수 있다면 되는 것이다. 부당한 이익, 부당한 거래, 부당한 순환. 그게 세상이다. 어쨌거나 지금 내가 깊이 고민할 문제는 아니다. 떨쳐낸다.
골목은 조용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내 발소리가 가장 크게 들린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 같다. 생활 소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어디에서도 인기척이 나지 않는다. 잠시 뒤에 있을 폭격이나 천재지변을 피해 주민들을 소개시킨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따금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에서 새소리가 날아온다. 몸집 작은 강아지가 앙증맞게 짖어대는 소리도 섞인다. 그 어린 강아지의 가냘픈 허리가 손에 잡힐 듯 느껴진다. 따뜻하고 위태롭다. 손으로 만져보고 싶다. 앙가슴이 알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옥죄어든다. 생명의 꿈틀거림. 모든 생명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 그렇기에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모든 생명은 또 죽는다. 그러기 위해서 병이 드는 것이다, 반드시. 어떤 생명도 이 과정을 벗어날 수는 없다. 살아갈 가치가 있는 그만큼 기필코 죽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대가다. 이 대차대조표에만큼은 에누리도 없고 덤도 없다. 탄생, 병, 그리고 죽음. 나도 이 엄혹한 일직선의 과정에 마침내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잉태되는 순간부터 나라는 존재는 이런 과정을 밟을 운명이었다. 내 몸과 마음이 받은 모든 영향, 그러니까 내가 먹은 모든 음식, 내가 들이마신 모든 공기, 내가 겪은 모든 사건, 내가 고민한 모든 문제, 내가 앓았던 모든 잔병, 내가 받은 모든 마음의 상처가 각기 다 내 운명의 가차 없는 한 대목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부모한테서 받은 유전자들이 그 모든 운명의 과정을 거쳐 오면서 지금의 내 몸을, 내 병을 이룬 것이다. 그러니 병은 곧 운명이다. 또는 운명의 징표다.
길이 세 갈래로 나뉘면서 골목이 갑자기 넓어진다. 옷 단추 몇 개를 풀어놓은 듯 헐거운 기분이 든다. 문득 숨쉬기가 편해졌다는 착각에 빠진다. 어느 쪽으로 갈까 잠시 망설이는데, 어디선가 닭이 홰를 치며 우는 소리가 허공을 가르고 불쑥 치솟아 오른다. 어딜까. 이른 아침이 아닌 대낮에 닭이 우는 소리를 처음 들어본 것은 예전에 마당 넓은 집에서 닭들을 키우며 살 때였다. 나는 닭 우리 앞에 쪼그리고 앉아 몇 번이고 거듭해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한참을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으면 어느 순간부터 닭은 내가 있어도 개의치 않고 울어댔다. 신기했다. 닭 울음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지겹지 않았다. 그것은 차라리 쾌감이었다. 몹시 가려운 곳을 날카로운 꼬챙이로 쿡쿡 찌르거나 효자손으로 벅벅 긁어댈 때의 쾌감.
같은 소리가 한 번 더 울린다. 소리가 멀다. 그래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다. 어딘가 양계장이라도 있는 것일까. 닭이 있는 곳을 찾아보고 싶다. 우두커니 선 채로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닭은 더는 울지 않는다. 나는 되도록 방금 닭 울음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방향을 가늠하여 걷는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 굳이 그러지 않을 필요도 없다. 방향이 애초에 가려고 마음먹고 있던 쪽과 얼추 맞아떨어진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는 길에 우연히 양계장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은 것이다. 눈에 띄지 않아도 하는 수 없다. 익숙한 길, 많이 걸었던 길이다. 새 집들, 새 담장들, 그리고 새로 바닥이 포장된 골목길들. 하지만 자리는 다 그대로다. 집이 있던 자리에 새로 길이 놓여 있거나, 길이 있던 자리에 새로 집이 들어서 있지는 않다.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고, 눈 감고도 걸어갈 수 있다. 어쩌면 생각보다 많은 세월이 흐른 것은 아닌지도 모른다. 나만의 감각일 뿐이다. 인간의 감각은 주관적이다. 믿을 게 못 된다.
감당할 능력도 없으면서, 그러니까 충분히 뒷바라지할 여력도 없으면서 내 밑으로 동생을 둘이나 더 낳은 부모의 처사를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날개는 꺾였고, 다리는 부러졌고, 팔은 잘렸다. 어디를 가나 신원조회라는 장벽이 아버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국가가 그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사람을 반겨 써줄 만한 일터는 어디에도 없었다. 경력을 속이거나 부당한 대우를 감수하면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옥살이를 하는 동안 몸도 많이 상했다. 손을 벌릴 데도 없었다. 일가친척도 친구들도 다 돌아섰다.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이 되어주지 않으려는 사람들한테서 아버지가 받은 배신감은 도대체 얼마나 깊은 것이었을까. 상상할 수 없다. 어쩌면 아버지는 그렇듯 바깥세상에서 외면당하는 분풀이를 집에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아버지의 광태와 행악은 그런 것이었을까.
어째서 어머니나 아버지는 단산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무얼 믿고 아이들을 둘이나 더 낳은 것일까. 이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기에 아들 하나만으로는 외로웠기 때문일까. 양껏 먹어본 기억도, 넉넉히 입어본 기억도, 흡족히 구경해 본 기억도 없다. 무언가를 누린다는 느낌의 상실. 언제나 모든 것이 턱없이 모자랐다. 아니면 숫제 없었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기댈 언덕이 못되었고, 동생들은 짐이었다. 어머니는 그저 기도만 하면서 혼자 버티기만도 힘에 부쳐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암담했다. 내 눈앞에서 가망 없는 집안 꼴은 하루하루 점점 더 또렷해져만 갔다. 눈에 뻔히 다 들여다보이는 몰락의 징후들, 절망으로 썩어 들어가는 흔적들이 집 안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지금 같은 마음이었다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집을 나갔을 텐데,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았을 텐데, 그때 나는 용기가 없었다. 가출 또는 출분. 그다음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요량이 서지 않았다. 희망이 없었지만, 자신감도 없었다. 기개가 모자랐다. 결국 그냥 참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느라 몸과 마음이 너무 많이 상했다는 것은 한참 나중에야 든 생각이었다.
아카시아 숲은 그대로 있다. 꽃잎은 다 떨어지고 없다. 조금 더 울창해진 느낌이 들지만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가운데로 곧게 뻗어 올라가는 길도 그대로다. 다만 그 시절에는 맨 흙바닥이었는데 지금은 역시나 아스팔트가 깔려 있다. 그래서인지 길의 폭이 예전보다 몇 뼘쯤 더 넓어진 것 같다. 빛이 제법 바랜 것으로 미루어 최근에 포장된 것은 아닌 듯하다. 오른쪽에 바짝 붙어서 띄엄띄엄 차량이 주차되어 있다. 길의 남은 부분으로 중형 승용차나 작은 트럭 하나 정도는 지나다닐 수 있을 만해 보인다. 번호판이 뜯겨나간 채 버려진 차도 있다. 역시 사람의 왕래가 잦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무한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을 혼자 그러안고 버티다가 마침내 인내심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그래서 더는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을 때 미친 듯이 뛰어오르곤 했던 길이다. 아카시아 꽃향기를 맡으며 무거운 머리를 식히려 산책하듯 한가롭게 걸어 올랐던 적은 돌이켜보건대 한 번도 없다. 몸을 혹사시키듯 저 꼭대기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언제나. 계단을 뛰어오르면서 이미 지친 몸을 그렇게 한 번 더 몰아붙였다. 숨이 턱에 닿는다. 서 있기도 힘들 만큼 체력이 바닥난다. 그러고 나면 비로소 속이 조금 후련해졌다.
목이 마르다. 생수라도 한 병 사 올 걸, 하고 잠깐 후회한다. 자판기라도 어디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둘레를 살핀다. 바지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동전 몇 개가 손으로 만져진다. 언제 넣어두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캔 음료 하나 정도는 마실 수 있겠다. 그래도 걸음을 더는 빨리하지 못한다. 경사가 완만하다. 몸이 성하다면 성큼성큼 걸어도 크게 힘이 들지는 않을 텐데, 하고 생각한다. 계단에 대면 한결 수월한 것은 어쨌거나 사실이다. 뛰지는 않아도 조금 더 빨리 걸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유혹이 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아슬아슬한 경계다. 나는 속으로 그걸 조심스럽게 가늠한다. 몸이 허락하지 않는 일을, 몸이 감당 못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상관없다. 내 몸이 어디까지 견뎌줄지 시험해보고 싶어서 나온 길이다. 그 목적에 충실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