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이 레테리에, 〈인크레더블 헐크〉
C82. 헐크의 운명, 화란 참을 수 있는 것인가? - 루이 레테리에, 〈인크레더블 헐크〉(2008)
화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저는 〈인크레더블 헐크〉를 보면서 초반 10분이 지날 무렵 이 영화를 ‘화(火)’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하고 질문하는 영화로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화’란 무엇일까요?
아니, 이렇게 물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화가 무엇인지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화란 ‘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서’ 또는 ‘나서’ 문제가 되는 그 무엇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화가 났을 때 그 화를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느냐, 또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고 물어야 합니다.
화는 내야 하는 것인가, 참아야 하는 것인가?
세상이 하도 수상해서 그런지, 요즘은 화를 참기보다는 내야 한다는 쪽으로 많이들 권장하는 것 같습니다.
현대 정신병리학이나 심리학이 이런 식의 처리방식을 부추기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참으면 쌓여서 병이 되니까 내서 풀어야 한다는 논리지요.
하기야 이 처방 아닌 처방의 소리가 정말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는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라는 성경 말씀이 무색해지는 형국이지요.
그렇다면 다시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시대조류에 순응하여 화가 날 때 참지 말고 화를 내면, 그러니까 화풀이를 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것일까?
아니, 건강한 것은 둘째 치고, 그럼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을까?
오래 참음의 미덕은 이제 정말 헛것이란 말인가?
화를 참는 쪽의 억울함 또는 불공평한 세상
틱낫한 스님의 《화》(최수민 옮김, 명진출판사)는 그런 차원에서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었지요. 화는 참아야 한다는 것이 그 책의 핵심 메시지였기 때문입니다.
틱낫한의 메시지에 입각하면, 화는 내지 말고 속으로 삭여야 하는 것입니다.
참거나 삭인다는 말 자체에 어느 만큼 거부감을 지닌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얼마간은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우선은 어쩐지 참는 쪽이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대개 참는 쪽은 힘없고 약한 사람들이기가 십상이며, 지난 시절의 우리네 역사가 또 그렇다고 웅변으로 증명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 섬에 가고 싶다〉(1993, 박광수)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대사를 저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과거의 불행한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섬마을 무지렁이 황동팔은 세월이 어지간히 흘렀는데도 그와 같은 사건이 속절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고약한 현실 속에서 참을 수 없는 울분을 터뜨리며 이렇게 절규합니다.
“무슨 놈의 세상이 맨날 당하는 놈이 참아야 한단 말이여?”
〈그 섬에 가고 싶다〉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참는 사람 따로 있고, 참아야 하는 상황을 조장하는 사람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 불공평한 세상이지요.
화를 다스리는 ‘공감 가는’ 방법 ‘걷기’
그러니 화를 속으로 삭여야 한다는 틱낫한 스님의 주장이 이 막돼먹은 시대에 씨알이 먹혀들 까닭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주장에 상당히 공감했고, 그래서 이 글을 통하여 지금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틱낫한 스님의 견해를 따르면, 참는다고 반드시 화가 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잘만 다스리면’이라는 단서는 어쩔 수 없이 붙지만, 어떻든 화를 폭발시켰을 때보다는 지그시 다스렸을 때 인간은 더 행복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정말 행복해지고 싶다면 화를 내지 말고 잘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주장에 깊이 공감하려면 참는다는 것 자체보다는 참는 방법, 또는 참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공감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 공감이 없으면 설사 화를 참아야 한다는 명제를 받아들이더라도 그다음 단계가 속수무책이기 때문입니다.
틱낫한 스님이 제시한 방법은 ‘걷기’입니다. 그것도 속보(速步)가 아니라 만보(漫步)지요.
천천히, 그러면서도 규칙적인 리듬으로 걸으면서, 또는 걸음으로써 우리 내면에서 터져 나오려는, 또는 끓어오르려는 화를 지그시 다스리는 것입니다.
화를 다스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저는 이 방법에 십분 공감했습니다.
공감했다는 것은 제가 실제로 그 방법으로 실험을 감행해서 효과를 보았다는 뜻입니다.
정말입니다. 효과가 있었습니다.
물론 때마다 어김없이 효과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또, 이런 방법이 전혀 효과가 없는 분들이나 상태도 아마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는 분명히 효과가 있었기에 여기서 언급하는 것입니다.
뜬금없이 ‘화’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와버렸네요.
요컨대, 화란 지그시 다스릴 수 있는, 다스리는 것이 가능한 그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 약물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덧붙여야 합니다. 더불어, 화를 다스리고자 하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점도요.
이는 우선은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방법이며, 두 다리로 걷는 행위를 동원한다는 점에서 동시에 육체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만 먹으면 이것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헐크가 직면해 있는 진짜 문제
한데, 여기까지 쓰고 나니 문득 〈인크레더블 헐크〉를 ‘화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로 읽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하는 의문이 이제야 비로소 떠올라 살짝 당혹스럽습니다.
〈인크레더블 헐크〉에서 헐크 역의 에드워드 노튼이 때마다 고민하는 것은 자신의 화를 다스리는 문제다,라고 하면 절반 정도만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좀 더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말하면, 그가 고민하는 것은 화를 다스리는 문제가 아니라, 심장의 박동 또는 맥박을 다스리는 문제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심장 박동수나 맥박이 비정상적으로 빨라지는 모든 상황이 이 고민의 영역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연인과 사랑을 나누는 ‘흥분된’ 상황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게 당연합니다. 에드워드 노튼은 화를 내서는 안 되지만, 또는 화가 나서는 안 되지만, 사랑을 나누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좀 더 범주를 확장하면 조금이라도 과격한, 그러니까 유산소 운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더라도 늘 심장박동수를 측정하면서 그것이 일정한 한계를 벗어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신경을 써야 합니다. 잠깐이라도 주의를 게을리하는 순간 그는 어쩔 수 없이 헐크가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그는 혀가 화끈거리는 매운 음식을 먹어서도 안 될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술도 먹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는 온갖 자극 자체를 피해야 합니다. 말다툼도 해서는 안 되고요. 그야말로 수도사와도 같은 금욕적이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운명적인 굴레와 족쇄, 심장박동수 또는 맥박
이쯤 되면 그가 손목에 차고 있는 맥박수 측정기는 그 자체가 그의 운명적인 굴레에 대한 가혹한 상징물로 새겨집니다.
이 지점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은둔뿐입니다. 그는 어쨌거나 심리적인 자극이든, 육체적인 자극이든, 자극 자체를 받을 수 있는 모든 상황을 기피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가 간절히 벗어던지고 싶지만,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는 족쇄, 적어도 아직까지는 벗어던질 수 없는 족쇄입니다. 정말 야속한 족쇄가 아닐 수 없지요.
요컨대, 그가 처해 있는 운명이 가혹한 까닭은 그가 단순히 화만 다스린다고 헐크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는 데 놓여 있습니다.
화를 다스리는 것 자체만이 문제라면 그가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시도하듯 각종의 정신 수련 과정을 통하여 적절한 훈련을 꾸준히 받는 것으로 효과를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다스려야 하는 것은 화만이 아닙니다. 그는 심장박동수, 맥박수 자체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것이 언제나 일정 수준 이하에 머물도록, 일정 수준 이상을 벗어나지 않도록 묶어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화가 나더라도 심장박동수만 일정 수준 밑으로 유지하면 됩니다.
문제는 그 심장박동수, 또는 맥박수를 늘리는 구실을 하는 것은 화만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진퇴양난입니다.
불수의근의 운명
예, 그는 지금 불가능한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은 주지하다시피 수의근(隨意筋)이 아니라 불수의근(不隨意筋)입니다.
심장은 인간의 의지로 조절할 수 있는 장기가 아닙니다. 박동수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조절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자신의 ‘오염된’ 피를 ‘과학적으로 온전히’ 정화하지 못한다면 심장박동의 정지, 그러니까 죽음만이 그를 자유롭게 하여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요.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렇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슈퍼히어로의 운명
하지만 이것은 슈퍼히어로 영화에서는 주문할 수 없는 조건입니다. 금기지요.
슈렉의 녹색과 헐크의 녹색이 똑같은 녹색이면서도 너무나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모든 자극 상황을 피해야 하는 그는 ‘운명적으로’ 고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고독은 그 자신의 타고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고독해야 합니다. 고독은 그의 운명입니다. 고독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 이것이 그가 맞닥뜨린 불행의 핵심입니다.
그의 존재 이유, 헐크의 존재 이유
더욱 가공할 만한 일은 그의 존재 이유가 ‘화’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화가 나서 헐크로 변모한 다음 눈부신 스펙터클 액션을 과시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에게 운명적으로 부과되어 있는 미션입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끊임없이 그가 화를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상황을 빚어내기 위하여 골몰합니다.
‘화’가 결정적으로 멈추는 순간, 그러니까 ‘화’가 더는 그를 헐크로 만들지 못하는 상황이 도래하는 순간 그의 존재 이유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가 주인공인 영화의 존재 이유도 사라지지요.
그러니까 영화 속에서 그가 화를 참기 위하여 애쓰는 모든 상황은 기실 헛것입니다. 이야기 자체를 끝장낼 의도가 없는 한 그의 피를 정화할 수 있는 그 어떤 과학적인 방법도 개발되지 않을 것이며, 그를 화나게 하는 상황도 끊임없이 벌어질 터이니까요.
물론 〈어벤져스: 엔드 게임〉(2019, 앤서니 루소 & 조 루소)에서 헐크는 영원히 화가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지만요.
하여튼, 우리가 그것을 즐기지 않기로 일제히 마음먹지 않는 한 누구도 헐크를 완전히 잠재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참 딱하게도, 그가 평온을 얻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우리 인지상정의 한 귀퉁이에서 그가 헐크가 되어 날뛰는 모습을 앞으로도 계속 보고 싶다는 욕망 또한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 꿈틀거림을 우리는 그가 화를 참을 수 없듯이, 도저히 참을 수 없습니다.
이 꿈틀거림, 이 욕망만큼은 어쩌면 화보다도 더 참기 어려운 것임을 관객으로서 우리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긴, 오죽하면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2025, 줄리어스 오나)에서는 기어코 레드 헐크(해리슨 포드)까지 등장시켰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