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My Cinema Aphorism_40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40

by 김정수

CA196. 일리아 나이슐러, 〈노바디〉(2021)

〈범죄도시 2〉(2022, 이상용)의 시내버스 안 격투 장면과 이 영화의 시내버스 안 격투 장면의 상동성과 상이성. 일대일 격투와 일대다 격투. 버스 안은 밀폐공간이고, 비좁은 공간이다. 적어도 격투를 벌이기에는. 그래서 대개는 서부영화의 결투 장면이 실내가 아닌 실외에서 벌어지듯이, 그러니까 건맨들이 결투를 하기 위해서 실내를 벗어나 밖으로 나가듯이, 버스 안에서 버스 밖으로 나가야 맞다. 하지만 이 두 영화에서 두 사내는 똑같이 격투를 벌이기 위해 비좁은 밀폐공간인 버스 안으로 한사코 들어가(오)고야 만다. 이는 필연적이라기보다는 매우 의도적인 행위다. 바야흐로 늙어가는 아들과 이미 완전히 늙은 그의 아버지가 함께 총을 잡고 매우 다수의 적을 상대한다는 설정의 판타지스러움과 모험스러움. 전직에서 은퇴한 이들의 공통된 소망이 ‘노바디’가 되는 데 있다는 걸 숫제 제목으로 강조하는 영화. 그들이 격투를 선택하는 것은 ‘노바디’이고자 하는 소망이 침해되거나 방해받을 때다. 〈존 윅〉(2014, 데이비드 레이치 & 채드 스타헬스키)의 존 윅(키아누 리브스)도 마찬가지였다. 그 소망은 ‘섬바디’가 되고 싶은 욕망보다 훨씬 더 깊고 강렬한 것이다. 대개 싸움을 거는 쪽에서는 이걸 잘 모른다. 그들이 당하는 낭패는 따라서 자초하는 것이다.


CA197. 이정욱, 〈국화꽃 향기〉(2003)

왜 엄마가 병들어 세상을 떠나면 그 뒤에 꼭 ‘외동딸’이 아빠와 함께 남는 것일까. 이 영화도 마지막 국면에 접어들면서 기어이 과도해지고 만다. 그런데도 정작 1980년대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강도는 넉넉하지 않은 느낌이다. 이 이상한 불균형, 또는 부조화―. 어쩌면 이것이 이 영화가, 또는 이 스토리가 관객에게 정서적으로 깊이 감응되지 못하는 원인이 아닌지. 아니면, 제목이 지나치게 낭만적인 걸까.


CA198. 현남섭, 〈굳세어라 금순아〉(2002)

금순이는 굳세지 않다. 세상이 그녀를 자꾸만 굳세게 만드는 것이다. 그녀는 굳세어지고 싶지 않다. 하지만 굳세어져야 한다. 그래서 그녀는 괴롭다. 그건 어쨌거나 자기 본성을 거스르는, 자기 배반의 제스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해진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적어도 금순에게는 그렇다. 그러니 어찌 이 세상이 살 만한 세상이겠는가. 적어도 그녀한테는.


CA199. 요제프 파레스, 〈깝스 KOPPS〉(2002)

그들은 왜 무료함을 견디지 못할까. 이는 어쩌면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끊임없이 할리우드 스펙터클의 기억을 끌어들인다. 〈다이 하드〉(1988, 존 맥티어넌) 시리즈와 〈람보〉(1982, 테드 코체프) 시리즈의 그늘이 그들에게는 분명히 드리워져 있다. 그러니 평화를 그들은 어느덧 견디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정부에서 범죄가 없다는 이유로 그들의 직장을 폐쇄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이미 그들은 그 상태를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다다라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를 정작은 할리우드 영화의 폐해에 관한 알레고리로 읽는 것은 그리 심한 오류는 아닐 터이다.


CA200. 김현성, 〈나비〉(2003)

여러 장르를 합성할 때도 특정한 하나의 장르를 분명한 중심 줄기로 세워놓아야 한다는 교훈―. 더불어 이 영화의 또 하나의 허물은 두 주연 배우의 캐스팅이 아닌지. 비장한 사랑을 표현하기에 그들의 이미지는 지나치게 코미디 쪽으로 기울어 있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삼청교육대의 참상을 고발하는 영화라고 보기에도 이 영화는 지나치게 드라마성이 강한 느낌이다.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이 주제라면, 그것을 형상화하기에 이 영화는 시멘트 반죽 없이 벽돌을 쌓아 올린 듯한 위태로움이 그 전편에 스며들어 있는 느낌이다. *

keyword
이전 09화My Cinema Aphorism_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