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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Cinema Aphorism_42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42

by 김정수

CA206. 허우 샤오시엔, 〈남국재견(南國再見, 南國)〉(1996)

장 르누아르의 색채 영화 〈풀밭 위의 오찬〉(1959)에 나오는 오토바이 롱테이크의 아름다운 인용. 허우 샤오시엔의 카메라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영화. 그래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롱테이크의 귀함과 반가움. 그가 마침내 대만의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 더불어 젊은이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강한 비트의 음악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 이러한 일련의 변화만으로도 중요한 영화라는 것. 하지만 영화 속에 나오는 젊은이들의 무모한 인생과 그 인생의 비극적인 전망은 〈밀레니엄 맘보〉(2001)에서 또다시 변모를 겪게 되는 태도로서 주목할 만하다는 것.


CA207. 박기용, 〈낙타(들)〉(2002)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만남이 파탄 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아니, 어쩌면 바로 그렇기에 그들은 파탄을 막기 위한 단 한 가지 단서를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물론 그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상대방한테도, 그들을 ‘훔쳐보고’ 있는 관객들한테도. 소재가 상투적임에도 이 영화가 유의미한 것은 바로 그 파탄을 과감히 용인한 덕이다. 파국을 피하지 않는 용기는 언제나 가상한 것이니까.


CA208. 닐 라뷰트, 〈너스 베티〉(2000)

캔자스. 오즈의 마법사. 여행. 정신 착란, 또는 착각, 또는 망상, 또는 오해.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꿈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다. 아메리칸 드림이란 바로 이런 온갖 악조건을 딛고서라도 기필코 성취해야만 할 목표인 까닭이다. 그것은 필연이다. 베티는 ‘너스’가 아니지만 끝내 ‘너스’ 되기의 꿈을 이룬다. 그녀는 단지 끝까지 그 꿈을 잃지 않았을 따름이다. 잃지 않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잃지 않아져서 간직하고 있었을 따름인데도 그 꿈은 이루어진다. 중요한 것은 꿈과 그녀 사이의 연결 상태가 지속되었다는 점. 곧, 그 지속이 꿈을 이루게 한 비결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강점은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온갖 환상의 실체가 본모습을 드러낸다는 설정에 있다. 각성과 꿈의 성취가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독특한 점.


CA209. 아벨 페라라, <뉴 로즈 호텔>(1998)

원작 윌리엄 깁슨. 왜 아벨 페라라의 영화를 볼 때면 어느 만큼은 사기를 당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하지만 적어도 그의 영화에 끝까지 사기를 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는 채 보게 되는 작품은 없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그는 관객에게 사기를 치지만, 관객이 스스로 사기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이건 매우 드문 재능이 아닐까.


CA210. 미카엘 하네케, 〈늑대의 시간〉(2002)

도저히 선뜻 수용할 수 없는 살벌한 상황 속으로 관객 밀어 넣기. 따라서 이러한 장면이 어디쯤에 배치되어 있느냐가 영화의 정서를 다르게 느끼도록 조장하는 관건이다. 이 영화의 경우처럼 맨 첫머리에 그러한 장면이 놓여 있을 경우, 영화는 뒤로 갈수록 불가항력적으로 긴장감이 떨어지고, 따라서 관객을 따분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하지만 이것이 너무도 어처구니없을 만큼 살벌한 경우에는 그 처음의 긴장감을 미처 다 덜어내기도 전에 영화는 끝나게 되어 있다. 이 영화가 맨 마지막에 보여주는 아름다운 자연풍광이 그토록 괘씸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을 아름답게 느끼기 위해서는 영화가 좀 더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의 감당키 힘든 긴장감이 충분히 퇴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스파 노에의 〈돌이킬 수 없는〉(2002)도 이와 비슷한 계열에 속하는 영화라 할 수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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