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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Cinema Aphorism_37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37

by 김정수

CA181. 리들리 스코트, 〈글래디에이터 II〉(2024)

조선이 정조의 죽음 뒤로 사실상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듯이, 로마제국도 5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죽음 뒤로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 영화가 아무리 영웅 주인공의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려고 애를 써도 그것이 기본적으로 비극의 색채를 띨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렇듯 바꿀 수 없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어느 지점에서 끊든, 그것은 멸망으로 가는 도정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어떠한 승리의 내러티브도 결국은 멸망 스토리의 한 부분인 탓에 비극일 수밖에 없다. 그 옛날 스파르타쿠스가 그랬듯이.


CA182. 이상문, 〈고속도로 가족〉(2022)

가족과 함께 있으면서 파멸할 것인가, 가족과 떨어져 있으면서 생존을 도모할 것인가. 이 선택의 기로에서 그 사내는 파멸을 선택한다. 아니, 그는 파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무엇’이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도록 그를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이 ‘무엇’은 자존심일까, 애정일까, 질투일까, 아니면, 다만 자학 심리일까? 가난만이 가족을 불행으로 몰아넣는 것은 아니라는, 이 너무도 자명한 명제를 우리는 너무도 자주 잊어버린다. 잊어버리기에 그것은 이런 식으로 자꾸 반복해서 이야기되어야 한다.


CA183. 웨인 왕, 〈라스트 홀리데이〉(2006)

어째서 사람들은 죽음과 자기 자신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져야 비로소 버킷리스트를 적극적으로 궁리하고 실천하려 결심하는 걸까. 하지만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것은 이미 버킷리스트를 ‘물리적으로’ 실행하기가 쉽지 않은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그녀 조지아 버드(퀸 라티파)가 시한부 판정을 받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실은 건강했기 때문이다. 그 의학적 판정이 오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후반부의 반전 따위는 그리 중요한 설정이 아니다. 이 영화는 버킷리스트를 실천하는 시기에 대한 교훈을 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의 의미를 그렇게 규정한다. 맞든, 틀리든.


CA184. 유하,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2)

결혼은 물론 미친 짓이다. 냉철한 이성을 굳이 작동시키지 않더라도 그렇다. 하지만 그런 미친 짓을 끊임없이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또한 인간이다. 이런 점에서는 결혼을 하지 않는 것 또한 미친 짓의 일종이다. 인간이 왜 결혼을 굳이 하나의 ‘제도’로 만들어놓았겠는가. ‘미친’ 짓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미친’의 의미다. 이 의미에 대한 탐구가 충분하지 않다면 결혼을 그저 ‘미친’ 짓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매우 섣부른 일일 것이다.


CA185. 리즈 질, 〈골드피쉬 메모리〉(2003)

성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개인별로 알뜰하게 이루어지고, 같은 성정체성을 지닌, 또는 타고난 사람들끼리 이루는 관계들의 제 국면이 사회적으로 용인된다면 인간은 불행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적어도 그 불행의 원인 가운데 상당 부분은 해소되지 않을까. 기대와 희망, 그리고 의심과 고뇌 사이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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