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39
CA191. 존 추, 〈위키드〉(2024)
이 세상에 ‘다르게’ 태어나지 않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어째서 사람들은 자꾸 잊어버리는 걸까. 또는, 부정하는 걸까. 모두가 ‘다르게’ 태어났으니, 그 ‘다름’의 개별성을 서로 인정해 주고, 서로 인정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터인데. 누구는 angel로, 누구는 wicked로 부르거나 불리는 사태의 무도함. 이에 대한 싱그럽고 다이내믹한 항의, 또는 저항, 또는 거역, 또는 부정, 또는 경멸, 또는 증오―. 가장 기본인, 뮤지컬의 매력적인 스코어와 가창과 연기를 비롯하여 나머지 거의 모든 요소로 말미암아, 이것만은 공연장이 아니라, 영화관에서 보아야 할 뮤지컬이라는 점에 오랜만에 동의.
CA192. 김대우, 〈히든 페이스〉(2024)
만일 송승헌이 조금만 더 지휘자다웠더라면 일제강점기와 731부대라는 뜬금없는 발언 또는 소재의 유입을 조금은 너그럽게 봐줄 수도 있었을 듯. 슬픔과 슈베르트가 어울리는 조합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 영화의 정서적 기조는 슬픔의 정조와는 걸맞지 않으므로 이 또한 너그럽게 봐줄 수 있는 선택이나 선곡은 아니라는 느낌.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결말이 이 주요 3자 모두에게 여지없는 ‘해피’ 엔딩이기 때문에 더더욱.
CA193. 유영선, 〈학교기담: 오지 않는 아이〉(2022)
관심이 생기는 순간, 관심을 기울이는 순간 모든 것이 시작된다. 관심이 생기는 것과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의지의 소관일 수 있는가. 관심이 생기는 것은 불가항력이지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의지의 영역에 속한다. 백 퍼센트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도저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는 것. 그 뒤에 벌어지는 모든 사건은 그래서 대부분 자초하는 것이다. 자초하는 탓에 그 모든 사건은 비극이 된다. 이야기를 초현실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은 이 자초하기가 현실 속에서는 그리 신빙성이 많지 않은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신빙성을 개연성이라는 말로 표현하거나 포장하는 것은 그래서 어딘가 적절하지 않은 느낌이다.
CA194. 장항준, 〈오픈 더 도어〉(2023)
문을 열지 말았어야 했을까? 그 마지막 순간 그 장모는 그 사위의 발목을 왜 잡았을까? 인생에는 포기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에 포기하지 못하거나 않으면 더 크고 결정적인 것을 잃게 되는 순간이 다가온다. 그들은 어쨌거나 애초의 목표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 목표를 이룸으로써 정작 진실로 손에 넣고자 했던 것은 다 잃어버렸다. 영화가 과거로 자꾸 거슬러 올라가서 가장 화사한 장면에서 아름다운 기타의 음색으로 끝나는 것은 그 상실이 잊고 싶을 만큼 너무나 깊은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잊고 싶은, 아니, 잊기라도 하고 싶은 사람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현재와 정반대인 그 ‘다른’ 과거를 지향하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것은 이미 가스파 노에가 〈돌이킬 수 없는〉(2002)에서 너무도 잔혹한 방식으로, 동시에 너무도 아름답게 보여준 교훈이다.
CA195. 클라우디아 마이어스, 〈섀도우 걸〉(2019)
어째서 ‘할로우(Hallow)’가 아니라 ‘섀도우(Shadow)’일까. ‘그림자를 넘어서(Above the Shadows)’라는 원제가 한결 더 명료하다. ‘그 남자’가 아니라, ‘그 여자’가 투명인간이기에 이 영화는 불순한 욕망에 한눈을 팔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면, 지나치게 성차별스러운 발언일까. 적어도 그 덕에 이 영화가 같은 소재의 영화인 〈할로우맨〉(2002, 폴 버호벤)과 다른 길을 간 것은 분명하다. 욕망의 성취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찾고, 자기 삶을 찾는 과정을 짚어가는 스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