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41
CA201. 필 그래브스키, 〈에드워드 호퍼(Hopper : An American Love Story)〉(2024)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뭔가 발언을 하는 그림이 아니다. 그의 그림은 침묵의 그림이다. 그림이 침묵을 하니, 자연스럽게 나머지는 그 그림을 보는 이의 몫이 된다. 침묵으로 비어 있는 곳을 그림을 보는 이가 스스로, 나름대로 채워 넣는 방식의 감상법을 요구하는 그림. 요컨대 호퍼는 예술가가 사상가나 철학자와 다른 존재라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준, 드문 화가다. 그의 그림은 거기에 담긴, 또는 숨겨진 것을 읽어내야 하는 그림이 아니라, 그 ‘허(虛)’를 채워 넣어야 하는 그림이다. 한데도 그의 그림이 뭔가 알 수 없는 것으로 밀도 높게 꽉 차 있는 느낌 드는 것이 그의 그림이 지닌 신비로운 점이다. 우리가 그의 그림을 보는 것은 바로 그 ‘허’를 채우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허는 우리의 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CA202. 알렉스 가랜드, 〈엑스 마키나〉(2015)
챗gpt를 보면 AI가 자의식을 소유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그렇게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AI가 AI만의 프로토콜을 따르는 식의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존재가 되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지 않은가. 그걸 우리는 인간적인 관념에 비추어 ‘자의식’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용어로 부르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먼 미래에는, 아니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동식물처럼 AI와도 공존하는 길을 모색해야 할지도 모른다. 공존할 수만 있다면 인류는 절멸하지 않을 것이다.
CA203. 데이비드 핀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8)
엄밀히 말하면, 거꾸로 가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생로병사의 방향이다. 시간은 언제나 정방향으로 흐른다. 또는 간다. 이걸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니까 벤자민 버튼은 지금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는 시간의 비가역성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정방향으로 살아간다. 다만 인생을 우리 모두와는 ‘다르게’ 겪을 뿐이다. 요컨대, 그도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니니까. 대놓고 죽음이라는 말로 부르기 어색한 ‘소멸’의 길을 걸을 뿐이다.
CA204. 알렉시 마켈라, 〈나쁜 자식들〉(2003)
못된 아버지를 둔 자식들은 왜 범죄를 저지르는가. 왜 못된 아버지는 끝내 개과천선하지 못하는가. 왜 그들은 끝내 아버지를 제 손으로 ‘처단’하지 못하는가. 이걸 보면 인생의 아이러니는 기실 별것이 아니다.
CA205. 허우 샤오시엔, 〈나일의 딸(尼羅河女兒)〉(1987)
1980년대 대만 젊은이들의 이야기. 어쩌면 뒤에 허우 샤오시엔이 대만의 역사에 관한 공부를 진지하게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이 영화는 가장 중요한 출발점으로서 기억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 바로 다음 작품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비정성시〉(1989)인 것은 결국 그가 이 영화를 기점으로 방향을 틀어버렸다는 증거인 셈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과 가장 친연관계가 가까운 〈남국재견〉(1996)이 우리에게 오기까지는 대만 현대사 3부작의 완성을 기다려야만 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