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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88. 죽은(인) 아이의 그 뒤

  - 배창호, 〈천국의 계단〉

by 김정수 Mar 20. 2025

C88. 죽은(인) 아이의 그 뒤 - 배창호, 〈천국의 계단〉(1991)

내가 참 좋아하는 배창호 영화

   〈천국의 계단〉은 배창호의 필모그래피에서 제가 참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그래서 여러 번 보았지요. 어쩌면 〈기쁜 우리 젊은 날〉(1987)보다 더 많이 보지 않았나, 싶기까지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천국의 계단〉이 〈기쁜 우리 젊은 날〉보다 더 나은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더러 배창호의 전체 필모그래피에서 베스트 10을 꼽으라면 〈천국의 계단〉은 〈정〉(2000)보다도, 〈황진이〉(1986)보다도, 〈길〉(2006)보다도, 〈적도의 꽃〉(1983)보다도, 〈꼬방동네 사람들〉(1982)보다도, 〈깊고 푸른 밤〉(1985)보다도 뒤에 놓일 것입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정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천국의 계단〉은 단연 거의 첫머리에 놓이는 작품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저는 〈천국의 계단〉을 왜 좋아하는 것일까요? 또는, 〈천국의 계단〉의 어떤 점을 좋아하는 것일까요? 아니, 어쩌면 좋아한다기보다는 그저 ‘끌렸다’라고 하는 편이 더 적확한 표현일까요?

   분명한 것은, 어쩐지 〈천국의 계단〉에는 배창호 감독의 인생철학이 담겨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다른 영화들에서보다 조금 더 짙게 느껴진다는 사실입니다. 적어도 저한테는요.


싱그러움

   〈천국의 계단〉을 이아로와 박찬환의 사랑 이야기나,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다룬 영화로 해석하는 것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천국의 계단〉에서 제가 받은 느낌은 ‘싱그러움’에 더 가깝습니다.

   이 싱그러운 느낌은 〈기쁜 우리 젊은 날〉도 〈안녕하세요 하나님〉(1987)도, 심지어 〈젊은 남자〉(1994)조차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의 싱그러움입니다. 이 점에서만큼은 〈천국의 계단〉이 단연 발군이지요.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저만의 느낌입니다. 다른 분들도 〈천국의 계단〉에서 저처럼 싱그러움을 느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하지만 인생철학이라는 점에서는 사정이 좀 다르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넘겨짚어 봅니다.


살아남지 못하는 아이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바로 〈천국의 계단〉의 아이 역시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괴물〉(2006, 봉준호)에서 송강호의 딸(고아성)이 끝내 살아남지 못했던 것, 〈밀양〉(2007, 이창동)에서 전도연의 아들이 결국 살아 돌아오지 못했던 것, 〈아들〉(2002, 장 피에르 다르덴 & 뤽 다르덴)의 아들이 이미 죽어 있었던 것, 〈아들의 방〉(2001, 난니 모레티)에서 아들이 느닷없이 죽었던 것 등등의 사례들을 반사적으로 떠오르게 합니다.

   심지어는 〈추격자〉(2008, 나홍진)까지도 그 대상이 아이가 아니라는 점만 다를 뿐, 그녀(서영희)가 끝내 살아남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결국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요즘은 양상이 조금 달라졌지만, 돌이켜보면, 21세기의 첫 10년 동안 만들어진 일련의 영화들에서 그렇듯 아이들이 줄줄이 죽어 나갔던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살아남지 못한 것과 살려내지 못한 것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은 ‘아이들’이 아니라 ‘살아남지 못한’이 문제니까요.

   아니, 어쩌면 ‘살아남지 못한’이 아니라 ‘살려내지 못한’이라고 해야 맞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살아남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살려내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는 살려낼 책임이 있는 쪽을 추궁하는 말입니다. 마땅히 살려내야만 하는데도 살려내지 못한 책임―.

   여기서 또 이런 의문이 듭니다. 혹 이것은 살려내지 ‘못한’ 사태가 아니라 살려내지 ‘않은’ 사태가 아닐까, 하는 의문―.

   사실은 살려내지 않은 것을, 살려내지 못한 것이라고, 또는 살아남지 못한 것이라고 면피하듯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정말 큽니다.

   그렇다면 〈천국의 계단〉은요?

   물론 이 영화에서도 아이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 살아남지 못하는 사태의 밑바닥에서 어떤 원리가 일렁이고 있는가를 따져보아야 합니다.

   아니, 그 아이가 살아남지 못함으로써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아니, 이 역할의 의미 또는 결과가 중요합니다.


엄마 조디 포스터

   이쯤에서 조디 포스터 이야기를 조금 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조디 포스터의 눈매에는 불가항력적인 마력이 있습니다. 조디 포스터가 진지하고 심각한 눈빛을 하고 있으면 아무리 마음을 모질게 먹어도 거기에 저항하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아마 그 눈빛은 〈양들의 침묵〉(조나단 드미, 1991)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이후의 영화들에서 조디 포스터는 그 눈빛을 계속해서 갈고 다듬어 더욱 예리한 것으로 만들어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특히 자기 아이(딸이든 아들이든)를 지켜야만 하는 엄마의 눈빛일 때 가장 깊고 푸르고 서늘합니다. 물론 그 자신이 감독을 맡았던 〈꼬마 천재 테이트〉(1991, 조디 포스터)의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요.

   제가 〈패닉 룸〉(2002, 데이비드 핀처)이나 〈플라이트 플랜〉(2005, 로베르트 슈벤트케)을 한 차례씩 더 본 까닭도 바로 그 눈빛 때문이었습니다.

   일단 보기 시작하면 그 눈빛은 도무지 외면할 수 없는 마력으로 저를 사로잡습니다.

   아니, 보지 않을 때도 계속 생각나는 눈빛이라고 해야 할까요.

   하지만 그 눈빛은 결코 당차거나 사납거나 도전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연약하거나 슬프거나 우수에 찬 눈빛이기만 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요령 있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바로 이 설명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저는 조디 포스터의 눈빛에, 그 눈빛의 마력에 번번이 사로잡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를 살려내는 엄마

   물론 난데없이 무슨 ‘눈빛론’을 말하려고 조디 포스터를 끌고 온 것은 아닙니다.

   그저 단순하게 엄마인 조디 포스터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예, 그녀는 엄마로서 자기 아이를 끝까지 지켜냅니다. 〈패닉 룸〉에서도 〈플라이트 플랜〉에서도 엄마 조디 포스터는 끝내 자기 아이를 지켜내고, 기어이 찾아내어 구합니다.

   한데, 그런 일이 왜 우리 영화 속에서는 벌어지지 않는 것일까요. 왜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제가 〈천국의 계단〉을 오랜만에 다시 보기 전까지만 해도 풀 길 없는 의문이었습니다.

   아니, 엄밀하게 따지면 풀린 것은 이 의문이 아닙니다. 이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다만 저는 배창호의 아이는, 그러니까 〈천국의 계단〉의 그 아이는 어쨌거나 죽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천국의 계단〉의 남다른 점입니다.


배창호가 죽인 아이의 그 뒤

   〈천국의 계단〉의 ‘엄마’ 이아로는 ‘자기 아이’를 끝내 지켜내지 못합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의 죽음은 ‘어떤 역할’, ‘어떤 구실’, ‘어떤 기능’을 수행합니다. 바로 이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저는 하려는 것입니다.

   예, 그 아이는 죽지만, 그 죽음으로써 어떤 결과를 빚어냅니다. 저는 이것이 배창호의 인생철학, 또는 영화철학의 어떠함을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 무렵 일련의 한국영화들에서 아이들은 놀랍게도 ‘그저’ 죽습니다. 아니, ‘그저’ 죽기‘만’ 합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의 죽음에는 ‘그 뒤’가 없습니다.

   이 ‘그 뒤’의 정체가 핵심입니다. 어떤 ‘그 뒤’인가?

   그러니까 결국 저는 〈천국의 계단〉이 보여주는 ‘그 뒤’에 끌렸던 것입니다.

   〈천국의 계단〉의 ‘그 뒤’는 놀랍게도 ‘귀농(歸農)’입니다.

   하지만 이 귀농을 도시 생활의 단순 대립 개념으로 간주한다면 많은 것을 놓치게 되리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짓고 사는 것이니, 굳이 이르자면 문자 그대로 귀농이겠지만, 그것은 어떤 이유로든 도시에서 더는 살아갈 수 없기에, 또는 살아가기 싫어서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귀농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런 성격의 귀농을 찬양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천국의 계단〉의 귀농은 ‘그 뒤’로서의 귀농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제가 알기로는, 후무까지는 몰라도 전무한 결말임에는 분명합니다.


죽은 또는 죽인 아이의 ‘그 뒤’

   물론 이것을 안일한, 나아가 해괴한 결말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터무니없고, 난데없고, 어처구니없고, 낯간지러운 결말―. 하지만 이 결말은 ‘그 뒤’로서의 결말입니다.

   배창호는 바로 이 ‘그 뒤’를 실제로 보여준 유일한 감독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 압도적인 싱그러움―.

   저는 거기에서 아마도, 필경은 싱그러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감각적으로’ 또는 ‘정서적으로’ 끌렸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그 아이는 죽음으로써 엄마와 아빠를 결합시켰고, 귀농시켰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아이를 죽였다면 ‘그 뒤’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죽인 ‘그 뒤’는 〈천국의 계단〉과 같은 ‘그 뒤’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니, 저는 이 ‘그 뒤’가 좋다고, 마음에 든다고 말해야겠습니다. 저는 이 ‘그 뒤후’에 끌립니다. 리얼리티와는 무관하게요.

   〈밀양〉의 ‘그 뒤’는 너무 힘겹고, 〈괴물〉의 ‘그 뒤’는 너무 건방지고, 〈추격자〉의 ‘그 뒤’는 너무 난감합니다. 우리는 초인(超人)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Ordinary People)’인 우리는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너무나 지치고 피곤합니다. 한마디로 연약합니다. 리얼리티 같은 걸 따질 여력이 없지요.

   그리고 리얼리티도 리얼리티 나름입니다. 그런 리얼리티만이 리얼리티고, 이런 리얼리티는 리얼리티가 아니라는 명제는 사이비 명제가 아닐까요.

   조디 포스터처럼 아이를 마침내 지켜낼 수 있게 하거나, 그러지 못하고 끝내 죽게 할 양이면 〈천국의 계단〉에서처럼 ‘그 뒤’를 보여 달라는 것이 저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박한 요구입니다. 이처럼 ‘그 뒤’를 보여주지 않을 값이라면 아이를 적어도 함부로는 죽이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아이의 죽음에는 반드시 ‘그 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윤리관이자 소망입니다.

   다시 한번, 바로 이것이 〈천국의 계단〉의 남다른 점이라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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