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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85. 승객들, 문명의 발달과 인간성의 추락

- 〈에어포트〉 & 〈플라이트 플랜〉

by 김정수

C85. 승객들, 문명의 발달과 인간성의 추락 - 조지 시튼, 〈에어포트〉(1970) & 로베르트 슈벤트케, 〈플라이트 플랜〉(2005)

〈에어포트〉와 〈플라이트 플랜〉

〈플라이트 플랜〉이 제게 흥미로웠던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는 조디 포스터 특유의 그 한없이 깊은 우수에 젖은 눈빛을 확인할 수 있어서였고, 또 하나는 이 영화가 비행기라는 거대한 교통수단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탓이었습니다.

비행기 가운데서도 전투기나 폭격기 또는 헬리콥터가 아닌, 일반 항공기(또는 여객기)가 주요 공간적 배경인 영화라면 역시 〈에어포트〉라는 고전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계열에 속하는 영화의 원류를 따진다면 역시 〈에어포트〉까지는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 않을까요.

적어도 제 기억에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영화들 가운데서는 그렇습니다.

게다가 〈플라이트 플랜〉과 〈에어포트〉는 모두 일종의 항공기 테러, 또는 항공기 사고 소재의 영화들입니다.


교통수단이 소재인 영화의 매력

교통수단이 주요 소재인 영화들이 흥미로운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요? 아니면, 영화 속에 등장하는 교통수단 그 자체가 흥미로운 것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물론, 모든 교통수단이 다 흥미로운 것은 아닙니다. 제 경우는 기차와 비행기가 매력적인 축에 속합니다. 일단 영화 속에 기차나 비행기가 등장하면 저는 무턱대고 어떤 기대감에 사로잡히고 마니까요.

기차는 땅 위를 달리고, 비행기는 하늘을 난다는 차이가 있고, 둘 다 많은 승객을 한꺼번에 이송한다는 것, 그리고 그 자체로 온전히 닫힌 공간이라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이것이 흥미의 핵심 요소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속도일까요? 하긴, 기차나 비행기나 둘 다 많은 사람이 애용하는 교통수단들 가운데서도 가장 속도가 빠른 축에 속하는 것들이기는 합니다.

그러니, 배가 기차나 비행기에 견주어 제 흥미를 자극하는 정도가 좀 떨어지는 것은 아무래도 속도에서 많이 뒤처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한 가지 보기를 들면, 제가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 알프레드 히치콕)를 잊을 수 없는 것도 결국은 기차 시퀀스 탓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소재의 이런 특성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임스 카메론은 〈타이타닉〉(1997)을 일종의 러브스토리로 만든 것이 아닐까요. 모르긴 몰라도, 〈타이타닉〉이 그저 재난영화이기만 했더라면 관객으로서 195분의 러닝 타임을 견디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테러의 해악 또는 문명의 폐해

테러의 해악은 무엇일까요?

거대한 마천루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으로 대변되는 문명의 파괴와 엄청난 재산상의 손실? 그로 말미암은 수많은 사람의 느닷없는 죽음? 그 죽음이 빚어내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깊은 슬픔과 씻기 힘든 트라우마? 테러를 저지른 세력 또는 그 비호 세력을 응징하기 위한 보복 전쟁과 그 전쟁에 대한 또 다른 보복 테러의 악순환?

〈에어포트〉는 테러의 가장 심각한 해악은 역시 인간성의 황폐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용하는 영화입니다. 적어도 저한테는요. 아니면, 그렇다는 것을 재차 확인시켜 주는 영화라고 하면 될까요?

그것은 특히 조디 포스터가 한없이 우수에 찬 어머니로 나와 실종(또는 납치)된 어린 딸을 마침내 찾아내 구하는 이야기인 〈플라이트 플랜〉과 견주어보았을 때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는 특징입니다.


무임승차 할머니 승객의 활약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보면, 오래전 TV를 통하여 처음 〈에어포트〉를 처음 보았을 때는 예의 ‘무임승차 할머니(헬렌 헤이즈)’의 활약 부분이 가장 강렬하게 제 흥미를 끄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 다시 본 〈에어포트〉는, 아직 카리스마가 살아 있던 시절의 버트 랭커스터나 딘 마틴 같은 대배우들을 한 화면 속에서 확인하는 반가움도 컸지만, 역시 무엇보다도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사건을 둘러싼 승객들의 반응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제 눈길을 잡아끄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였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조금 달랐습니다.

공교롭게도 폭탄을 소지한 범인의 바로 옆자리에 앉은 탓에 무임승차임에도 책임을 추궁당하기는커녕 오히려 기장의 부탁을 받아 일종의 연기를 해 보임으로써 범인의 폭탄을 빼앗는 데 일조하려는 그 할머니의 연기 아닌 연기, 아니, 연기 속의 또 다른 연기, 곧 일종의 이중연기는 히치콕 특유의 서스펜스를 유발하는 명장면이라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제 생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할머니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알지만, 영화 속의 다른 승객들은 모르는 상태니까요.


승객들의 반응

문제는 그 할머니의 활약(연기)을 둘러싼 주변 승객들의 반응입니다. 아니, 그 반응에 대한 제 생각의 변화입니다.

〈에어포트〉에서 승객들은 지금 할머니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데도, 그러니까 할머니가 무임승차를 한 범인이며, 자칫 또 다른 어떤 악행을 저지를 위험이 있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아랑곳없이 일제히 할머니의 편을 듭니다.

스튜어디스가 범인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고의로 그 할머니를 못된 사람 취급하며 함부로 다루는 데에 승객들이 깜박 속아 넘어가서 격분하는 것입니다.

이 영화를 처음 볼 때는 그게 그저 너무도 당연한 상황이라고만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던 것 같습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에만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으니까 그럴 법도 하지요.

한데, 세월이 꽤 흐른 다음 〈에어포트〉를 다시 보니, 바로 그 장면을 대하는 제 마음에 이상한 파문이 일었습니다.

아무리 무임승차를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연약한 할머니에게 인정머리 없이 굴어서는 안 된다는 승객들의 반응을 목도하는 제 가슴이 순간 뭉클해졌던 것입니다.

그 순간 제 생각에 그것은 너무도 기이했습니다. 동시에 몹시 반가웠지요. 그것이야말로 인지상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에어포트〉가 〈플라이트 플랜〉과 결정적으로 갈리는 지점입니다.


딸은 잃은 엄마의 고군분투

〈플라이트 플랜〉에서 조디 포스터는 무임승객도 아니고, 테러범도 아닙니다.

그저 자기 딸을 잃어버렸다고 절규하는 애처로운 한 어머니, 한 여인일 따름이지요.

아무렴, 승객들의 인지상정을 자극하는 정도만을 가지고 따진다면 〈에어포트〉의 할머니보다야 〈플라이트 플랜〉의 어머니가 훨씬 더 윗길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승객들의 반응은 정반대입니다.

귀찮은 일에 말려들기 싫어 그 딸아이를 본 적도 없다고 거짓 증언을 함으로써 그 애처로운 어머니를 정신이상자로 몰아가는가 하면, 기내를 소란스럽게 만들어서 또 다른 위험에 자기들이 노출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떨쳐내지 못해 하나같이 비협조적이며, 심지어는 그것으로도 모자라 숫제 대놓고 적대감을 표출하기조차 합니다.

결국 조디 포스터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어처구니없는 오해 속에서 고군분투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리고 맙니다.


35년의 세월이 조장한 승객들의 차이

도대체 무엇이 〈에어포트〉의 승객들과 〈플라이트 플랜〉의 승객들을 이토록 다르게 만든 것일까요.

물론, 제작 연도를 기준으로 따질 때 그 둘 사이에는 35년이라는, 한 세대가 넘어가는 적지 않은 길이의 세월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이에 인간이 이렇게나 변해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테러의 후유증이라고 규정해 버리기는 쉽습니다. 아주 틀린 이야기도 아니고요.

하지만 테러에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역시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

그렇다고 대놓고 세상이 각박해졌다는 식으로 세태를 비판하는 발언을 하는 것도 그저 변죽만 울리는 느낌인 데는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뭔가 근본적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플라이트 플랜〉의 승객들이 〈에어포트〉의 승객들처럼 인간미 넘치는, 인정머리 있는 사람들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시간의 비가역성이라는 기반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한 번 잃어버린 인지상정을 다시 회복하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는 암담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곧,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이 인간성을 그런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문명 자체에 그런 속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지요.


문명의 발달은 역사의 당위인가?

이제 아주 근본적인 의문을 표명해야 할 시점입니다.

문명이라는 것은 왜 꼭 발달해야만 하는 것일까? 퇴보하거나 정체되는 것은 과연 나쁜 것일까? 나쁘다면 왜, 어째서 나쁜 것일까? 어쩌면 인간은 더는 발달시켜서는 안 되는 문명을 억지로, 지나치게 발달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에어포트〉의 승객들이 〈플라이트 플랜〉의 승객들로 변화하는 것이 문명 발달의 방향이라면, 거기에는 뭔가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문명의 발달과 인간성은 반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이 더 인간다워지는 현상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점점 더 각박해져만 갈 뿐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반비례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문명과 인간성,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서 저는 인간성을 택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동시에 저는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도 합니다. 아무도 문명의 발달을 멈출 수는 없을 것이며, 멈추려고 노력한들 문명이 발달을 멈추는 방향으로 순순히 돌이켜 물러나지도 않으리라는 것을요. 이는 속절없는 현상이라는 것을요. 불가항력이라는 것을요.


어쩌면 보지 말았어야 할 영화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인간성이 황폐해지는 현상을 막을 방도는 없는 것일까? 과연 문명의 발달이 인간성을 황폐하게 만드는 이 반비례의 관계를 역전시킬 도리는 없는 것일까? 그저 이렇게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인간성의 황폐화를 방치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것은 그저 운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하는 속수무책의 현상일까?

이 영화 이후 저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그래서 어떤 사건 속에 놓일 때마다 속절없이 〈에어포트〉의 승객들이 떠올라서, 또 그들과 지금 제 주변의 승객들을 비교하느라 마음이 적잖게 편치 않을 듯한 예감이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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