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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81. 현대와 메이지 시대, 또는 문학소녀와 문학청년

- 고나카 가즈야, 〈미래를 걷는 소녀〉

by 김정수

C81. 현대와 메이지 시대의 통신, 또는 문학소녀와 문학청년의 대화 - 고나카 가즈야, 〈미래를 걷는 소녀〉(2008)

경성 시대 또는 향수와 그리움

이 영화의 절반은 메이지 시대가 배경입니다.

우리가 이른바 ‘경성 시대’에 대한 묘한 향수를 지니고 있듯이, 일본은 ‘메이지 시대’에 대한 묘한 향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편의상 향수라는 말을 썼지만, 이는 그리움과는 그 성격이 조금 다른 정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일본 쪽에서는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우리 쪽에서는 경성 시대를 그리워한다고 말하면 아무래도 왠지 아귀가 맞지 않아 삐걱거리는 느낌이 듭니다. 결국 일제 강점기를 그리워한다는 말이 되니까요.

일제 강점기가 배경인 과거의 우리 영화들을 보면 그 시대를 그리워하는 정서 따위는 사실 찾아보기 힘듭니다. 대체로 암울하고, 슬프고, 우울하고, 갑갑하고, 억울하고, 암담한 정서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시대를 벗어나고 싶은 시대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국권을 빼앗긴 시대니까요. 물론 김두한이나 용팔이 캐릭터가 등장하는 액션활극영화들은 똑같은 일제 강점기가 배경이라도 분위기가 조금 다르기는 합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그런 어두운 정서의 바탕 위에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영화 제작 여건이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던 시절에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화면의 때깔도 어느 만큼은 칙칙하고요.

한데, 같은 시기에 쏟아져 나온 일련의 영화들, 그러니까 〈원스 어폰 어 타임〉(2008, 정용기), 〈라듸오 데이즈〉(2008, 하기호), 그리고 〈모던보이〉(2008, 정지우) 등은 그 앞선 시기의 영화들과 견주어볼 때 많이 다르다는 느낌이 앞섭니다.

우선 때깔부터가 그렇습니다. 곱다 못해 그야말로 럭셔리하지요. 미술, 의상, 분장 따위에 무척 많은 신경을 썼다는 느낌이 확연합니다. 한번 척 보기만 해도 제작비의 주요 용처가 어디인지를 금세 짐작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는 이른바 ‘경성 시대’가 때깔 곱게 치장하기에 매우 적절한 배경이라는 뜻도 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시각적으로 매력적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한데, 문제는 이때의 매력이 혹 ‘향수’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은 것입니다. 무슨 ‘황금시대(Golden Age)’를 그리워하듯이 말이지요. 물론 개념적으로 ‘향수’와 ‘그리움’이 어느 만큼 겹치고, 또 나뉘는지를 명확히 판별하기는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그것이 이 글의 목표도 아닙니다.

다만, 위에서 보기로 든 당시의 몇몇 한국영화들이 ‘경성 시대’를 관객의 향수를 자극하는 수단으로 빌려오지 않았나,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경성 시대가 그렇다면, 일본인에게는 메이지 시대가 그렇듯 향수의 근원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메이지 시대 또는 때깔과 이야기

역사적으로 메이지 시대는 1868년 10월 23일부터 1912년 7월 30일까지로 되어 있습니다. 그 유명한 타이타닉 호 침몰 사건이 일어난 때가 1912년 4월 15일이니, 타이타닉 호의 침몰과 메이지 시대의 종언은 그 시기가 묘하게 겹칩니다.

따라서 왠지 그 둘 사이에 무슨 상징적인 관계가 있는 듯도 하지요. 침몰과 종언―.

이 영화 〈미래를 걷는 소녀〉의 절반은 바로 이때, 곧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던 날 전후 며칠의 이야기입니다. 또는, 메이지 시대를 마감하는 시기의 며칠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실제로 영화 속에서 그 사건이 언급되기도 합니다. 신문 기사도 동원되고요.

하지만 〈미래를 걷는 소녀〉가 메이지 시대를 다루는 태도는 〈원스 어폰 어 타임〉이나 〈라듸오 데이즈〉, 또는 〈모던 보이〉가 경성 시대를 다루는 태도와 사뭇 다릅니다.

이 세 편의 한국영화들에서 경성 시대가 그 자체로 하나의 주인공과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면, 〈미래를 걷는 소녀〉에서 메이지 시대는 또 다른 절반인 현대와 서로 조화를 이루어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 구실을 합니다.

그러니까 한쪽에서는 주(主)인 것이, 다른 쪽에서는 종(從)인 셈이라고 하면 될까요.

저는 이 차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고스란히 볼거리와 이야기의 차이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이 더 우위에 있는 개념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는 시각적인 볼거리보다는 이야기의 흥미로움 쪽에 더 마음이 끌린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일련의 ‘경성 시대’ 배경 영화들이 때깔과 볼거리에 정성을 쏟은 만큼 이야기 자체에도 신경을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미래를 걷는 소녀〉는 확실히 때깔보다는 이야기 쪽입니다.


끝내기 능력

저는 일본영화의 시나리오에서 종종 그 특유의 섬세함과 정밀도를 자랑하는 일본의 전자제품을 대하는 감흥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문과스럽다기보다는 이과스러운 매력이라고 하면 될까요. 물론 지금이야 경제 상황과 더불어 그 기세가 역전된 느낌이지만요.

말하자면, 앞뒤 인과관계가 기계적으로 절묘하게 착착 맞아떨어진다는 느낌 말입니다. 작가주의 예술영화를 제외한 일반 상업영화에서 이는 분명히 취할 만한 장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래를 걷는 소녀〉도 바로 그렇게 톱니바퀴가 착착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너무나 기계적으로 앞뒤를 잘 맞춘다는 느낌도 없지 않아서, 때로는 다소 비인간적이거나 작위적이라는 생각도 들고, 심지어는 이야기가 하나의 공산품 취급을 당하는 듯한 껄끄러운 기분도 드는 게 사실입니다. 어딘가 이과스럽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다른 장점들이 많더라도 기본적으로 시나리오가 담고 있는 이야기에서 앞뒤 인과관계가 제대로 깔끔하게 연결되지 않으면, 나머지 다른 장점들이 속절없이 무색해지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이런 차원에서 〈미래를 걷는 소녀〉는 이미 우리 영화 〈시월애〉(2000, 이현승)나 〈동감〉(2000, 김정권)은 물론이고, 할리우드 영화 〈프리퀀시〉(2000, 그레고리 호블릿), 그리고 심지어는 같은 일본영화인 〈기묘한 이야기〉(2003, 오구라 히사오 외)의 한 에피소드를 통해서도 여러 차례 접한 바 있는 낯익은 소재를 취했으면서도 앞뒤 사건들을 연결하는 감각에서, 발군이라고까지 할 것은 없겠지만, 제법 눈에 띄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적어도 제 느낌은 그렇습니다.

바둑에서 예전에 이세돌이나 강동윤 같은 신세대 강자들이 왕좌를 나누어 갖기 전, 한때 천하무적이었던 이창호의 주특기가 바로 ‘끝내기’였음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때 이창호한테 패배했던 기사들이 한결같이 토로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분명히 이기는 대국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끝내기를 하고 나니 반 집 차이로 졌더라는 식의 고백 말입니다.

중간 과정을 보면 분명히 이창호가 밀리는 느낌의 대국인데, 바둑을 다 두고 나서 계산을 해보면 꼭 반 집이나 한 집 정도 차이로 이창호가 승리하는 것입니다. 곧, 이것저것 벌여둔 것을 마지막에 제대로 정리하고 수습해 내지 못하면 중간에 아무리 잘했어도 결국은 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처럼 〈미래를 걷는 소녀〉는 바로 끝내기를 잘한 영화라는 것이 제 평가입니다.

그 익숙한 설정의 에피소드들을 두루두루 펼쳐놓는 앞부분은 어쩌려고 이러나 싶을 만큼 다소 낭패스럽고 방만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앞부분의 여러 가지 설정들을 하나하나 마무리하는 후반부는 그야말로 이창호식 끝내기를 떠올리게 할 만큼 절묘하다는 것이 제 소회입니다.


문학적 흥미

‘문학적 요소’로 관객의 흥미를 자극하거나 끌고 가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컨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들의 매력과는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문자 그대로 ‘문학적 요소’, 그러니까 문학에 대한 애정이나 조예가 있는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요소들이 〈미래를 걷는 소녀〉에는 듬뿍 들어 있습니다.

현대의 소녀(카호)와 메이지 시대의 청년(사노 카즈마)이 핸드폰으로 통신, 또는 대화를 한다는 이 기이하면서도 익숙한 SF스러운 설정 속에 뜬금없이 문학이라니요? 하지만 이는 사실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메이지 시대 청년이 다름 아닌 장편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써서 근대 일본문학의 창을 활짝 열어젖힌 저 나쓰메 소세키의 문하생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소설가 지망생이지요. 그래서 소설을 씁니다. 물론 아직은 습작 수준이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문학에 대한 열망이 뜨거운, 문자 그대로 ‘문학청년’입니다.

다행히 현대의 소녀도 작가 지망생입니다. 관심 분야는 조금 다르지만, 문학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으니, 자연스럽게 서로 대화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 과정에서 문학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많은 대화와 에피소드들이 속속 펼쳐지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미래를 걷는 소녀〉에서 관객의 흥미를 유지시켜 주는 또 하나의 요소, 또는 비결입니다. 저한테는 이 점이 참 흥미로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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