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에르 모렐, 〈테이큰〉
C86. 딸한테는 몇 명의 아버지가 필요한가? - 피에르 모렐, 〈테이큰〉(2008)
외로운 솔로들의 활약
얼른 떠오르는 비슷한 사례들을 꼽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다이하드 4.0〉(2007, 렌 와이즈먼)은, 저간의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브루스 윌리스가 납치된 딸을 구해내는 이야기였습니다.
딸이 납치된 정황이 아니었더라면 그가 노구(老軀)―그는 이제 더는 예전의 그 좌충우돌로 날고 기던 존 맥클레인이 아닙니다―를 이끌고 그토록 분골쇄신할 이유도 필요도 당위도 없지 않을까요.
그걸 감당해 낼 만한 에너지를 퍼 올릴 원천 또한 이제는 거의 말라버렸다고 해야 옳을 듯합니다.
이 리얼리티를 ‘논리적으로’ 고려한다면, 그는 적어도 미이케 다카시의 〈용이 간다〉(2007)―같은 해 방영되었던 TV 미니시리즈 〈커피 프린스 1호점〉의 남주인 공유가 코리언 킬러(!)로 출연한 영화―의 주인공처럼 스태미나 증진에 특효가 있는 초강력 자양강장제(!)라도 복용했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그는 늙었습니다, 확실히. 그리고 그는, 여전히, 이혼남입니다.
맷 데이먼의 ‘제이슨 본’ 시리즈는 또 어떻습니까. 21세기 액션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고 할 수도 있을 그는 이 시리즈에서 참 완벽한 느낌입니다. 여기에 그도 인간이라는 이유로 ‘거의’라는 단서를 굳이 달 필요가 있을까요.
요컨대 아무도 그를 이길 수 없고, 죽일 수 없고, 속일 수 없고,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언필칭, 언터처블(!)이지요.
무엇보다도 그로부터는 아무도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일단 마음먹으면 지옥까지라도 쫓아갑니다.
하지만 그는 일종의 도망자입니다. 모두가 그를 잡으려고 합니다. 그런데도 언제나 잡히는 쪽은 그가 아니라, 그를 쫓는 쪽입니다. 이 쫓고 쫓김의 전도와 역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솔로입니다.
〈키스 오브 드래곤〉(2001, 크리스 나혼)은 이소룡과 성룡의 뒤를 잇는 맨손 액션의 일대 향연이었지요.
이연걸이 지나가는 곳은, 그가 총기를 사용하지 않는데도, 그야말로 초토화됩니다. ‘초토화(焦土化)’라는 말이 가리키는 즉물적인 사태에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지요. 말 그대로입니다.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김수영 시인 식으로 표현해 본다면, 이연걸 앞에서 한 번 쓰러진 풀잎은 다시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는 일종의 토네이도입니다. 그가 한 번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귀를 멍멍하게 하는 섬뜩한 고요와 침묵뿐입니다. 그 누가 감히 그 앞에서 쓰러지지 않고 버티겠습니까.
그리고 그 또한 소녀를 구해내며, 여전히, 솔로입니다.
그리고 이 셋은 모두 전직 특수요원, 또는 그 비슷한, 그에 준하는 경력의 소유자들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리는 의미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언급하고 넘어갈까요. 감독이 아닌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요.
감독이라면 당연히 돈 시겔이지요. 바로 그 〈더티 해리〉 시리즈 말입니다. 분명히 해두어야겠네요. 이 시리즈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법의 수호자가 아닙니다. 법의 집행자도 아니지요. 법과 그는 서로 아무런 친연관계가 없습니다. 법은 법이고, 그는 그일 뿐입니다.
그래서인가, 그는 법을 겁내지 않습니다. 범인은 더더욱 겁내지 않지요.
덕분에 그의 앞에서 범인들은 한 마디로 작살납니다.
요컨대, 그에게는 법을 겁내는 사람들 특유의 망설임이나 눈치 보기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범인들만이 그와 맞서려 합니다.
그는 가차 없고, 용서 없이 그 범인들을 처리합니다. 처단이라는 말도 적확하지는 않은 느낌입니다. 그는 그저 천하 악종인 그놈들을 그저 ‘처리’할 뿐입니다.
법이 끼어들어 간섭할 틈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그가 범인을 처리할 때 그것은 악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어리석음에 대한 훈계처럼 느껴집니다. 이 훈계의 스타일이 한마디로 예술이지요.
그리고 그 또한, 여전히, 솔로입니다.
딸한테는 몇 명의 아버지가 필요한가?
각설하고, 이 영화 〈테이큰〉에서 리엄 니슨 또한 이혼남, 또는 솔로이고, 전직 특수요원이며, 딸을 납치당했고, 천하무적이며, 가차 없고, 용서도 없고, 망설임도 없고, 그가 지나가는 곳은 문자 그대로 초토화되며, 거침없이 다이내믹한 질주 끝에 드디어 딸을 구해내는 데 멋지게 성공합니다.
하니, 이 영화를 가리켜 앞서 예로 든 영화들을 구성요소로 삼아 이루어진 ‘잡탕’이라고 규정하면 끝일까요?
천만에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의 무용담이 아닙니다.
이 영화의 끄트머리에서 저는 속절없이 문득 ‘아버지란 무엇인가?’라는 지극히 ‘철학적인’ 질문에 사로잡혔습니다.
바로 이 이야기를 저는 지금, 바야흐로, 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철학적인 질문에 꼭 철학적인 대답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 테지요. 아무렴요.
실은 그런 대답을 해낼 능력이 모자란 탓이지만, 그 질문이 제 마음속에서 이내 ‘딸에게는 몇 명의 아버지가 필요한가?’라는 지극히 즉물적인 질문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저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 앞에서 저는 여지없이 의기소침해졌습니다.
이 시대에 딸의 아버지로 살아간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어린 딸아이가 혼자서는 엘리베이터조차 마음 놓고 탈 수 없는 이 흉맹한 시절에 말이지요.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왜 그 모계사회에서는 한 어머니와 다수의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습니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처다부제 사회 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라면 딸아이에게는 다수의 아버지가 존재할 수 있을 테니, 그 아버지들이 기능적으로 분화된 각각의 역할을 성실히, 그리고 충분히 맡아준다면요?
예, 그런 식이라면 어린 딸이라도 안심하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 아버지들 각각이 모두 진짜 아버지다운 훌륭한 사람들이라는 대전제는 필요합니다. 아버지도 더러는 괴물인 경우가 있으니까요.
그럼 도대체 몇 명의 아버지가 필요한 걸까요?
어차피 현실적으로 한 명의 아버지가 〈테이큰〉의 아버지처럼 여러 가지 능력을 고루 지닌 유능한 아버지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 그럴 리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하긴, 〈테이큰〉의 그 딸에게도 결국 두 명의 아버지가 있지 않았던가요. 천하무적의 아버지 리엄 니슨과 말―장난감 말이 아니라, 진짜 살아 있는 말(馬) 한 필!―을 생일 선물로 사줄 수 있는 재력가 아버지―.
이 천하무적의 아버지도 딸에게 말을 사줄 만한 경제력은 없었으니, 세상에 완벽한 아버지는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애써 위안을 삼는다면, 지나치게 한심한 처사일까요.
말을 사줄 만큼의 충분한 재력도 없고, 인질범들을 작살내고 딸을 구해올 만큼 뛰어난 신체적, 지적 능력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마음이 약해서 분명히 망설이다 되레 인질범들한테 당하기 십상일 세상의 대다수 평범한 아버지들은 도대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아, 저는 〈테이큰〉 속에서 리엄 니슨이 여봐란듯이 시연해 보이는 그 찬란한(!) 액션의 끄트머리에서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자괴감에 빠지고야 말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