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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기다림_30

- 30. 질투, 두 번째

by 김정수

30. 질투, 두 번째

회장의 원고를 손질하는 일은 내가 오기 전까지는 부장의 몫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본의 아니게 부장의 가외 수입을 가로챈 셈이었다. 내가 부장의 처지라도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회장의 처사였다. 회장은 결국 부장과 나를 일종의 경쟁 관계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어째서? 그 구도를 통해서 회장은 무슨 이득을 취할 속셈이었을까. 그것이 이득이 된다고 생각한 근거가 무엇일까. 내가 놓인 자리에서는 온전히 파악하기 힘든 문제였다. 조금 더 위에서 내려다보아야 하는데, 내 직급이 아직은 그럴 수 있을 만한 높이가 못되었다. 어쨌거나 그걸 알고 나니 회장의 글을 손질하는 일이 싫어졌다. 도로 부장한테 넘겨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리 한다는 것도 모양새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내 쪽에서? 회장이 그걸 선선히 허락할 성싶지도 않았다. 부장이 얼씨구나 하고 고분고분 받아들일 리도 없었다.

회장이 생각보다 치졸한 위인일지도 모른다는 데에 그제야 생각이 미쳤다. 내가 회장의 의중을 알아차리게 된 것은 좀 더 시간이 흘러 회사의 속사정을 대강 헤아려볼 수 있게 된 다음의 일이었다. 그것은 그것을 꼬투리 삼아 부장을 내치기 위한 회장의 노회한 사전 정지 작업이었다. 회장이 속으로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국면은 부장 스스로 사표를 내고 회사를 나가는 것일 터였다. 회장이 어째서 급기야 그런 마음을 먹기에 이르렀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무슨 일로 부장에 대한 감정이 깊이 상했을 수도 있고, 내가 입사하기 훨씬 오래전부터 부장의 일처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부장은 이즈막에 회사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짐스러운 인물로 전락하고 만 듯했다. 그래도 부장은 회사를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큰 아이가 대학입시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들었다. 아무리 사정이 곤혹스러운들 함부로 자기 신변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니 어쩌면 나는 이용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런 식이라면 부장이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언젠가는 나도 그와 똑같은 대접을 받게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이것저것 따져보기가 골치 아팠다. 직장 안의 이런저런 알력이야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었지만, 이건 좀 심했다. 이런 경우 둘 사이에 끼어 있는 사람이 가장 괴로운 법이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시간만 하염없이 흘렀다. 회장은 여전히 나한테 같은 일을 거듭 시켰고, 때마다 꼬박꼬박 원고료를 지급했고, 부장은 여전히 온갖 교묘한 방법을 동원하여 사사건건 나를 괴롭혔다. 부장의 속뜻도 회장과 다르지 않을 터였다. 회장은 부장이 스스로 알아서 나가주기를 바랐고, 부장은 내가 지레 지쳐 나가떨어져 주기를 바랐다. 부장이든 나든, 어느 한쪽이 회사를 떠나야 끝날 일이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만성적인 소화불량에 밤잠을 잘 못 이루는 날이 한동안 계속되어 안색마저 창백해지자, 마침내 아내가 눈치를 챘다. 어쩌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말을 꺼낼 적절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털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대강의 사정 이야기만 듣고도 아내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다는 얼굴이었다. 며칠을 함께 고심한 끝에 일자리를 한 번만 더 옮기기로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나이도 있고, 경기도 여전히 좋지 않았다. 새 직장 구하는 일이 여의치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충분히 감안해야 했다. 아내 쪽의 결단이 필요했다. 내가 일을 할게. 아내는 그렇지 않아도 다시 일을 시작할 알맞은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말로 나를 안심시켰다. 나름대로 준비를 해왔다는 뜻이었다. 둘째도 이제 어지간히 컸고, 아이를 더 낳을 계획은 없었다. 때가 됐지, 뭐. 어디 단단히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렇게 아내는 선선히 말해주었다. 고마웠다. 한시름 덜어낸 기분이었다. 나는 아내를 믿었다. 믿기로 했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 회사를 나왔다. 회장의 음모와 부장의 질투를 피해서. 나쁘지 않은 명분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막상 아내가 일을 시작한다는 소리를 듣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새 직장을 구할 때까지 스스로 생각해 봐도 어처구니없을 만큼 홀가분한 마음으로 버틸 수 있었다. 옮겨갈 직장을 구하기도 전에 미리 사직서를 내고 나와 쓸데없이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더 나은 곳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버렸다. 보수도 더 적고 규모도 더 작은 회사였지만, 상관없었다. 사람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것만 보기로 했다. 그렇게 옮긴 곳이 지금의 직장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는 질투라는 괴물과 아직 세상 물정을 알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에 덜컥 맞닥뜨린 셈이었다. 그것도 그 나이의 아버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깊고 악질적인 질투였다. 그것이 질투임을, 그런 악랄한 질투가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음을 아버지는 부모한테서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 하긴 공부하기에 여념이 없는 아들을 앉혀놓고 그런 것을 알아듣게 가르치고 있을 만큼 그들은,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한가하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 가기에만도, 그러면서 아들을 뒷바라지하기에만도 턱없이 바빴을 테니까. 불행이라면 그게 아버지의 불행이었다.

그렇게 된 사정을 내가 더 궁금해하지 않을 만큼 상세하게 얻어들은 것은 아니다. 아무도 그 정도까지 깊은 이야기를 나한테 들려주지는 않았다. 아무리 억울하고 원통해도 낱낱이 까발려 털어놓기보다는 차라리 숨기고 싶은 이야기 쪽에 더 가깝기 때문일까. 어머니가 나한테 해준 이야기도 아들이 듣기에 거북하지 않도록 얼마간 내용을 덜어내거나, 부드럽게 어루만진 흔적이 엿보이는 모양새였다. 어쩌면 그보다 더 깊은 이야기는 어머니조차 잘은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이야기의 절반은 어머니가 아버지라는 남자를 알기 전의 시기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그런 지나간 이야기를 자기 아내한테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마 한 번도 제대로 이야기해 준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머니가 나한테 들려준 이야기만으로 아버지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질투에 대해서 충분히 알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나는 지난날 내가 조금이라도 의문을 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되새겨보기 시작했다. 기억력과 추리력이 동시에 필요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고향에 내려가기를 극도로 싫어했던 것, 고향 사람들한테서 걸려오는 전화조차 받기를 기피했던 것, 이사를 갈 때마다 관할 지역 경찰서 대공과 형사가 집까지 찾아와 아버지한테서 각서 같은 것을 꼬박꼬박 받아 갔던 것, 그럴 때마다 그렇지 않아도 늘 좋지 않던 아버지의 기분이 더욱 침울하게 가라앉았던 것, 어쩌다 외가 쪽 어른들이 우리 집에 왔을 때 어머니와 마주 앉아 이런저런 옛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내가 엿듣고 있는 기미를 알아차리고는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던 것, 드물게 친가 쪽 사람이 무슨 일인가로 우리 집을 방문한 날 그가 누구인지 나한테 아무도 친절히 소개해주지 않았던 것……. 의심스러웠던 기억은 한 번 파 올리기 시작하자 땅 속 깊은 곳의 수맥이 터지듯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 모두가 고구마 줄기처럼 하나의 굵은 선으로 꼼꼼하고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더는 의심할 수 없었다.

그 줄기를 어루만지면서 나는 비로소 아버지의 고향 친인척들이 아버지를 깊이 질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이 질투의 감정을 품을 만한 행동을 아버지 쪽에서 무의식적으로 했는지도 모른다.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질투의 감정을 불러일으킨 사람 쪽에서는 자신이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을 전혀 짐작조차 못 하기가 십상이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와 비슷하다. 가해자는 자신이 가해를 한 줄도 의식하지 못하는데, 피해자는 가해자에 대한 깊은 원한과 증오를 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고향 친인척들 사이에서 아버지는 어느새 그런 질투의 대상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궁벽한 시골에서 농사나 짓고 사는 자기네 처지와 대처의 명문 대학에 다니게 된 아버지를 늘 견주어보면서 남몰래 열패감에 젖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러니 한 편으로는 쭉쭉 잘도 뻗어나가는 아버지를 부러워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그런 아버지를 망치고 싶은 어두운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어지간히 있지 않았을까. 그러다가 마침내 기회가 온 것이다. 그것도 질투로 누군가를 망쳤다는 죄책감을 여럿이 나눠 가짐으로써 희석시킬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

어머니는 배냇저고리 신세를 면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나를 업고 남편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았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그 기억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어머니도 아버지가 최종 판결을 받을 때까지 그 모든 과정에 빠짐없이 다 참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없는 자리에서 진행된 일들에 대해서 아버지는 그 누구한테도 시시콜콜히 털어놓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 분하고 원통한 일들이 많았을 것이다. 내가 이것을 아버지 쪽에 일방적으로 억울한 일이라고 판단하는 까닭은 그 사람이 아버지와 만났다는 사실을 위장 자수를 한 다음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악의적으로 발설했다는 혐의가 짚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는 뭔가 아버지한테 불리한 내용을 덧붙이거나 꾸며냈을 것이다. 꽤나 적극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고서야 아버지를 제외한 집안사람들 모두가 하나같이 이렇다 할 고문이나 폭행을 당하는 일도 없이 가벼운 처벌만 받거나 따끔하게 주의를 듣는 정도로 풀려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아버지를 결정적으로 망치려는 것이 그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학벌이 지나치게 좋았다는 점도 그 국면에서만큼은 몹시 불리하게 작용했다. 시국이 험한 만큼 아버지는 일벌백계의 본보기로서 더없이 알맞은 대상이었을 것이다. 모든 조건이 아버지의 파멸을 목표로 너나 할 것 없이 합력한 꼴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여러 가지로 참 불운했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곤경에 빠진 자신을 보호하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는 집안의 딸과 결혼하지도 않았고, 경제활동도 갓 시작한 즈음이었으며, 당연히 자신을 어느 정도 스스로 지켜낼 만한 사회적 지위도 아직은 갖추지 못한 처지였다. 한 마디로 시기가 너무 일렀다. 사람 하나 망쳐놓기에 참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그렇게 망쳐진 아버지는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아버지가 형기를 조금 남겨놓고 삼일절 특사로 나왔을 때 세상은 아버지 같은 전력을 가진 사람을 받아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아버지가 떳떳이 발붙일 곳은 사회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도대체 그런 세상을 아버지는 어떻게 살아왔던 것일까. 더는 희망이 없는 그런 사내를 그래도 남편이라고 믿고 함께 살아야 했던 어머니는 도대체 그 세월을 어떻게 견뎌냈던 것일까. 나는 그 뒤로 이어진 적지 않은 세월을 두 분과 함께 살았는데도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나는 온전히 귀머거리에 장님이었던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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