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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89. 타인을 돕는 마음의 영화

- 앤드류 니콜, 〈가타카〉

by 김정수

C89. 타인을 돕는 마음의 영화 - 앤드류 니콜, 〈가타카〉(1997)

때 이르게 도착한 영화

과학의 발달이 결코 인류의 행복을 온전히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자명해져 있는 지금,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요?

‘그래도 역시’ 과학일까요? 아니면 ‘그래도 여전히’ 종교일까요? 이도 저도 아니라면 휴머니즘일까요? 또 아니면, 숫제 의지라는 걸 할 생각을 접어야 할까요?

〈가타카〉는 개봉 시기(1997년)를 기준으로 보아 다소 때 이르게 도착한 영화였다는 느낌이 짙습니다.

당시를 새삼 돌이켜보면, 아직은 〈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1991, 제임스 카메론)의 흥분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시점, 또는 감독판으로 재개봉한 〈블레이드 러너〉(1982, 리들리 스코트)의 매혹에 다시금 사로잡히던 시기, 또는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1977) 시리즈의 새로운 트릴로지를 만들어 세상에 선보이기 직전, 그간 진일보한 CG 기술로 새로이 손질한 기왕의 3부작으로 일종의 전야제를 진행하던 무렵, 아마 그 어느 어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 생각에 〈가타카〉는 참 뜬금없이 출현한 SF였습니다. 에단 호크와 우마 서먼이 아니었다면 굳이 시간을 들여서 보았을까 싶은 영화였지요.

더하여, 흥행은 저조했으나, 〈에일리언 3〉으로 그 시리즈의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을 보여준 데이비드 핀처 정도의 지명도라도 있었다면 혹 모를까, 앤드류 니콜이라는 신인 감독의 이름은 제게 생소함을 넘어서 퍽이나 심드렁한 기표였습니다.

물론 앤드류 니콜은 바로 이듬해에 나온 〈트루먼 쇼〉(1998, 피터 위어)의 각본을 썼고, 스티븐 스필버그와 〈터미널〉(2004)을 함께 작업했으며, 〈시몬〉(2002), 〈로드 오브 워〉(2005), 〈인 타임〉(2011) 등으로 나름의 필모그래피를 쌓아나가긴 했지만, 아직은 아니었습니다.

하여튼 그때 저한테는, 기타노 다케시까지 출연시키고서도 그토록 시시껄렁한 비주얼―스토리나 메시지가 아니라!―로 저를 실망시켰던 〈코드명 J〉(1995, 로버트 롱고)의 재판(再版)이 아닌가 싶은 우려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실제로 〈가타카〉에는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 ‘액션’이 없습니다. 이렇다 할 총격전도, 공중전도, 격투 장면도 없고, 기계공학적인 매력을 자랑하는 로봇과 같은 미래의 문물이 등장하지도 않지요. 비주얼이 아주 눈부시지도 않고요.

한 마디로 〈가타카〉는 제게 별 매력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시각적으로는요.

물론 이것은 사이비 진술일 수 있습니다. 실은 제가 별 매력을 못 느낀 것입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제가 진짜 매력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라고 해야 옳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보물찾기 놀이에서 한참 시간이 지나도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는 굼뜬 어린아이처럼요.

처음에 〈가타카〉는 제게 그런 영화였습니다.


한 번 더 찾아온 영화

그래도 〈가타카〉는 운이 좋았습니다. 이 영화는 제게 한 번 더 찾아왔으니까요. 아니, 이 또한 정확한 진술이 아닙니다. 제 쪽에서 이 영화를 한 번 더 찾았다고 해야 합니다.

어쩌면 저는 첫 번째 만남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느꼈던 것일까요. 왜 다시 찾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해 낼 자신이 없다고 하는 편이 더 옳겠습니다.

그저 이 영화의 무엇인가가 저를 잡아끌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 좀처럼 잊히지 않는, 그러면서도 좀처럼 그 의미가 해독되지 않는 악몽의 한 자락처럼요.

그러니 운이 좋은 쪽은 〈가타카〉가 아니라, 저라고 해야 옳겠습니다.

하여튼, 어느 쪽에서도 더는 문전박대가 없었습니다.

또 한 가지, 과학기술의 발달이 조장하는 ‘어떤’ 근미래에 대한 우려나 근심이 적어도 여기에 일정 부분 관련되어 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진짜 핵심은 아닙니다.


예의, 윤리, 마음

예, 저는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문득 ‘예의’나 ‘윤리’나 ‘마음’과 같은, 일견 지극히 ‘비과학적인’ 단어들을 떠올렸다는 사실을요.

신기하게도, 이 단어들이 떠오르면서 〈가타카〉의 주제에 대한 저만의 생각이, 이제야 비로소, 깔끔하게 정리되었습니다. 최초의 근접조우 뒤로 꽤 긴 시간이 흐른 셈입니다.

감독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비평가들의 견해야 어떻든, 이제부터 〈가타카〉는 제게 ‘예의’의 영화요, ‘윤리’의 영화이며, 나아가 무엇보다도 ‘마음’의 영화입니다.

저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하려고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소망의 성취

〈가타카〉의 질문은 한 가지입니다. 아무도 이것을 오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무사히 자기 소망을 이룰 수 있을까?’

여기서 ‘그’는 에단 호크이고, 그의 ‘자기 소망’은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이었던 이소연처럼 당당히 우주인으로 선발되어 로켓을 타고 대기권 밖 저 멀리로 날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에 현혹되면 두 가지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하나는, 이 영화를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또 하나의 판본으로 해석하지 않은 채 그냥 넘어가는 실수고, 다른 하나는 ‘무엇이’ 그의 우주비행을 최종적으로, 또 정말로 실현해 주었는가, 하는 점을 간과하고 넘어가는 실수입니다.

첫 번째 실수는 ‘공식적으로’ 불가능해졌습니다. 전문가―여기서 ‘전문가’는 평론가가 아니라 과학자를 가리킵니다―들이 아주 친절하게 〈가타카〉를 ‘그렇게’ 해석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 자료를 뒤적이는, 또는 검색하는 정도의 부지런함만 있다면 이 실수는 이제 아무도 저지르지 않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영웅 스토리에 대한 오해와 다섯 가지의 도움

문제는 두 번째 실수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오해의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임신 출산의 과정을 통하여 ‘신의 뜻대로’ 열등한 유전인자‘도’ 지닌 채 태어난 ‘신의 아이’인 그가 ‘인위적으로’ 우등한 유전인자‘만’ 지닌 채 ‘기술적으로’ 태어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우주비행에 성공하는 것을 그 자신의 부단한 노력과 의지의 결과라고 해석하는 것이 바로 그 오해의 내용입니다.

여기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식의 처세론이나 운명론까지 덧붙이면 이 오해가 완성됩니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웅 스토리지요. 또는 일종의 입지전이라고 하면 될까요.

하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오해입니다.

그가 우주비행에 최종적으로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에는 다섯 사람의 ‘결정적인’ 도움이 ‘있었습니다’. 또는 ‘필요했습니다’. 또는 ‘이바지했습니다’.

한 사람은 그 우주비행 프로젝트의 책임자요, 한 사람은 자기의 신분과 신체정보를 그에게 ‘대여’해준 인물이요, 한 사람은 애인이요, 한 사람은 신분과 신체정보를 검색하는 연구원이요, 마지막 한 사람은 친동생입니다.

이 다섯 사람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니, 그들의 도움 가운데 하나라도 빠졌더라면 그는 자기 소망대로 우주로 날아갈 수 없었습니다.


성공의 핵심 비결

이 과정을 찬찬히 살펴보면 실상 그의 개인적인 노력과 의지는 부차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개인적인 노력과 의지가 성공의 가장 핵심적인 비결이라고 주장하기에는 그가 받은 다섯 사람의 도움, 또는 다섯 가지의 도움이 너무나 큽니다. 또는 너무 많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인간적으로 매우 착하거나 매력적이어서 사람들로부터 턱없이 동정심이나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도 아닙니다. 또, 자기를 도와준 사람들에게 무엇으로든 넉넉하게 보답할 수 있을 만큼 그에게 사회적인, 또는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도 그 다섯 사람은 그를 자발적으로, 남몰래, 직간접적으로, 마침내 돕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지성이면 감인(感人)인 것일까요?

여기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누군가가 나를 돕는다면, 그것이 과연 내가 그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그 누군가가 판단했기 때문일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진짜 도움이 아닐 것입니다. 적어도 그것은 ‘나를’ 돕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도움이라면 그것은 그 누군가가 ‘그 스스로를’ 돕는 것 아닐까요.

그러니까 도움이 진짜냐 가짜냐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항상 그 최종적인 대상이 누구냐 하는 것 아닐까요.


진짜 도움의 정체

내가 누군가를 돕는다고 할 때 그 도움에 결국은 나를 위한 타산이 섞여 있다면 그것이 과연 온전하고 순정한 도움일까요.

도움은 그저 눈 딱 감고 ‘그냥’ 돕는 것이 진짜 도움 아닐까요.

여기에는 오로지 돕고 싶은 마음만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인지상‘정’이나 측은지‘심’이라는 말을 갖다 붙여도 좋습니다. 이 ‘정(情)’이나 ‘심(心)’이 핵심이라는 말을 저는 하고 싶은 것입니다. 동병상련이라고 해도 크게 불만은 없습니다.

물론 가짜 도움도 ‘진짜로’ 도움이 될 수는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도움은 도처에 널려 있지 않습니까.

그 도움이 그 도움을 실제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진짜로 돕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것이 진짜 도움인지 가짜 도움인지를 그 도움을 받는 사람은, 신기하게도, 본능적인 예리한 촉으로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실질적인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그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도움을 자기한테 베풀어준 사람을 향해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도움이 가짜라는 것을 그 도움을 받는 사람이 문득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 경우에는 아무리 많이, 아무리 거듭 도와줘도 그 도움을 받는 사람의 속마음을 그 도움을 주는 사람이 얻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비근한 보기를 들면, 선거에 출마한, 또는 앞으로 출마할 생각이 있는 사람이 장차의 표를 의식해서 계산속으로 베푸는 도움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런 것도 실질적인 도움은 될 수 있겠지만, 그 도움을 받는 쪽에서 그 도움을 베푼 쪽에 속마음을 내어줄 수 있을 만한 도움은 못 될 것입니다.

이것이 도움의 엄정한 윤리학, 또는 심리학, 또는 경제학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가타카〉는 바로 이 진짜 도움의 정체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영화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는 자기 소망대로 우주로 날아가면 그만입니다.

그들이 그런 그를 도와주었다는 것은 그들이 그에게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그들 마음의 아름다움이 놓여 있다고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다섯 가지의 도움을 하나하나 엄정하게 따져보면 나름의 편차들이 드러나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그저 그냥’ 그를 도왔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저 그냥 도왔기에 끝까지 도울 수 있었던 것이지요.


희망의 미래, 그 진짜 비결

이 도움, 이 마음이 어쩌면 미래를 디스토피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 아닐까, 하는 생각―. 바로 이것이 제가 이 영화를 두고 하고 싶은 말입니다.

저는 과학의 발달이 인간의 행복과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복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마음의 사태들을 과학은 계속 삭제하거나 제거하는 방향으로 흐른다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 또는 마음으로만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과학에 떠맡기는 것은 일종의 직무 유기요 책임 전가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직무 유기와 책임 전가는 마음의 상실을 낳습니다. 저는 이런 사태가 우려스럽습니다.

물론 마음은 불완전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의 불완전함에 견준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한데도 세상은 마음의 불완전함보다는 차라리 과학의 불완전함을 더 신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이미 마음은 언제나 부차적인 것이 되어 있고, 속절없는 차선책이 되어 있습니다.

법에도 제도에도 마음이 끼어들 틈은 이미 없어 보입니다. 또는, 아주 매우 제한되어 있는 듯합니다.

이것이 이 영화가 새삼 저한테 던져준 생각할 거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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