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즈 야스지로, 〈바람 속의 암탉〉
C90. 잃어버린 계단을 찾아서, 오즈가 계단을 숨긴 진짜 이유 – 오즈 야스지로, 〈바람 속의 암탉〉(1948)
계단이 있다
오즈 야스지로의 1948년 작 〈바람 속의 암탉〉은 계단에서 시작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영화가 시작한 지 불과 4분 15초―자막이 뜨는 시간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고작 2분―만에 계단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에서 계단이 초반부에 이렇듯 다짜고짜 나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실제로, 이 작품에 바로 뒤이은 〈만춘〉(1949) 이후 오즈의 작품에서 또다시 계단을 보기 위해서는 그가 남긴 최후의 작품인 〈꽁치의 맛〉(1962)까지 무려 14년이라는 세월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그 사이에 놓인 오즈의 모든 작품에서 계단은 거짓말처럼 완전히 사라지고 없습니다. ‘계단이 없는 세계’라고 규정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지요.
그렇듯 계단의 이미지가 삭제되고 없는 오즈 영화 속의 가옥 2층을 하스미 시게히코는 ‘붕 떠 있는 2층’이라고 재미있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이 영화에서 계단 이미지는 커트 수로 따지면 무려 스물한 번이나 거듭해서 나옵니다.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고 있거나, 완전히 소실된 것으로 알려진 그의 초기 작품들까지 포함하더라도 아마 그가 만든 모든 작품에 나오는 계단 장면들을 전부 다 합쳐놓은 것만큼이나, 또는 그 이상으로 많은 수가 아닐까, 싶은 정도로 이 영화 속 계단 이미지는 우선 그 출현 빈도에서 압도적입니다. 고의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이 영화는 마치 오즈 영화의 미학을 결여나 삭제, 또는 여백의 개념으로 풀이하려는 도날드 리치나 폴 슈레이더를 위시한 서구의 비평가나 학자들―물론 여기에는 그들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비평가나 학자들도 포함되겠지요―에 대하여 오즈 스스로 자신 있게 반론을 제기하고자 할 때 들이댈 만한 확실한 근거로 특별히 마련해 놓은 작품인 것만 같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적어도 이 영화 앞에서만큼은 오즈 영화에 계단이 없다는 따위 섣부른 헛소리는 아무도 못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관습적인 상징주의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런 이유로 오즈가 그의 나이 45세 때인 1948년에 만든 이 영화 〈바람 속의 암탉〉은 그 바로 다음 작품인 〈만춘〉(1949) 이후의 후기작들과는 물론이고, 그 이전에 만든 작품들 전부를 통틀어 견주어보아도 매우 이질적인 작품인 것만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입니다.
오즈의 영화 세계를 결여를 특징으로 하는 부정형의 언사가 아니라, 과잉의 개념을 매개로 한 긍정적인 언사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하스미 시게히코조차 이 작품의 이질성을 두고서는 ‘항상적인 요소’라는 말의 대립 개념으로서 ‘예외적인 세부’라는 말을 동원하여 표현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인정했지요.
그렇다고 이 영화가 오즈의 작품군에서 차지하는 이질적인 위치가 단지 부단히 등장하는 계단의 이미지로 말미암은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도널드 리치는 아예 구체적인 사례를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병든 아들을 위해 급전을 마련하고자 하룻밤 몸을 판 아내한테 화가 난 남편의 심리를 전등불 밑에서 날개를 파닥이며 날고 있는 나방의 그림자가 그 남편의 얼굴에 어른거리는 것으로 표현한 장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즈는 그렇듯 너무도 뻔히 그 의미가 드러나는 관습적인 상징의 방식으로 인물의 심리를 표현하는 감독이 아니기에 그 자체가 이 작품이 지닌 이질성의 한 근거가 된다는 주장입니다.
상징적인 암시의 기능을 수행하는 거울
심지어 오즈는 이 영화에서 거울을, 그것도 두 번씩이나, 아주 중요한 표현 수단으로 채택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첫 번째는, 영화의 초반부에서 아내가 궁핍한 살림에 보탤 요량으로 기모노를 팔아달라고 친구한테 부탁하러 갔을 때입니다. 친구는 그 기모노를 다시 다른 거간꾼 여인에게 가지고 갑니다.
그 노회한 거간꾼 여인의 방에는 화장대 거울이 놓여 있는데, 그 거울이 놓인 각도가 절묘합니다. 친구가 방바닥에 펼쳐 놓는 아내의 기모노가 정확하게 그 거울에 비쳐 보이는데, 그 거울이 없다면 오즈 특유의 로앵글(다다미 쇼트)의 카메라로는 바닥에 놓인 그 기모노를 제대로 보여줄 방도가 없습니다.
게다가 이 여인은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친구를 상대로 장차 이 아내가 자신의 소개로 몸을 팔게 되리라는 암시를 담은 대사를 내뱉기까지 합니다. 이 순간 거울의 상징적인 암시의 기능은 너무도 단순명쾌합니다.
두 번째는, 아들의 병원비를 마련할 길이 막막하여 고민에 빠져 있던 아내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온 2층 방에서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입니다. 여기에 이어 영화는 막바로 유곽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몸을 팔기로 결심하는 순간 그 아내의 내면 심리를 오즈는 그의 후기작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관습적인 방식으로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 거울은 〈만춘〉에서 결혼 예복을 차려입은 하라 세츠코의 2층 방에 놓여 있던 등신대의 거울과는 그 기능적인 성격이 사뭇 다릅니다.
요컨대 〈만춘〉의 거울은 하라 세츠코의 대응물입니다. 그 거울 자체가 하라 세츠코라고 하면 될까요. 한마디로, 분신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상징이라도 〈만춘〉의 거울은 하나의 엄연한 사물로서 상징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바람 속의 암탉〉의 거울은 거울 자체가 아니라, 그 거울 속에 비추어진 내용으로 상징적인 암시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이를테면, 예언자의 기능이라고나 할까요.
관객은 그 거울에 비친 다나카 기누요의 기모노와 다나카 기누요 자신의 모습에서 장차 다가올 운명의 그림자를 엿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거울은 그 앞에 놓인 존재를 비추어낸다는 거울 고유의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상징을 완성하고, 마침내 예언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해의 소지가 전혀 없지요.
이야기 자체의 선정성
이야기 자체도 예외가 아닙니다.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후방에 홀로 남아 어린 외아들을 돌보며 어렵게 살림을 꾸려가야 하는 아내의 고생담은 매우 흔하고, 또 그러니만큼 진부합니다. 게다가 신파적이기까지 하지요.
그래도 여기까지라면 굳이 이 영화를 그렇게까지 이질적인 작품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 아내가 병든 아들의 병원비를 마련하고자 유곽을 찾아가 몸을 파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물론 아내가 몸을 파는 광경 자체는 조심스럽고 세련되게 피해 가고 있지만, 유곽 내부의 풍경만큼은 서슴지 않고 보여줍니다. 낯설지요.
흡사 미조구치 겐지의 1956년 작 〈적선지대(赤線地帶)〉의 한 대목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청하지 않은 손님의 느닷없는 방문을 당한 듯, 확실히 선정적입니다. 그래서 불편합니다.
한 번의 추락 세 번의 트래킹
하지만 이 불편한 느낌은 뒤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남편이 자기가 집에 없는 동안 아내가 유곽에서 몸을 판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괴로워하다 홧김에 그 아내를 밀쳐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게 만드는 장면의 경악스러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시 진짜 여자 서커스 곡예사를 스턴트맨으로 기용하여 촬영했다는 이 충격적인 추락의 액션은 그 강한 정도의 면에서는 오즈의 영화 세계에서는 문자 그대로 전무후무한 사례입니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심지어 오즈는 이 장면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인 듯 역시 오즈 영화의 세계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남녀 간의 깊은 포옹의 장면을 덧붙이는 배려까지 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화해지요.
이제 더는 돌이키기 힘들겠다 싶을 만큼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지던 부부 사이가 극적으로 간신히 화해에 이르는 것은 바로 이 엄청난 추락의 액션을 빌미로, 또는 계기로 삼아서입니다.
또, 이 영화에는 카메라가 트래킹으로 인물을 따라가며 찍은 장면이 세 차례 나옵니다.
한 번은 아내 다나카 기누요가 병든 아들을 안고 병원을 찾아가는 장면이고, 또 한 번은 다나카 기누요가 친구와 함께 갔던 나들이에서 아들과 바구니를 같이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이며, 나머지 한 번은 남편 사노 슈지가 아내가 아들의 병원비를 마련하고자 몸 파는 일을 했다는 유곽을 찾아가는 장면입니다.
위에 언급한 추락의 액션이 얼마나 충격적인지, 오즈 영화에서는 비교적 드물게 쓰이다가 후기작으로 가면서 그나마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마는 이 트래킹 장면들이 오히려 반가울 정도입니다.
요컨대, 〈만춘〉 이후의 후기작들에 대한 기억만을 가지고 이 영화를 볼 경우, 오즈 특유의 낮은 앵글과 인서트 화면 사용 방식을 제외한다면, 모든 점에서 과연 이 영화가 오즈의 작품이 맞는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분명히 이 작품은 오즈의 영화 세계에서는 차라리 변종이라고 해야 할 만큼 예외적인 특성이 유난히도 두드러지는 작품입니다.
오죽하면 오즈 스스로조차 뒷날 이 작품을 가리켜 ‘지독한 실패작’이라고 말했겠습니까. 적자(嫡子)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뜻밖의 돌연변이라고 하면 될까요.
가시적인 계단, 불가시적인 계단
그렇다고 이 영화가 실패작이라는 오즈의 고백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이 영화를 단호히 버림받은 작품으로 치부하는 것은 섣부른 처사일 것입니다.
트래킹도, 선정적인 소재도, 관습적인 상징주의도 다만 드물게 볼 수 있다뿐이지, 오즈의 영화 세계 전반을 통하여 분명히 관찰할 수 있는 요소들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나기는 했지만〉(1932)에서 아버지한테서 달아나는 귀여운 장난꾸러기 형제를 따라가는 카메라의 트래킹과 〈만춘〉에서 하라 세츠코와 함께 움직이는 카메라의 트래킹은 얼마나 아름다웠습니까.
또, 〈조춘〉(1956)에서 이케베 료와 기시 게이코가 해변의 여인숙에서 저지르는 불륜과 〈동경의 황혼〉(1957)에서 벌어지는 잔뜩 찌푸린 날 한겨울의 죽음은 얼마나 선정적이고 암담합니까.
더불어, 오즈가 〈그 날 밤의 아내〉(1930)나 〈비상선의 여자〉(1933)와 같은 초기작들에서 마치 실험하듯 원용했다는 저 할리우드 장르 영화들의 관습적인 표현기법들은 또 어떠합니까.
계단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오즈 영화 속에 계단의 이미지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가옥의 2층이 정말로 허공에 ‘붕 떠 있다’고 믿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미지가 보이지 않을 뿐, 거기에는 분명히 계단이 존재합니다.
등장인물들은 분명히 계단을 통하여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고, 또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옵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되겠지요.
계단은 거기에 분명히 존재합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불가시적인 계단일 뿐이지요. 소수의 가시적인 계단과 절대다수의 불가시적인 계단의 구분이 있을 뿐입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벌거벗은’ 임금님인 것은 그가 정말로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이 없기 때문이지만, 오즈 영화 속에서 계단이 보이지 않는 것은 정말로 계단이 없기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오즈 영화 속에 계단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감추어 두었던 계단을 오즈는 왜 〈바람 속의 암탉〉에 이르러서 이다지도 빈번하게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일까요?
계단으로부터 시작하는 영화
다시, 〈바람 속의 암탉〉은 계단에서 시작합니다. 다짜고짜 나타나는 계단의 인서트지요.
이 느닷없는 계단의 초반부 출현으로 관객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즈의 영화에서 벌어진 초유의 사태이기 때문입니다. 흡사 관객의 시선 안으로 계단의 이미지가 아무 예고도 없이 짓쳐들어온 형국이지요.
그러나 이 첫 번째 계단은 텅 비어 있습니다. 〈꽁치의 맛〉의 마지막 대목에서도 이와 매우 닮은 방식으로 계단의 인서트가 끼어들지만, 각각의 장면이 관객한테서 불러일으키는 정서의 성격은 서로 상당히 다릅니다.
〈꽁치의 맛〉의 경우는 분명히 막 딸을 시집보낸 홀아버지 류 치슈의 상실감이 기조이겠으나, 〈바람 속의 암탉〉의 경우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는 데서 오는 당혹감이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당혹감의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나 우리가 초반부의 의혹을 속 시원히 해소할 수 있으려면 예의 충격적인 후반부 추락 액션의 장면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우선은 이 의문을 고이 간직한 채 참을성 있게 다음 장면을 기다리는 것이 순서입니다.
내려오는 아내
이 영화는 다나카 기누요가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결정적인 추락 직후 부상 당한 다리로 절뚝거리며 계단을 다시 올라가는 장면으로 끝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내려오는 것은 두 번째 계단 장면이고, 올라가는 것은 스물한 번째 계단 장면입니다.
이 내려오는 장면이 중요한 까닭은, 이것이 첫 번째 계단 장면인 텅 빈 계단의 인서트가 관객에게 던져주었던 당혹감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이로써 미루어 헤아려 볼 수 있는 최초의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내려온다’입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다나카 기누요는 가장 먼저 이 계단을 내려옵니다.
이상한 것은 이 상황입니다.
다나카 기누요는 지금 기모노를 팔기 위한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하지만 오즈는 여기서 다나카 기누요가 계단을 오르는 장면은 삭제하고, 그냥 불쑥 2층 방에 아들을 업고 나타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런 다음 다나카 기누요는 아들을 방바닥에 앉히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층의 바닥에 놓인 카메라는 2층에서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오는 다나카 기누요를 정면에서 비스듬히 올려다봅니다. 다나카 기누요는 화면의 정중앙 윗부분에서 수직 방향으로 똑바로 밑을 향해 내려옵니다.
여기에서 곧장 스무 번째 계단 장면인 결정적인 추락 액션의 상황을 떠올리기는 무리겠지만, 첫 번째의 텅 빈 계단 장면에서 받았던 당혹감이 이제 확실한 불안감으로 새겨지는 것만은 속절없는 노릇입니다.
왠지 계단을 내려오는 다나카 기누요가 발을 헛딛고 넘어져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질 것만 같은 불안감이 드는 것입니다. 시각적으로 분명히 그렇습니다.
이 장면의 구도 자체가 오즈 영화에서는 너무도 생경한 것입니다.
요컨대,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인 것이지요. 이 예감이 중요합니다.
부단히 출몰하는 계단의 이미지들
이제부터 계단의 이미지는 부지런히 출몰합니다.
이야기의 연결만을 위해서라면 굳이 필요가 없을 듯한데도 오즈는 거듭해서 계단을 보여줍니다. 거의 억지스러울 만큼 집요하게 오즈는 계단을 매개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누군가가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가면 곧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는 식이지요. 아니, 누군가가 이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가는 것을 기화로 다음 단계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일종의 연결고리입니다. 꼬박꼬박 그렇게 합니다.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오즈의 영화만 아니라면요.
하지만 이것은 오즈의 영화입니다. 그것도 〈만춘〉의 출현을 코앞에 두고 있는 시점의 작품입니다.
아무리 양보해도 계단의 논리적 필요성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그런데도 오즈는 자꾸만 계단을 끼워 넣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열쇠입니다.
아내가 계단을 내려오면 우환이 일어난다
이 영화에는 모두 스물한 번의 계단 장면이 나옵니다.
이 가운데 누군가가, 또는 뭔가가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은 네 번뿐입니다.
이 네 번 가운데서 세 번은 다나카 기누요의 몫이고, 나머지 한 번은 깡통의 몫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 가운데서 이 계단을 내려오는 액션을 취하는 인물은 다나카 기누요 뿐입니다. 오즈는 그 누구한테도 이 계단을 내려오는 액션의 이미지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나카 기누요가 계단을 내려오는 것은 시각적으로는 불길한 느낌을 주고, 상황적으로는 우환의 매개 또는 결과가 됩니다. 예외 없이 그렇습니다.
아무 일 없이 그냥 내려오기만 하는 것은 첫 번째 경우지만, 이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무턱대고 불길한 느낌을 주는 장면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확실한 우환의 매개 또는 결과입니다.
다나카 기누요가 두 번째로 계단을 내려오는 것은 신열을 앓고 있는 아들의 불덩이 같은 몸을 안고 황급히 병원으로 가기 위해서입니다.
남편 없이 혼자 어려운 형편에서 아들을 키우고 있는 아내의 처지에서는 이보다 더 큰 우환이 없을 것입니다.
앓는 아들을 안고 병원을 향해 힘겨운 걸음을 옮겨놓는 다나카 기누요를 카메라가 트래킹으로 따라갈 때 그 뒷모습에서 관객은 처음 텅 빈 계단의 인서트에서 느꼈던 까닭 모를 불길한 예감이 마침내 현실화되는구나, 싶은 암담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동시에, 앞서 다나카 기누요가 몸을 팔게 되리라는 거간꾼 여인의 암시도 속절없이 떠오르지요.
영화 내내 부단히 배음으로 들려오는 집 주변 공장의 쿵쿵거리는 기계음이 마치 이 애처로운 여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불길한 운명의 발소리인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경우는 아내 다나카 기누요가 화가 난 남편 사노 슈지한테 떠밀려 계단 아래로 추락하는 장면입니다.
이 추락의 액션을 보여주는 오즈의 방식은 사무라이 영화 속의 칼부림 장면보다 더 잔혹하게 느껴집니다. 오즈의 화면 속에서 펼쳐지는 과격한 액션이기에 더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드러누운 자세로 머리가 밑을 향한 채 위에서 아래로 거꾸로 굴러떨어지는 다나카 기누요의 몸뚱이를 목도하는 관객의 마음은 뭐라 형언할 수 없으리만큼 고통스럽습니다.
이 순간 오즈는 처음으로 배우를 향해서 뿐만이 아니라, 관객을 향해서 가학적입니다.
그것은 우선 시각적으로 화면을 수직으로 가르는 추락의 이미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청각적으로는 다나카 기누요의 등판이 나무 계단 한 단 한 단을 차례로 긁듯이 하며 미끄러져 내려오는 쿵쿵거리는 즉물적인 소리의 끔찍함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소리가 고통스럽게 귀청을 두드려댑니다.
깡통의 암시
깡통이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지는 장면은 이 충격적인 추락의 장면 앞에 배치되어, 명백히 장차 이 계단으로 예의 깡통처럼 굴러떨어질 다나카 기누요의 운명을 시각적으로 암시하는 구실을 한다고 새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편의 귀환을 축하해 주려고 집으로 찾아온 친구의 충고대로, 유곽에서 일했던 사실을 굳이 남편한테 밝히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한데도 다나카 기누요는 요령 좋게 피하지 못하고 끝내 이실직고를 하고 맙니다.
이튿날쯤 밤늦게 귀가한 남편은 아내 다나카 기누요의 그 행실을 추궁하다가 홧김에 그만 깡통을 아내를 향해 냅다 집어던집니다. 그것이 잘못되어 아내가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다나카 기누요가 계단 밑으로 추락하리라는 예감은 거의 확신에 가까운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효과적이지만 이 역시 대단히 관습적인 방식입니다.
불길한 느낌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그래도 이 추락은 너무나 충격적입니다.
오즈 영화에서 이런 정도의 강도 높은 액션의 장면을 보게 되리라는 기대를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토 다다오는 오즈가 난폭한 장면을 고의적으로 피한 것은 물론이고, 카메라 앞을 획 가로지르는 동작조차도 배우들에게 허락하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즈는 큰 동작과 격렬한 움직임을 강박적으로 금기시하는 감독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런 오즈의 특성을 감안하면, 설사 다나카 기누요가 계단 밑으로 추락하는 것과 같은 충격적인 액션의 장면을 보게 되리라는 예감이 깡통의 추락을 목도하면서 확신에 가까워졌다고 할지라도 가슴 한구석에는 ‘설마!’ 하는 생각이 남아 있게 마련입니다.
그 설마가 오히려 거꾸로 그 장면을 목도하게 되는 순간의 공포에 가까운 충격을 한층 더 깊이 예감케 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이 영화가 다른 누구도 아닌 〈만춘〉과 〈동경 이야기〉를 만든 오즈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계단의 남편
이제 마침내 남편과 계단이 만납니다.
이것은 남자와 계단의 만남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오즈 영화에서 계단과 가장 관계가 먼 존재가 바로 남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스미 시게히코가 지적했듯이, 오즈 영화의 2층은 여자들의 세상입니다. 하라 세츠코의 방도 2층에 있었지요. 계단은 여자들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계단을 이용할 권리도 1차적으로 여자들한테 있습니다. 남자는 설사 아버지라 할지라도 불청객입니다.
〈바람 속의 암탉〉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영화에서 계단을 이용하는, 그러니까 두 발로 계단을 직접 밟아 오르내리는 액션을 보여주는 인물은 두 명뿐입니다. 다나카 기누요와 그 친구지요. 당연히 둘 다 여자입니다.
심지어 다나카 기누요의 어린 아들도 계단을 자기 두 발로 직접 밟아 오르내리는 모습은 나오지 않습니다. 딱 한 번 오를 때도 엄마의 등에 업힌 채로입니다.
이렇듯 철저한 금남의 지대였던 계단에 남자가 들어섭니다.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남편은 계단으로 불쑥 들어섭니다.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져 실신한 듯 엎드려 있는 아내를 내려다보면서입니다. 계단을 한 단 한 단 밟고 내려서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들어서 있는 것이지요. 오즈는 그냥 계단 중간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편을 보여줄 뿐이고요.
그 남편은 계단을 내려오다가 멈춘 것이 아니라, 무슨 마술쇼에서처럼 그냥 계단 중간에 ‘펑!’ 하고 나타난 것만 같습니다.
이때도 오즈는 남편의 발은 끝내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즈는 이 순간 그 부부를 같은 프레임 속에 담지도 않습니다.
모두 네 컷에 달하는 이 장면에서 남편은 계단 중간에 꼼짝하지 않고 선 채로 아내의 이름을 네 번에 걸쳐 외쳐 부를 뿐입니다.
그러고는 이 장면은 다시 ‘펑!’ 하고 사라져 2층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이상한 것은 이때 남편의 처신입니다.
어색한 남편
남편은 1층 바닥에 부상을 입은 몸으로 신음하며 엎드려 있는 아내한테로 달려 내려가 아내를 부축해주지 않습니다. 어디 다친 데가 없는지 살펴 묻지도 않고요.
그냥 몇 번 아내의 이름만 외쳐 부르다가 아내가 대답하고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다음 2층으로 올라가 버릴 뿐입니다.
물론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남편의 모습은 화면에 안 나옵니다. 어쨌거나 아내가 죽지 않고 살았으니, 그것으로 되었다는 투입니다.
이때 아내를 향한 남편의 호명은 차라리 지금 당장 일어나라는 명령에 가깝습니다.
아내는 그 명령에 복종하여 있는 힘을 다해 일어서려고 합니다.
애처롭기 짝이 없는 장면이지요.
하지만 남편은 그러는 아내한테 어떤 도움도 주지 않고, 그냥 밀랍 인형처럼 꼼짝 않고 가만히 서서 그 모양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기만 하고 있습니다.
이때 주인집 아주머니가 나타나 다나카 기누요에게 괜찮으냐고 묻는데, 물론 다나카 기누요는 남편한테 떠밀려 굴러떨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실수로 발을 헛딛고 굴렀다는 것이지요.
이 변명을 주인집 아주머니는 또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입니다. 아내는 부축을 받아도 시원찮을 다친 몸을 애써 이끌고 부상을 당한 다리로 절뚝거리면서도 혼자 힘으로 허위단심 계단을 오릅니다. 이 광경을 보는 관객의 마음은 몹시 고통스럽고 불편합니다. 너무도 어색한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동양의 완고한 가부장의 정서로 남편의 처신을 해석하는 것은 부질없습니다.
이 어색함은 그런 정서적인 차원의 문제를 넘어섭니다.
이 어색함의 문제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첫 번째 계단 장면의 까닭 모를 불길함까지 고려하여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이 어색함 자체가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오즈가 계단을 보여 주지 않은 진짜 이유
이제 명확히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줄기차게 계단 장면이 나오는 것은 다나카 기누요의 추락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말하자면, 그 순간의 충격을 관객에게 미리미리 대비시키려는 의도인 것이지요.
이 배려는 오즈 영화에서 계단이 나오지 않는 관례를 고려하면 당연한 일입니다.
이 영화의 계단 장면이 특별한 것은 단지 계단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계단을 오르내리는 인물들의 어색한 액션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고스란히 뒤집으면 오즈가 이 영화를 제외한 다른 영화들에서, 특히 후기작들에서 철저하게 계단을 숨긴 이유가 됩니다.
곧, 오즈가 계단을 보여주지 않은 것은 정확히 말하면 계단 자체가 아니라, 계단을 오르는 인물의 동작을 보여주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일본식 가옥의 1층과 2층을 연결해주는 계단은 언제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거나,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식으로 찍을 수밖에 없습니다.
양쪽 벽으로 계단이 가로막혀 있는 탓에 그 계단을 옆에서 찍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굳이 찍겠다면 벽을 뜯어내고 마치 투명한 거울을 통해서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으로, 그러니까 일종의 가상의 벽을 설정하고 찍어야 합니다.
하지만 오즈는 그런 식의 편법을 동원해 영화를 찍는 감독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런 식의 편법을 동원하지 않고 굳이 오르내리는 인물을 찍으면 무엇보다도 그 모습 자체가 대단히 불안정하게 보일 것입니다.
올라가는 인물의 경우는 엉덩이만 보이고, 내려가는 인물의 경우는 정수리만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 앞사람을 꼿꼿이 올려다보거나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행위는 일종의 비례(非禮)입니다.
그래서 남녀가 차례로 계단을 오르는 경우에는 남자가 앞서 올라가고, 여자가 그 뒤를 따라서 올라가는 것이 일반적인 에티켓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오즈 야스지로는 계단을 보여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보여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한테 밑에서, 또는 위에서 함부로 카메라를 들이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다다미 쇼트’를 ‘인간 존중의 쇼트’라고 할 때 그런 쇼트를 생애를 통틀어 일관되게 채택했던 오즈가 어찌 감히 계단을 오르는 사람의 엉덩이나 정수리에 똑바로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는 비례를 저지르겠습니까.
이것이 오즈가 영화 속에서 계단을 숨긴 진짜 이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