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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기다림_33(마지막 회)

  - 33. 연둣빛 새끼 감

by 김정수 Mar 08. 2025

33. 연둣빛 새끼 감

   또 다리에 쥐가 난다. 아니, 나버렸다고 해야 할까. 종아리 근육이 빨랫감 쥐어짜듯 옥죄인다. 어찌해볼 겨를이 없다. 쥐는 몹시도 성급하다. 며칠 굶은 짐승이 천신만고 끝에 먹이를 발견한 것처럼 득달같이 덤벼들어 내 가냘픈 종아리를 사납게 물어뜯는다. 나는 쌓인 책을 뒤지던 자세 그대로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고 만다. 먼지가 많다. 다락방의 작은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뽀얗게 일어나는 먼지의 입자들이 하나하나 손에 잡힐 듯 또렷하게 보인다. 숨쉬기가 불편하다. 바닥을 짚은 손에 오래된 먼지가 두텁게 묻어난다. 옷이 지저분해지는 것에 마음 쓸 여유가 없다. 시술받은 부위에 통증이 일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다. 어제는 아침을 먹다가 갑자기 쥐가 나서 하마터면 밥상을 엎을 뻔했다. 다리를 밥상 밑에서 뒤로 미처 다 빼내기도 전에 나는 제멋대로 비틀어지는 종아리를 부여잡고 옆으로 쓰러졌다. 통증을 견디느라 가슴이 뛰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솟았다. 단단하게 뭉친 종아리에 오래도록 어머니의 두툼한 손으로 안마를 받았다. 한데 지금 또 시작이다. 한참 동안 운동하지 않은 몸을 무리하게 움직인 뒤끝이라 더 그런 모양이다.

   내 손때가 묻은 중고등학교 시절의 교과서와 참고서, 그리고 소설책들이 다 그대로 있다. 뒷날 언젠가는 내가 찾으리라 내다보고 정성껏 보관해 두었다기보다는 굳이 내다 버릴 필요가 없어서 방치해 놓은 느낌에 더 가깝지만, 상관없다. 책 더미에 등을 기대고 앉아 쥐가 난 다리를 되도록 곧게 내뻗는다. 그런 채로 뭉친 근육이 절로 풀릴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마음 같아서는 손으로 종아리 근육을 잡아 뜯어내고 싶다. 호흡이 가빠진다. 며칠 전에는 점심때 아버지와 겸상을 하다가 다리에 쥐가 났다. 실은 그전에 기미를 느끼고 미리 근육을 풀어줄 생각으로 나도 모르게 잠깐 다리를 떨었다. 그게 아버지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갑자기 아버지의 입에서 왜 밥상머리에 앉아 재수 없게 다리를 떠느냐고 버럭 호통이 튀어나왔다. 내가 떠날 때가 되었다는 걸 확실히 느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상하게도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약기운일 수도 있었다. 차라리 나른했다. 아버지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을 뿐이다. 실망하지 않았다. 조금 서글프기는 했지만.

   언제나 그랬다. 아버지는 성에 차지 않거나 비위에 맞지 않는 일 앞에서 그렇듯 곧잘 자제력을 잃곤 했다. 요즘 같으면 분노 조절 장애라고 했겠지.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그게 얼마나 두고두고 집요하게 어머니를, 또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절망에 빠트렸는지 아버지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알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는 데 운명적인 비극성이 있다는 걸 이제 나는 똑똑히 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싫은 것은 별개의 문제다. 알지만 싫다. 알아도 싫다. 싫지 않은 척할 수조차 없을 만큼 싫다. 아버지한테 닥쳐온 그 불가항력적인 불행을 근거로 아무리 변명을 한다고 할지라도 아버지의 광태와 행악이 싫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나중에는 그런 아버지를 내가 보기에는 방치해 두고 있는 어머니도 싫어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망가져 가는, 그래서 자멸에 빠져드는 남편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만 있는 어머니도 싫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내로서 그것은 직무유기라는 생각.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의 재확인일 뿐이다. 여기서 내 마음은 그 어떤 양보도 할 뜻이 없다.

   그래도 이것은 썩 개운치 않은 결말이라는 생각이 거머리처럼 목 뒷덜미에 척 들러붙어 떨어질 줄을 모른다. 괴롭다. 내가 다시 떠나는 걸 막을 사람도 없고, 나도 이게 잘못된 일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 한데도 마음이 편치가 않다. 개운하게 떨쳐버리고 일어설 때의 홀가분한 느낌이 없다. 적어도 어젯밤 아버지가 느닷없이 나한테 말을 걸어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어머니는 벌써 잠들었고, 나도 자리에 누워 뒤척거리며 잠을 청하는 중이었다. 이제는 배를 깔고 엎드릴 수도 있다. 시술받은 부위에 얼마간 무지근한 느낌은 아직 남아 있지만 더는 아프지도 거북하지도 않다.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소리 나지 않게 켜놓고 보는 모양이었다. 화면이 바뀔 때마다 불을 다 꺼서 캄캄한 마루의 한 귀퉁이가 환해졌다가 어두워졌다가 하기를 반복했다. 문득 기도가 하고 싶었다. 그동안 날마다 어머니가 내 곁에서 나지막이 웅얼거리며 기도하는 소리를 들어온 탓인지 나도 입을 열기만 하면 기도가 술술 나올 것 같았다. 하도 오랜만이라 그런 내 반응이 몹시도 낯설었다. 한때는 새벽기도회에 나가서 필사적으로 기도한 적도 있었다. 말 그대로 죽자고 매달렸다. 물리적으로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는 응답을 기대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손으로 잡을 수 있는 확실한 응답을 원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답도 얻지 못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응답으로 새길 수 있는 어떤 단서도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기도를 중단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더는 기도를 하지 않았고,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그리고 집을 떠났다. 마음은 몸보다 더 먼저 떠났다. 아니, 순서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겠다. 그 모든 일이 비슷한 시기에 한꺼번에 일어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소곳이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채 기도를 시작했다. 잘 되지 않았다. 가슴속이 무언지 모를 갈망으로 가득 차 당장이라도 터질 듯 팽팽히 부풀어 있는데, 그걸 어떤 말로 입 밖에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기도라기보다는 차라리 옹알이라고나 해야 할, 말 같지 않은 말을 힘겹게 우물거리고 있다가 나는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퍼뜩 눈을 떴다. 누가 열린 방문턱에 서 있었다. 흠칫 놀라 손으로 바닥을 짚으면서 나도 모르게 물러나 앉듯 윗몸을 뒤로 젖혔다. 아버지였다.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다. 두툼한 공책 같았다. 나는 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난 사실보다도 기도하는 내 모습을 아버지한테 들킨 데 더 마음이 쓰였다. 짜증스러웠다. 심장의 박동이 빨라졌다. 가까스로 말이 되어 나오려던 기도가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힐 요량으로 다리를 풀고 편한 자세로 앉았다. 마루 쪽에서 여전히 어른거리는 텔레비전 화면의 푸르스름한 빛에 아버지의 어깨가 실루엣으로 도드라져 보였다. 표정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불을 켜지 않고 그대로 내 앞에 앉았다.

   내가 말이다, 뭘 좀 써볼까 한다. 이게 아버지의 입에서 튀어나온 첫마디였다. 오래도록 벼르던 말인지, 어딘가 모르게 들뜬 목소리였다. 조금 불안했다. 아버지는 들고 있던 공책을 펴서 나한테 내밀었다. 내 직업 감각으로 아버지의 말과 아버지가 들고 있는 공책을 연결하기란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펼쳐진 부분에 뭔가 볼펜 글씨로 잔뜩 씌어 있는 게 보였다. 지우고 고쳐 쓴 흔적도 군데군데 있었다. 제대로 읽으려면 불을 밝혀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불을 켤 생각이 없는 듯했다. 꼭 지금 당장 내가 읽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공책을 받아 든 채로 아버지의 말을 더 들었다. 글쎄, 이게 소설이 될지, 그냥 수기 같은 게 될지는 모르겠다만……. 거기서 아버지는 잠시 말을 골랐다. 쑥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네 엄마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하나 써볼까 한다. 헛기침 한 번. 너도 알다시피, 내가 네 엄마한테 미안한 일이 참 많지 않니. 그걸 좀 써보고 싶구나. 알아들었다. 어찌 못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아버지의 이야기는 좀 더 계속되었다. 더 들을 필요는 없었다. 아버지는 나름대로 속죄의 표시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것이 정말 필요한지 필요하지 않은지는 모르겠다. 내가 판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아버지가 하고 싶다면 나한테 물어볼 필요 없이 그냥 하면 그뿐이다. 아버지한테 그런 것을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머니한테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하고 싶어 한다. 이미 시작했다. 밀고 나가면 그뿐이다. 이야기를 마치고 아버지는 나한테서 공책을 도로 받아 들고는 슬그머니 돌아갔다. 벼르던 일을 해치운 홀가분함이 그 뒷모습에 살짝 어려 있는 것도 같았다. 비로소 내 마음속에 오래도록 차갑고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던 것이 살며시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이었다, 그런 느낌은. 물론 모든 것을 한꺼번에 증발시킬 만한 열기에는 턱없이 못 미쳤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어쩌면 끝내 다 녹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이걸 속죄로, 사과로 받아들여도 될까. 나는 아버지한테서 사과를 받은 것일까. 사과라면, 나는 사과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 사과를 받을 만큼 나는 떳떳한가. 텔레비전은 밤새 켜져 있었고, 나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뭉쳤던 종아리 근육이 풀린다. 나는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다시 책 더미를 뒤지기 시작한다. 나는 냉정하게 생각한다. 아마 아버지는 그 글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아버지가 무슨 일이든 끈기 있게 마무리 짓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이제는 아버지한테 남아 있는 시간도 얼마 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늙었다. 이걸 부정할 수는 없다. 나는 아버지가 그 글을 완성하기를 소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버지의 문제일 뿐이다.

   찾았다.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 들고 다니던 성경책이다. 손바닥으로 먼지를 떨어낸다. 모양새는 그대로다. 구겨진 데도 보이지 않고, 젖었다 마른 흔적도 없다. 기억은 또렷하다. 예레미야 애가다. 몇 장 몇 절인지는 모르겠다. 길지 않은 부분이니 금세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한 장 한 장 넘긴다. 보인다. 한 부분에 빨간 색연필로 밑줄이 그어져 있다. 삼 장 이십육 절. 나지막이 소리 내어 읽어본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마음속에 얼어붙어 있던 것이 조금 더 녹아내리는 걸 느낀다. 한 번 더 읽는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나는 충분히 기다린 걸까. 기다릴 수 없다고,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느냐고,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느냐고, 어째서 기다리기만 해야 하느냐고 항변하면서도 나는 이 말씀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기어이 밑줄을 그어놓았다. 어젯밤 아버지가 왔다 가고 나서 자리에 드러누운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어느 순간 문득 이 한 말씀이 떠올랐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아침 일찍 핸드폰을 열어 아내한테 문자를 보내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가 그리웠다. 다행히 아직 아내가 출근하기 전이었다. 내가 말했다. 이제 갈게. 아내가 답했다. 기다릴게. 조심해서 와. 아무 계획도 없다. 때가 되었다. 아내와 아이들한테로 가고 싶다. 직장 문제도 가서 생각하자. 성경책을 옷가지와 책 몇 권과 함께 아내가 가져다 놓은 배낭에 챙겨 넣는다. 생각보다 무겁지 않다. 그걸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선다. 몸이 견뎌주는 느낌이 좋다. 나오지 마시라고 하는데도 한사코 택시 타는 데까지 따라가겠다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나는 굳이 막지 않는다. 골목에서 저만치 앞을 걸어가는 두 분의 뒷모습을 보며 천천히 걷다가 이웃집 담장 너머 밖으로 드리워진 감나무 가지 밑에 잠시 멈추어 선다. 처음 퇴원하던 날 이곳으로 왔을 때 잠시 멈추어 섰던 바로 그 자리, 그 감나무 밑이다. 잎들이 바람에 보일 듯 말 듯 살랑살랑 움직인다. 앙증맞게 생긴 연둣빛 새끼 감이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것을 나는 가만히 확인한다.  *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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