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파브로, 〈아이언 맨〉 & 기타
C84. 정체성의 교란, 변화의 질적 편차 - 존 파브로, 〈아이언 맨〉(2008) & 기타
개과천선의 원리
인간은 변할 수 있을까요? 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변한 뒤의 인간은 변하기 전의 인간과 정말 다른 것일까요?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변했다면 무엇이 변한 것일까요?
〈아이언 맨〉은 한 인간의 개과천선을 다룬 영화다, 라고 하면 ‘이게 무슨 뜬금없는 정의인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분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어떤 계기로 개과천선한 뒤, 그러니까 변한 뒤 스스로 ‘로봇’(!)이 됩니다. 그 변화는 신무기를 만들어 팔아 돈을 버는 삶에 대한 반성입니다.
요컨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 그를 ‘아이언 맨’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이 ‘아이언’은 옛날로 치면 장수들이 입는 ‘갑옷’과 같은 것이니, 대놓고 이를 로봇이라고 부르는 데는 어폐가 있습니다. 그래도 로봇 말고 더 적당한 어휘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니면, 트렌드를 따라서 그저 AI라고 해야 할까요.
아닌 게 아니라, 이 ‘아이언 맨’식의 ‘착용 로봇’(suit!) 개념이 실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지도 벌써 한참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실전에서, 또는 산업현장에서 이런 식의 착용 로봇이 활약하게 될 날이 머지않은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이와 관련한 유명한 실례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바로 〈에일리언 2〉(1986, 제임스 카메론)의 시고니 위버가 에일리언의 수괴인 그 끔찍한 어미(!)를 일대일로 맞짱 떠 물리치는 마지막 장면에서 선보인 그 기계공학적 매력으로 빛나던 착용 로봇 말입니다.
정체성의 변화
하지만 저는 지금 그런 기술적인 진보에 대하여 말하고자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개과천선하여 스스로 아이언 맨이 되어버린 그(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변화’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변했습니다. 그가 아이언 맨이 된 것 자체도 변화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선행하는 더욱 근본적인 어떤 변화, 또는 무엇의 변화를 저는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은 그가 아이언 맨이 되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변했기 때문에 그 아이언 맨은 선한 일을 합니다.
그러니까 아이언 맨의 전제조건이 그 변화, 곧 개과천선인 것이지요.
변하지 않은 아이언 맨은 문자 그대로 쇳덩이 인간, 다시 말하면 인간 쇳덩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쇳덩이일 뿐입니다. ‘그냥 쇳덩이’ 또는 ‘그저 쇳덩이’는 위험합니다.
이 경우는 ‘정체성이 바뀌었다’라는 말이 어지간히 들어맞는다는 느낌입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기다렸다는 듯 떠오르는 영화들이 몇 편 있습니다.
기억의 상실
먼저, 폴 버호벤의 포스트모던한 영화 〈로보캅〉(1987)이 있습니다.
로보캅은 아이언 맨과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로보캅의 그도 변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합니다. 그는 분명 변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을 대놓고 그저 변했다, 또는 정체성이 바뀌었다고 말하고 넘어가기에는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자기 정체성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중에는 사정이 달라지지만, 어쨌거나 그는 바뀌었으되 스스로 자기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기억을 잃은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경우 바뀌었다는 것은 적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로보캅의 경우는 바뀌지 않았다는 말이 어느 면에서는 더 적확합니다. 어쨌거나 그의 본성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이 아이언 맨과 견주어볼 때 결정적인 차이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로보캅이 된 뒤에도 그의 타고난 ‘선한’ 본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본성이 자기의 것인지, 아니면 로봇의 것인지를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점이 다를 뿐이지요.
어쨌거나 그는 ‘여전히’ 선합니다.
반면, 아이언 맨은 ‘여전히’ 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그 결과는 똑같이 선합니다. 그래서 다행이지요.
투명인간의 원리
또 하나는 〈할로우 맨〉(2000)입니다. 공교롭게도 감독은 ‘여전히’ 폴 버호벤입니다.
이 경우는 로봇 개념과는 다르지만, 투명인간이 된 그의 변화에 대하여 언급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도 변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변하지 않은 채로 투명인간이 됩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투명인간이 된 그는 변하기 시작합니다. 겉보기에 그것은 분명히 변화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그의 본성 자체가 변했다기보다는 그의 본성 가운데 ‘악한’ 부분이 극단적으로 표출되었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요.
요컨대 그는 투명인간이 되고 나서 본격적으로 악해지기 시작합니다.
아니, 역시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그가 스스로 마음껏 악해지기로 한다고 말하면 될까요.
기실 선하고 악한 것은 본성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의지의 문제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선하기로 결심하지 않는다면, 선하려는 의지를 발휘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결코 선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을 그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악하기로 결심하지 않는다면, 악하려는 의지를 발휘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결코 악하게 살 수 없습니다.
선이나 악이나, 어느 지점에서부터는 본성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가 됩니다.
요컨대, 본성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자신이 선한 본성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로보캅이 ‘로봇으로서’ 기계적인 통제를 당하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본색의 표출
말하자면, 〈할로우 맨〉의 경우, 그는 이 의지의 조절 필터가 망가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엄밀히 말해서 변한 것이 아니라고 해야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투명인간이 되기 전의 그와 투명인간이 되고 나서의 그, 그러니까 투명인간으로서 그는 분명히 서로 다른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다르다는 점에만 착안하면 그는 분명히 변했다고 해야 맞습니다.
하지만 그저 변했다고만 하고 말기에는 뭔가 모자란 느낌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투명인간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해야 옳은 듯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뭔가 바뀌긴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본성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그 바뀐 뭔가가 그의 본색을 비로소 드러나게 한 것입니다.
물론 말로만 하면, 아이언 맨도 뭔가가 바뀌었고, 그 바뀐 뭔가가 그의 선한 본색을 드러나게 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어쩐지 말장난 같습니다.
본색이 드러났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할로우 맨에게는 어울리지만, 아이언 맨에게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를 ‘정체성의 교란’이라고 명명하면 어떨까 싶기는 한데, 글쎄요.
뇌 이식의 원리
마지막으로 사노 토모키의 〈변신〉(2007)이 있습니다.
〈하나와 앨리스〉(2004, 이와이 슌지)의 아오이 유우와 텔레비전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2006, 타케우치 히데키 외)의 타마키 히로시가 공연한 작품이지요. 소재가 특이합니다. 뇌 이식이니까요.
일단 뇌 이식이라고 말해놓고 나서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습니다.
정체성의 소재(所在)가 어디냐고 물을 때 뇌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는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누군가의 몸에 다른 사람의 뇌가, 기계공학적으로 말하면, ‘부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그 부피 또는 체적의 크고 작음을 기준으로 하면 뇌가 몸에 부착되는 것이지만, 정체성을 기준으로 하면 몸이 뇌에 부착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주(主)는 뇌요, 종(從)이 몸인 것이지요.
한데, 이 영화가 정말 특이한 것은 그저 뇌 이식만이 소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서 외과수술로 이식되는 뇌는 뇌 전체가 아니라 우뇌(!)입니다.
그러니까 이를 물리적으로 단순하게 계산하면 ‘몸과 좌뇌로 이루어진 쪽’이 ‘그저 우뇌뿐인 쪽’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해야 맞습니다.
주인집에 방 하나를 임대하여 사는 세입자의 경우라고나 하면 될까요.
하지만 집이라면 주인과 세입자의 주종관계가 뚜렷합니다. 헷갈릴 까닭이 없지요.
하지만 이렇게 본다면, 마치 장기이식의 경우처럼, 몸과 좌뇌 쪽이 주이고, 우뇌 쪽이 종이 되어 주종관계의 역전 따위는 이루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본성의 변화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일종의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기’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이식된 우뇌가 좌뇌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몸과 좌뇌로 이루어진 그를, 또는 그의 전체를 우뇌가 지배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곧, 이 우뇌는 이 우뇌와 이 우뇌가 들어 있던 몸으로 이루어진 누군가를 가리키며, 이 누군가가 그를 지배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이 누군가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 경우는 정체성의 ‘교체’라고 하면 될까요.
몸은 그대로인데, ‘사람’이 바뀌는 것이니까요. 몸은 그인데, 정신은 온전한 그가 아닌 것입니다.
한데, 여기서 이 영화의 설정―물론 〈변신〉의 원작은 〈비밀〉(2002, 다키타 요지로)의 원작자인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동명의 소설입니다. 그러니까 이 설정은 원작 소설의 설정이지요―은 일종의 선악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착하고 얌전했던 그가 뇌 이식을 경계로 포악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뇌 이식을 받고부터 그는 그 우뇌의 소유자가 지니고 있던 성격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고 하면 될까요. 그래서 포악한 우뇌가 얌전한 좌뇌를 지배하는 것이지요.
이런 경우 왜 꼭 얌전하고 착한 쪽이 포악한 쪽의 지배를 받는 식의 구성을 취해야 하는가는 의문이지만, 이쪽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드라마틱하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하긴, 얌전한 쪽이 포악한 쪽을 지배한다면 현실적으로는 긍정적이지만, 드라마로서는 얼마간 긴장감이 떨어져 심드렁할 테니까요.
물론 둘이 행복하게 조화되는 경우도 가능성으로서는 상상해 볼 수 있겠지만, 왠지 한가로운 헛수고, 시간 낭비처럼만 여겨집니다.
그러니, 우선 이 영화의 설정을 인정하기로 해야겠습니다.
〈변신〉의 그는 본성 자체가 변합니다. 이 경우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물론 영화는 이 변화의 결정적인 국면을 마지막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의 반전은 아오이 유우를 위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아니, 아오이 유우를 캐스팅한 것은 처음부터 그런 반전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아니, 그런 반전을 바꿀 생각을 애초부터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해야 더 옳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덕분에 이 영화는 사이코 스릴러에서 그런대로 정서적인 감응이 있는 멜로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당연히, 이를 해피엔딩으로 볼 것인가 아닌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변화의 질적 편차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그저 변화라고 하면 〈아이언 맨〉도 〈로보캅〉도 〈할로우 맨〉도 〈변신〉도 모두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떤 지점을 경계로 삼아 그들 모두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따져보면 그들의 변화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음이 드러납니다.
〈아이언 맨〉의 변화는 일종의 개과천선인데, 착한 본성의 발현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습니다.
〈로보캅〉의 변화는 정체성의 변화지만, 본성의 변화는 아닙니다.
〈할로우 맨〉의 변화는 악한 본성의 발현이지만, 정체성의 변화라고까지 하기는 어렵습니다.
〈변신〉은 분명한 정체성의 변화지만, 악한 본성의 발현은 아닙니다.
이 변화의 질적 편차들이 몹시 흥미롭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