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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83. 못된 경찰? 착한 형사!

- 아벨 페라라, 〈악질 경찰〉

by 김정수

C83. 못된 경찰? 착한 형사! - 아벨 페라라, 〈악질 경찰〉(1992)

좋아하지는 않는, 그러나 중요한

저는 아벨 페라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취향입니다.

어쩌면 제가 정말로 싫어하는 것은 아벨 페라라의 영화 자체가 아니라, 그가 배우를 다루는 방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벨 페라라를 좋아하지 않는 까닭은 제가 그의 영화에 나오는 크리스토퍼 워큰의 이미지를 그닥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아벨 페라라의 크리스토퍼 워큰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 이미지가 저한테는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어쩌면 저는 여전히 〈디어 헌터〉(1978, 마이클 치미노)에서 로버트 드 니로의 친구로 나온 크리스토퍼 워큰의 그 선병질적이고 섬약한 이미지를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벨 페라라가 바로 그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크리스토퍼 워큰의 이미지에 얼마간 흠집을 내어놓았다는 느낌이 드는 탓에 이는 속절없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영화가 중요하지 않다고는 말하지 못합니다.

이는 제가 파졸리니의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의 영화가 중요하지 않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또는, 제가 홍상수의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의 영화가 중요하지 않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것과도 역시 비슷한 맥락이지요.


그, 하비 케이틀

이 영화에 나오는 하비 케이틀(또는 하비 카이텔)을 이제 저는 〈비열한 거리〉(1973, 마틴 스코세이지)의 하비 케이틀보다 더 좋아한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어렵사리 손에 넣은 3만 달러를 두 철없는 히스패닉 소년들에게 전해주고, 그들의 손목에 채워놓은 수갑까지 풀어준 다음, 남부의 어딘가가 목적지인 버스에 그들을 강제로 태워 보내는 마지막 장면의 감동은 〈미션〉(1986, 롤랑 조페)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폭포수를 거슬러 오르는 고행 끝에 마침내 과라니족에게 용서를 받고 회개와 감격의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의 감동과 맞먹습니다. 또는, 그 이상입니다. 적어도 저한테는요.


세 가지 테마

이 영화의 이야기 구조가 세 가지 테마의 서브플롯들로 이루어져 있음은 처음부터 확연합니다.

‘악질’ 형사 하비 케이틀의 ‘죄악’ 테마가 그 하나요, 수녀 강간의 테마가 그 둘이요, 그리고 LA다저스와 뉴욕 메츠가 맞붙은 월드시리즈 테마가 그 셋입니다.

이 세 가지 테마가 어찌나 철통같이 얽혀 들어 있는지, 관객은 영화의 마지막 순간 하비 케이틀이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벨 페라라의 선택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이 엄청난 설득력!)

도저히 감당할 수 없고, 회복할 수도 없는 ‘악질적인’ 죄악을 ‘일상적으로’ 저지르고 다니는 형사―.

그러면서도 스스로 자신이 심각한 죄악 속에 너무나 깊이 빠져들어 있음을 역시 너무나 깊이 인식하고 있는 형사―.

벗어나고 싶어도 좀처럼 벗어나지지 않는 ‘악질적인’ 죄악의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는 형사―.

하지만 자신은 가톨릭 신자라고 당당히 주장하는 형사―.

이 영화가 바로 그런 복잡한 성격들의 구현체인 한 인간의 구원 스토리라는 사실―.

놀랍지 않습니까.


형사 또는 구도자

예컨대, 영화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마약을 하지만, 그것을 마약 그 자체에 대한 기호나 중독의 표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수녀 강간 테마를 〈신의 아그네스〉(1985, 노먼 주이슨) 테마의 변형이라고 보는 것만큼이나 초점을 어긋나게 맞춘 해석이 아닐까요.

그는 끊임없이 마약을 하지만, 그것은 타락이 아니라, 구원을 지향하는 열망으로 읽힙니다. 곧, 그는 마약을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간절히 구원을 바라고 있는 것이지요.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영화는 한갓 형사 영화, 또는 범죄 영화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 그는 일종의 구도자입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일종의 구도자였던 것과 이것은 서로 아주 비슷한 맥락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착한 형사

그래서 저는 이 영화의 제목을 ‘착한 형사’라고 지었어도 그것이 ‘악질 경찰’만큼이나 큰 울림을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는 참으로 선량한 형사입니다.

저는 형사가 주인공인 그 어떤 영화에서도 여기서의 하비 케이틀만큼이나 착한, 또는 선한 형사를 본 적이 없습니다.

착하기에 타락하고 마는 인간형―. 이것이 중요합니다. 일종의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인간형이라고나 할까요.

예, 그가 착하지 않은 위인이었다면 마지막 순간 희생을 택했을 까닭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는 그때까지 희생을 계속, 아주 치밀하게 준비해 왔습니다. 언제부터요? 월드 시리즈 3차전이 끝났을 때부터요.


희생의 준비

그러니까 LA다저스가 뉴욕 메츠를 상대로 초반 세 경기를 모두 승리로 이끌어서 누가 보아도 우승은 따 놓은 당상임이 확실해졌을 때부터입니다.

그는 이상하게도 도박에 동료들을 끌어들이는 논리와는 정반대로, 그러니까 메츠가 이길 터이니, 메츠에 판돈을 걸라고 동료들을 설득해 낸 바로 그 논리와 정반대의 논리로 자신은 LA다저스에 판돈을 겁니다.

그리고 7차전까지 계속, 줄기차게, 자발적으로 패합니다.

그래서 일개 형사의 봉급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무려 12만 달러라는 거금의 빚을 지고 말지요.

한데, 이것은 확률 게임의 장에서 운이 따라주지 않아 생긴 자연스러운 빚이 아닙니다. 그가 자초한(!) 빚이지요.

이제 이 빚이 희생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파멸이 희생인 경우

영화는 이 빚을 러닝 타임 안에 용의주도하게 희생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이때 감독의 솜씨는 혀를 내두르게 할 만큼 유려합니다.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파멸을 자초하는 인간형은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습니다.

두 가지 사례가 얼른 떠오르네요. 하나는 〈분노의 주먹〉(1980, 마틴 스코세이지)의 로버트 드 니로이고, 또 하나는 〈히트〉(1995, 마이클 만)의 로버트 드 니로입니다.

한데, 그렇게 자초한 파멸이 희생인 경우는 이 영화 〈악질 경찰〉이 유일합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범위에서는 그렇습니다. 그것도 우연의 결과가 아닌, 용의주도한 계획과 의도와 의지가 빚어낸 희생으로서는 독보적인 사례지요.


눈부시게 장엄한 연기

영화의 종반부, 성당 안에서 벌어지는 그 장엄한 회개와 중생과 간구와 눈물의 현장은 보는 사람을 압도합니다.

그 순간 하비 케이틀의 연기는 눈부시게 장엄하지요.

그 처절한 절규, 간구, 울음―.

저는 그 순간 하비 케이틀의 연기를 〈분노의 주먹〉에서 감옥에 갇힌 로버트 드 니로가 차가운 벽, 아무런 대답도 없고, 반향도 없는 저 냉정하리만큼 두꺼운 감방의 벽을 두 주먹이 으스러져라 맹렬히 두들겨대며 절규하던 장면의 눈부시게 압도적인 연기와 거의 맞먹는다고 느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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