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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기다림_32

  - 32. 작별 인사

by 김정수 Mar 06. 2025

32. 작별 인사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것이 거북해졌다. 미묘하게 분위기가 다르다. 처음과 견주어보면 확실히 달라졌다. 그런 느낌이 든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바야흐로 한 고비 넘겼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래서 어지간히 긴장이 풀린 것일까. 긴장이 풀리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안개가 걷히듯 모든 게 선명해지고 있다. 부정할 수 없다. 확실히 해상도가 높아졌다. 애써 외면하지만 않는다면 똑똑히 확인할 수 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모든 것이 그대로라는 것을. 새삼스럽다. 불편하다. 두 분 다 나를 배려하는 태도를 여전히 잃지는 않고들 있지만, 어디선가 개운치 않은 기운이 스멀스멀 번져 나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실제로 그렇든 그렇지 않든 내가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 그렇게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금 떠나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느낀다. 신호다. 어쩌겠는가. 언젠가는 다시 떠나야 한다. 알고 있다. 아직은 몸이 온전치 못하므로 그냥 머무르고 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지금 내가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는 단 하나의 현실적인 명분이요 이유다.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 그런 자리가 못 된다는 속 깊은 생각에는 어쩌면 처음부터 변함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새삼스럽게 그걸 다시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더 타당한 이유는 이것이다. 뭔가 미진한 느낌이 내 목 뒷덜미를 계속 붙잡고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다는 것. 그 기세가 생각보다 완강하다는 것. 해서, 나는 선뜻 떠날 결심을 못 한다.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서가 아니다. 그럴 만큼 나는 효자가 못 된다. 효자가 될 마음 같은 건 버린 지 오래다. 이제 와서 새삼스레 그동안 못다 한 아들 노릇 따위 할 생각, 없다. 정직해야 한다. 나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된다.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나한테도, 지금 내 처지에도. 그런 것과는 다른 마음이다. 믿는 구석은 있다. 결국 때가 올 것이다. 나는 그, 때를 기다릴 뿐이다. 이것이 단 하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문득 고맙다. 시간이 흘러준다는 것이.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쉬지 않고 흘러준다는 사실이. 시간은 멈추지도, 거꾸로 흐르지도 않는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면 조급해하지 않아도 올 것은 결국 오고야 말 것이다. 나는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조차도 마냥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할 수는 있다. 지난 세월을 통하여 내가 배운 것이 있다면 그 한 가지다. 세상에 내가 억지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이 아무리 살려고 발버둥을 쳐도 결국 언젠가는 반드시 병들어 죽어야 하는 것처럼.

   기다릴 수 없었던 적이 있다.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기다림이 싫었다. 나는 조급했다. 간절히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어쩌면 정말로 그렇게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터무니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문제는 이것이었다. 어디서 다시 시작하느냐? 그 가장 적확한 지점을 찾으려 애썼다. 그런 것이 있다고 믿고 싶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어디서 시작하면 될까? 대학교 때? 고등학교 때? 중학교 때? 초등학교 때?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문제가 숫제 생기지도 않았으리라는 데에까지 마침내는 가 닿고야 만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이 모든 험한 꼴을 보면서 살 필요조차 없었을 텐데. 하지만 그것은 내 힘으로 어찌해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 또 깨닫고 나는 맥없이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다시 내가 내 힘, 내 뜻으로 내 인생을 바꾸어 볼 수 있는 시점을 찾기 시작한다. 어디일까. 어디쯤이 내가 그럴 수 있는 자리일까.

   이 상상이 현실로 성립하려면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내가 여태까지 살아온 나날들에 대한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 기억이 없다면 아무리 먼 예전으로 돌아간들 나는 여전히 지금까지와 똑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똑같은 삶의 반복은 의미 없는 일이다. 기억을 잃지 말아야 한다. 나는 그 시절 내가 겪었던 모든 일들, 내가 만났던 모든 사람, 내가 당했던 모든 불상사, 내가 받았던 모든 마음의 상처, 내가 가슴 깊이 품었던 모든 생각에 대한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르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내 삶을 조금이나마 진짜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간절히 그렇게 기도한 적도 있다. 허황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한동안 그 기도를 그만두지 못했다. 사람이 자기 목숨을 걸 만큼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면 그게 무슨 소망이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람들의 우스갯소리 같은 말을 나는 진심으로 믿고 싶었다.

   하지만 뒤를 이어 어김없이 또 부딪히는 문제는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정말로 내 인생이 달라질까, 하는 의문이었다. 기억이 있든 없든, 나라는 인간 자체가 변하지 않는 한 나는 인생의 어떤 길목에서 여전히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판단을 내리고, 그래서 결국은 똑같은 선택을 하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 인생은 아무리 애쓴들 그다지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의미 있는 변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은 운명이라는 소리가 된다. 바꿀 수도, 항의할 수도, 문제 제기를 할 수도 없는 완고한 운명. 그렇다면 억울하다. 불공평하다. 나보다 더 나은 운명을 타고난 사람은 뭐라는 말인가. 어째서 나는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그 시절에는 나하고 다른 운명은 모두 나보다 나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한테 눈길을 줄 여유 따위는 없었다.

   닭 우리는 못 찾았다. 오는 길에 닭 울음을 한 번 더 들었지만, 그게 끝이었다. 상관없다. 생각보다 먼 길이라 조금 놀랐다. 하긴 언제나 쉬지 않고 내처 뛰어올랐던 길이니까. 이렇게 천천히 걸었던 적이 없으니까. 민둥산 언덕처럼 넓게 펼쳐진 잿빛 바위 무더기는 여전하다. 계단을 뛰어오르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등을 대고 드러눕곤 했던 곳이다. 바위는 더러는 차가웠고, 더러는 뜨거웠다. 비가 올 때는 드러누운 채로 비를 다 맞았다. 쌓인 눈 위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며 그러고 있노라면 터질 것처럼 한껏 달아오른 머릿속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식어 내렸다.

   이곳에도 사람은 없다. 초입의 좁다란 공터에 몇 가지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다. 자판기는 보이지 않는다. 입이 마르다. 여기까지 견뎌준 내 몸이 대견하다. 다독여주고 싶다. 저 멀리 하늘을 보고 드러누운 채 두 팔을 뻗어 밀어내듯이 들어 올리도록 되어 있는 역기가 놓인 곳 바로 뒤편 나무 그늘 밑에 수도꼭지가 콩나물 줄기처럼 가느다랗게 솟아올라 있다. 둘레가 조금 젖어 있다. 물이 나오는 모양이다. 다가간다. 손으로 꼭지를 비틀어 돌린다. 기세 좋게 쏟아져 나오는 물을 손으로 받아 얼굴을 씻는다. 차끈하다. 지하수 같기도 하고, 밑에서 솜씨 좋게 상수도를 끌어다 놓았나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딘가 물탱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다행이다. 다시 물을 받는다. 마시지는 않고 입 속을 두어 차례 헹궈내기만 한다. 제법 개운하다. 윗옷 자락으로 얼굴을 대강 훔친다. 바람이 서늘하다. 등받이 없는 긴 의자가 나무로 그늘진 언덕 가장자리를 따라 여기저기 놓여 있다. 예전에는 없던 것들이다. 가장 전망이 좋아 보이는 의자에 천천히 걸어가 앉는다.

   언덕 밑 오른쪽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어 시야가 조금 답답하다. 나머지는 다 그대로다. 저 멀리 남산 꼭대기에 곧추서 있는 서울타워가 고스란히 바라다보이는 것까지. 흰 구름이 파란 하늘을 바다 삼아 뜬 채로 천천히 흘러간다. 바람이 아까보다 조금 더 훈훈하다. 나쁘지 않다. 언젠가 그 이야기로 소설을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거야말로 현실적인 일이라는 생각. 상상은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다. 거기에서 더 나아갈 수 없다. 하지만 소설을 쓴다면 그것은 또 다른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소설이라는 방법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생각. 실제로 얼마간 이야기를 구상하기도 했다. 끝내 쓰지는 못하고 말았지만. 아니, 쓰지 않았다. 그걸 소설로 쓰는 순간 나는 뭔가 현실에서 밀려나 결정적으로 퇴행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건 현실을 포기하는 태도라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분명히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어쨌거나 현실을 살아야 했다. 그러고 싶었다. 소설이, 소설 쓰기가 또 다른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는 못 했다. 우선 살아야 했다. 공부를 해야 했고, 직장을 구해야 했고, 일을 해야 했고, 결혼을 해야 했다. 그렇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뒤를 돌아볼 겨를 따위 없었다. 되새기고 싶지 않은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잊고 싶은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소설을 쓴다는 핑계로 그것들을 낱낱이 다시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집을 떠났다. 그때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문득 피로가 몰려오는 기미를 느낀다. 몸이 무겁게 가라앉으려 한다. 드러눕고 싶다. 무리를 한 건 사실이다. 욕심이다. 하지만 와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꼭 한 번. 이제 다시 떠나면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아니다. 영원히, 라니? 이런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앞날을 두고는 누구도 함부로 장담할 수 없다. 그저 의지의 표명일 뿐이다. 다시는 오지 않으려고, 다시는 여기에 올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그 시절 그토록 줄기차게 이리로 뛰어 올라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비명을 많이 질렀다. 목청이 찢어져라 하늘 높이 고함을 쳐댔다. 그것은 항의요 저주요 환멸이요 절망이었다. 무엇보다도 분노였다. 더러는 기도를 한 적도 있다. 아니, 제법 많이 했다. 그 기도조차 대개는 항의요 저주요 환멸이요 절망이요, 나아가 분노의 표명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내 목소리는 허공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졌다. 메아리 없는 소리였다. 하늘은 내 소리를 되돌려주지 않았다. 고스란히 거두어갔다. 다시 말하면 거부하지 않고 다 받아준 셈이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나면 잠시나마 속이 후련했다. 그렇게 내 청춘의 수많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던 곳이다. 그 소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는 떠났다고, 그래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여기로 다시 돌아와 있다.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고, 내 몸 또한 적잖이 망가졌다. 내가 왜 아직 시원찮은 몸을 이끌고 기어이 여기로 오려고 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그저 내 몸을 시험해보고 싶어서만은 아니다.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서다. 내 청춘에, 내 청춘의 한때를 받아준 이곳에. 이제 다시 떠나야 할 시간이다. 그때는 미처 하지 못했던 작별 인사를 이제야 비로소 한다.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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