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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87. 간절히 가지고 싶지만...

  - 배창호, 〈황진이〉

by 김정수 Mar 19. 2025

C87. 간절히 가지고 싶지만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을 그래도 가질 수 있는 방법 - 배창호, 〈황진이〉(1986)

발 페티시

   오쿠다 히데오가 지은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미키 사토시의 〈인 더 풀〉(2005)은 페티시(fetish)―사물 또는 사람 몸의 특정한 부위에 병적으로 집착함으로써 얻는 성적인 쾌감―를 표현하는 인상적인 장면으로 시작합니다.(검색을 해보니 ‘패티시’와 ‘페티시’가 혼용되고 있는데, 아직 규범 표기는 미확정이라고 나오네요)

   이 영화에 나오는 페티시는 일명 ‘발 페티시’입니다. 구체적으로는 하이힐을 신은 여인의 발에, 그러니까 그 여인이 신은 하이힐―문자 그대로 그 단단하고 높고 뾰족한 뒷굽!―에 무언가가 짓밟히는 모습을 보면서 얻는 성적 쾌감이지요.

   이 영화를 보다가 문득, 이 ‘페티시’를 ‘간절히 가지고 싶은데도 감히 가질 엄두가 나지 않는 어떤 것 또는 어떤 사람의 대리물(代理物)에 대한 집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배창호의 〈황진이〉를 페티시에 관한 영화로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착상이 떠올랐습니다.


세 남자의 이야기, 그리고 정(情)

   영화 〈황진이〉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 각각의 부분에서 황진이(장미희)는 각기 다른 남자들과 만납니다. 또는, 인연이 서로 얽힙니다.

   요컨대, 〈황진이〉는 황진이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황진이가 차례로 만나게 되는 세 남자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 남자들은 차례로 안성기(갖바치), 신일룡(벽계수), 전무송(이생)입니다.

   러닝 타임에서 차지하는 분량도 뒤로 갈수록 늘어나서 전무송 부분이 가장 깁니다.

   이는 바로 그 부분에 배창호의 〈황진이〉가 담고 있는 주제가 걸려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이 마지막 대목에 이르면 우리는 배창호의 황진이가 어떤 여인인지를, 또는 배창호가 황진이를 어떤 여인으로 해석하는지를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저는 배창호의 필모그래피에서 〈황진이〉와 가장 비슷한 영화가 〈정〉(2000)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저는 〈정〉을 ‘김유미 판 〈황진이〉’라고까지 일컫고 싶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정(情)’이라는 테마와 관련해서입니다.


황진이 & 심청

   배창호의 황진이와 가장 비슷한 인물은 춘향이 아니라 심청일 것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제 생각에 배창호 감독이, 또는 배창호 감독의 영화가 늘 강조하는 한국인 고유의 심성인 ‘정’을 찾을 수 있는 인물은 춘향이 아니라 심청입니다.

   왠지 저는 춘향이 지조나 절개는 있을지언정, 정이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배창호는, 언젠가 그 스스로도 고백한 바대로 황진이를 ‘정(情)’의 여인으로 해석한 듯합니다.

   이 영화 〈황진이〉에서 전무송 부분이 맨 나중이면서 동시에 가장 긴 이유가 바로 여기에 놓여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여성해방론 쪽에 무게를 두었다면 신일룡 부분, 그러니까 벽계수 부분을 좀 더 길게, 또는 좀 더 다르게 그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또, 저는 바로 이것이 장미희의 황진이와 송혜교의 황진이 사이의 가장 큰 차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장미희와 송혜교

   어쩌면 굳이 차이라고 할 필요조차 없을 것 같기도 하지만, 송혜교의 황진이는 이 점에서 어딘가 좀 치졸한 느낌입니다.

   장윤현 감독의 〈황진이〉(2007)―물론 이 〈황진이〉에는 북한 작가가 쓴 원작 소설이 있지요.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에서 가장 제 마음에 안 드는 장면은 황진이(송혜교)가 벽계수(조승연)를 망신 주는 장면입니다.

   아마도 선비 벽계수를 그렇게 처리함으로써 기생 황진이의 어떠함―아마도 자유, 여성해방론 따위와 관련한―을 강조하고 부각하려는 전략이었으리라고 헤아려지기는 하지만, 그럼으로써 황진이의 인간미나 품위는 형편없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박종원 감독의 〈영원한 제국〉(1995)의 후반부, 남인의 영수 채제공의 소상(小喪) 날 장면에서 대사로 나오기도 했던 저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라는 유명한 옛말을 제가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서화담(徐花潭)에 대한 황진이의 마음이나 태도를 감안하면 이 설정은 아무래도 패착의 느낌이 짙습니다.


욕망의 대리 충족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은 제가 여태까지 배창호의 〈황진이〉에 대해서 품고 있었던 생각이지만, 이 페티시 문제는 뒤에 그 〈황진이〉를 다시 보면서 새삼스럽게 떠오른 생각입니다.

   요컨대 썩 괜찮게 본 영화도 아닌 〈인 더 풀〉의 앞부분에 약간의 빚을 지게 된 셈이지요.

   순전히 이 문제와 관련해서라면 저는 안성기가 황진이의 남자로 나온 이 첫 번째 부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또 다른 〈황진이〉를 만든다면 바로 이 점에 착안하기를 기대하고 싶은 정도지요.

   그러니까 이 부분을 러닝 타임 전체로까지 확장한 〈황진이〉를 저는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의 페티시는 ‘꽃신 페티시’입니다.

   안성기는 황진이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지만 신분의 격차라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감히 황진이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 ‘가진다’라는 표현이 썩 적절한 느낌은 아니지만, 하여튼 그런 처지에서 안성기가 황진이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안성기는 황진이의 꽃신을 가지기로 합니다. 그래서 그 꽃신을 훔칩니다.

   그러니까 가지고 싶은 여인의 꽃신을 훔쳐 간직함으로써 신분상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여인에 대한 욕망을 대리 충족하는 셈이라고 하면 될까요.


꽃신 페티시

   하지만 이것만이라면 안성기의 꽃신 훔쳐 가지기는 페티시라고 할 수 없습니다. 2프로 부족합니다.

   한데, 이제부터 놀라운 장면이 펼쳐집니다.

   과문한 탓인지, 저는 한국영화에서 이런 장면 또는 설정을 접해본 적이 없습니다.

   안성기는 황진이의 꽃신을 ‘거듭’ 훔칩니다. ‘끊임없이’ 훔칩니다. 강제로 중단할 수밖에 없을 때까지 줄기차게 훔쳐댑니다.

   만일 안성기가 황진이의 꽃신을 하나만 훔쳐서 고이 간직한 채 황진이에 대한 연모의 정을 그것으로 달래며 살았다면, 또는 살 수 있었다면, 그것은 그저 한때의 연모, 언젠가는 잊히거나 사그라질, 적어도 다른 여인을 만남으로써 해소될 수 있는 일시적인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데, 그는 ‘계속’ 훔칩니다. 차라리 스스로 멈출 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옳지 않나, 싶을 지경으로, 차라리, 거의 폭주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넉넉하지 않습니다.

   페티시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집착’ 내지는 ‘편집(偏執)’이니까, 이미 안성기는 걷잡을 수 없이 페티시의 단계로 접어든 셈입니다.

   이것을 페티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적어도 이 단계에서는 억지가 아닐까요.

   어쩌면 그 순간 안성기는 이미 황진이 자체가 아니라, 황진이의 신발에 더 집착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화장(靴匠:가죽신 장인)이 가죽과 비단으로 정성껏 만들어내었던 조선시대 여인들의 꽃신―.

   그 가죽과 비단의 재질에 안성기는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끼는 단계로 어느 사이에 접어들어 있었는지도 모르는 것이지요.


배창호의 연출 감각

   물론 이것은 하나의 해석입니다.

   영화 〈황진이〉 전체로 보면, 꽃신보다는 의상(衣裳)이 더 중요한 구실을 합니다.

   감독 스스로도 밝힌 바 있듯이, 황진이는 결정적인 순간에 몸에 걸치고 있던 무언가를 벗어던집니다. 때로는 치마를, 때로는 너울을, 때로는 장옷을 기회만 생기면 미련 없이 훌쩍, 훌쩍 벗어던집니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무언가를 표현하고, 그 순간 영화는 어떤 국면 전환의 계기를 맞습니다.

   여기에 배창호의 연출 감각이 걸려 있기도 하다는 것이 저의 또 다른 생각입니다.

   이러저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정말 배창호의 〈황진이〉는 한국영화사 전체에서는 물론이고, 배창호의 필모그래피에서조차 야속하리만큼 깊이 묻혀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소유의 욕망을 해소하는 방법

   ‘꽃신 페티시’ 자체에 대해서는 이 분야 전문가들의 몫으로 남겨두겠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제 본심을 털어놓을까 합니다.

   실은 제가 애초 페티시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이 페티시 개념을 빌려서 배창호 영화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애정을 고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소 차이가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

   무엇을 간절히 가지고 싶은 욕망을 해소하는 가장 확실한, 또 맞는 방법은 그것을 문자 그대로 ‘소유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회화(繪畫)의 경우에는 그럴 수 있습니다. 비용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시장가에 걸맞은 비용을 치르고 해당 그림을 사들이면 됩니다. 아니면, 사진으로 촬영되어 인쇄된 도판, 또는 도록을 가지거나, 아니면 전시회에서 원본 그림을 직접 육안으로 보는, 그러니까 직관하여 기억하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두는 아무래도 가진다는 것의 온전한 느낌과는 거리가 멉니다.

   문학의 경우는 가진다는 개념이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초판에 대한 집착이 있기는 하지만, 책 한 권을 사서 간직하는 것으로 소유의 욕구가 쉽게 해소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詩) 같은 경우, 통째 외우는 식의 ‘정신적인’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 경우는 비용도 거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초호화 양장본이라고 해도 비용 면에서는 그림에 댈 것이 못 되지요.

   더불어 역사적인 희귀 도서나 친필 원고 따위의 문제가 걸려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지고 싶은 욕망의 실현이라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아무래도 문학이 회화에 뒤진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음악도 문학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어쩌면 가장 가진다는 개념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음악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 경우에도 문학의 경우와 비슷하게, 작곡가의 친필 악보에 대한 소유욕과 같은 문제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음악은 음반이나 CD, 또는 파일을 소유하는 식으로, 이제는 가지고 싶은 욕망의 해소가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 아닙니까.

   설사 친필 악보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음악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는 의식과는 아무래도 거리가 멉니다. 아무리 악보를 읽을 줄 안다고 해도 들리지 않는 음악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영화를 소유하는 방법

   문제는 영화입니다.

   영화만큼 처음부터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소유되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시작된 예술 장르가 또 있을까요. 하지만 파일이나 DVD나 비디오를 소장하는 것으로 그 영화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정말 그럼으로써 가졌다는 상태의 온전한 느낌을 얻을 수 있을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었다는 느낌 또는 의식입니다.

   듣기로, 영화광들 가운데는 바로 이 느낌이나 의식을 위하여 한 영화를 수도 없이 거듭 보아서 그 전체를 완전히 외워버리는 방식의 영화 보기를 하는 사람도 있기는 한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서 외운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외웠다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심정만큼은 이해가 갑니다. 적어도 대사를 줄줄 외기는 하니까요.

   바로 이 이야기를 저는 마지막으로 해보고 싶네요.

   여기까지 글을 쓰고 나니,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유의 형태 또는 방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래도 매체의 특성과 관련지을 수밖에 없을 텐데, 음악은 듣는 것으로, 회화는 보는 것으로, 문학은 읽는 것으로 가진다는 상태가 어느 정도 실현되기는 합니다.

   역시 문제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아무래도 가진다는 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이고 내밀한 느낌을 충족시키기에 무리가 따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가진다는 상태의 완전한 의미 또는 느낌은 결국 다른 사람들은 가지지 못했는데 나만이 홀로 가졌을 때라야 비로소 성립하는 개념이 아닐까요.

   그러니, 아무래도 회화를 제외한 다른 모든 예술 장르에서 이 개념은 기본적으로 성립할 수 없게 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글쓰기 페티시

   그렇다면 영화는요?

   다음은 배창호의 영화 〈황진이〉를 다시 보면서 떠오른 생각입니다.

   영화의 경우 저는 꼭 가지고 싶은, 그러니까 나만이 홀로 가지고 싶은 욕망을 해소할 방법으로 어쩌면 글쓰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어지간히 동어반복이지만, 한번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너무나 마음에 드는 어떤 영화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 영화를 아무리 거듭해서 보아도, 비디오테이프나 DVD를 구입해도, 심지어 거기에 감독이나 주연 배우의 사인을 받아도, 아니면 파일을 나만의 외장하드에 고이 저장해 두어도 저는 언제나 미진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신기하게도 그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나면 그 미진한 느낌이 상당 부분 해소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가지고 싶은,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가 가장 많이 해소되었던 경우는 그 영화에 대한 글을 썼을 때였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났을 때 저는 그 영화를 내 것으로 만든 느낌에 가장 근접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면 될까요.

   이것을 ‘글쓰기 페티시’라고 이름 붙여도 된다면, 저는 분명히 ‘글쓰기 페티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적어도 영화에 관해서는 아마도 분명히 그런 것 같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배창호의 〈황진이〉를 페티시 개념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는 착상에서 시작된 글이 ‘글쓰기 페티시’ 테마로까지 번져왔네요.

   그러니, 이에 근거하건대, 저는 이 글을 씀으로써 비로소 어느 만큼은 배창호 감독의 영화 〈황진이〉를 내 것으로 만든 셈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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