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94
CA466. 오즈 야스지로, 〈낙제는 했지만〉(1930)
수평 트래킹으로 시작하는 오즈 영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험과 시험공부. 교복. 커닝. 시험을 잘 봐야 한다는 강박은 어째서 생긴 것일까. 오즈는 이야기보다 사람 몸의 움직임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게 아닐까. 일종의 개그. 속옷에 답안을 써놓는 방식. 필기도구의 아날로그. 잉크에 찍어서 쓰는 펜과 침을 묻혀서 쓰는 연필. 흑연. 인간의 움직임은 집단적인 것이 되는 순간 어째서 우스꽝스러워지는 걸까. 젊은 날의, 또는 단역 시절의 류 치슈. 축음기. 여러 지역에서 모인 학생들이 하숙집에 모여 사는 풍경. 그림자놀이. 하숙집 딸. 하얀 각설탕을 사탕처럼 먹던 시절. 내복의 시대. 흰색 와이셔츠에 써놓은 답안. 하지만 세탁소에 맡기면 말짱 헛일이다. 건성으로 본(공부한) 것은 시험 때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낙제의 기준은 어떻게 결정되는 걸까. 애초 그것은 누가 어떤 철학을 바탕으로 정해놓은 것일까. 두 인물, 또는 세 인물의 동작이 일치하는 모양새에 대한 기호. 졸업한 학생과 졸업하지 못한 학생. 학교를 한 학기 더 다녀야 한다는 것. 이런 것도 운명의 갈림길일 수 있을까. 낙천적이어야 하는 이유. 계단을 내려오는 여인. 다나카 기누요? 졸업과 취업. 취업으로 연결되지 않는 졸업의 의미. 자살을 꿈꾸는 순간. 엄지발가락만 돌출되어 있는 일본의 덧버선 또는 덧신. 천방지축 날뛰는 오즈 영화 속 어린 남자아이. 낙제가 뭐냐고 묻는 아이한테 낙제는 훌륭한 일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곤혹스러움. 그러니 이다음에 커서 뭐가 되고프냐는 물음에 “아저씨처럼 대학에 가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낙제할 거”라고 말하는 철부지. 웃음과 서글픔의 여지없는 공존. 낙제한 사람과 낙제를 면한 사람이 한데 어울려 밥을 먹는 동작의 일치가 불러일으키는 서글픔. 어색한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한마디. “영화 보러 가자.” 가난한 고학생. 양복을 빌려 입던 시절. 강의의 절반이 판서(板書)였던 시대. 수업의 절반이 필기였던 시대. 손동작 발동작의 일치. 졸업 실패와 취업 실패. 다시 시작되는 생활. 연속. 낙제는 했지만, 할 일이 없어 노는 것보다는 낫다? 낙제는 했지만, 열심히 학교생활을 하는 쪽. 그리고 낙제는 면해서 졸업은 했지만, 취업을 못해 할 일이 없어 집에서 빈둥거리며 학교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쪽. 어느 쪽이 더 나은 것일까.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졸업과 취업을 둘러싼 상황은 별 다를 게 없다는 것? 밀려나는 사람과 받아들여지는 사람. 떨어지는 사람과 붙는 사람. 이 가혹한 대차대조표.
CA467. 오즈 야스지로, 〈동경의 여인〉(1933)
누나의 남동생과 오빠의 여동생. 누나가 차려준 밥상. 구멍 뚫린 양말. 버선. 남동생의 수업료를 걱정하는 누나. 돈은 남자가 벌어오고, 씀씀이에 대한 걱정은 여자가 하는 이 상투적이면서도 이상한 구도. 아니, 상투적이어서 이상한. 평균수명 또는 기대수명이 지금보다 짧다는 것은 철이 드는 시기도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보다 이르다는 뜻일까. 화장대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기 얼굴에 곱게 분을 바르는 여자. 직장에서 기모노 위에 외투를 덧입고 일하는 여성. 경찰 앞에서는 왜 괜한 말을 자꾸 하게 되는 것일까. 빠른 속도로 능숙하게 타자를 치는 여사원의 손. 게리 쿠퍼. 찰스 로튼. 에른스트 루비치. 어느 날 느닷없이 해고 통보를 받은 사람의 이야기. 그가 긴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 여러 단계를 거쳐 사장실로 찾아가는 과정을 길게 보여주는 인서트. 그것이 빚어내는 모종의 불길함. 일하는 누나와 영화 보는 남동생. 그의 여자친구 다나카 기누요. 오빠와 함께 사는 여동생. 대학교수의 집에서 일을 도와준다고 해놓고, 실은 술집에 나가 일을 하는 누나. 품행에 대한 소문. 여동생의 교제를 걱정하는 오빠. 누나의 걱정과 오빠의 걱정, 그 내용의 차이. 지원과 보호. 다른 방점. 이 오빠의 직업이 경찰이라는 설정. 오빠는 여동생이 만나는 남자의 뒷조사를 한다. 그리고 표명하는 우려. 집에서 TV를 보지 않고 책을 읽는 사람들. 그런 시대. 이 영화 자막 필체가 마음에 든다. 난로를 피워둔 방 안에서 입김이 나는 시대. 서민 주택은 어째서 외풍이 센가. 사실과 중상모략. 믿음과 의심. 참느냐 못 참느냐가 아니라, 참기로 하느냐 참지 않기로 하느냐의 문제. 난로 위에 물 주전자를 늘 얹어놓고 있던 시대. 오즈 영화 속에 나오는 술집 여자들. 생활고를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술집에 다니는 여자들. 이 설정은 시대상의 반영일까, 취향일까, 관심사일까. 여자가 남자를 위해서 일할 때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의 종류. 남자가 여자를 위해서 일할 때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의 종류. 이 엄혹한 차이. 여자가 화장을 짙게 하는 순간과 그 화장을 지우는 순간. 여자의 노동에 기대어 자신의 미래를 도모할 수밖에 없는 남자의 처지. 이 경우 어느 쪽이 희생이요 헌신일까. 아니, 어째서 희생이요 헌신이어야만 할까. 선택할 수밖에 없어서 선택한 것은 이미 선택이 아니다. 그러니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 누나를 때리는 남동생. 누군가를 위해 내가 고생한다는 것. 그 모든 헌신을 딛고 얻은 졸업. 하지만 졸업이 보장해 주는 초라한 미래. 걷는 사람을 따라가는 수평 트래킹. 서민의 삶을 가장 기초적인 수준에서 보장해 주지 않는 사회. 끈으로 벽에 매달린 장갑의 인서트. 그 불길한 이미지. 일종의 예언. 소품을 활용하여 앞으로 닥칠 사건을 암시하는 방법. 검소한, 또는 초라한 밥상. 전화가 흔치 않던 시절,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것은 주로 어떤 소식을 뜻했을까. 희소식일 가능성은 낮지 않았을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것은 그만큼 연락이 쉽지 않았다는 뜻이 아닐까. 오빠한테서 애인의 자살 소식을 듣는 여자의 심정. 그 여자한테서 남동생의 자살 소식을 듣는 누나의 심정. 이 순간 다나카 기누요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 충격, 슬픔, 분노, 절망이 모두 응축된. 자꾸 반복해서 끼어드는 벽시계들의 인서트. 째깍째깍. 8시 30분. 아직 그 소식을 듣지 못한 누나의 모아 쥔 두 손. 도대체 이 여동생은 자기 애인의 누나한테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그가 자살한 까닭은? 그는 무엇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일까. 무엇이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할 때 감행하게 되는 자살. 하긴 이런 딱한 소식이 어찌 특종이 될 수 있을까.
CA468. 모흐센 마흐말바프, 〈고요〉(1998)
손님을 맞이할 때 머리에 수건을 두르는 여인. 눈을 감은, 또는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년. 집세 독촉. 집세를 내지 않으면 집을 나가라는 통고. 시한은 닷새. 무엇이든 앞 못 보는 아들에게 물어보고 결정하는 엄마. 벌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지켜달라는 기도. 줄줄이 늘어서서 자기가 구워온 빵을 파는 여인들. 눈으로 보고 사는 것과 손으로 만져보고 사는 것. 그리고 그것을 파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사는 것. 예쁜 목소리에 대한 선호. 줄줄이 늘어서서 바구니에 담아 온 과일을 파는 여인들. 석류, 사과, 체리. 살갗을 만져보고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것. 버스에 타면 귀를 막아라. 그래야 예쁜 목소리만 따라가다 길을 잃는 일이 없다. 그렇게 소년한테 충고하는 누나. 눈은 혼란의 원천이다. 그러니 진실을 알고 싶다면 눈을 감고 귀만 열어라. 하지만 눈을 감으면 버스에서 제때 내릴 수 없다. 혼자 버스를 타고 일터로 출근하는 시각장애인 소년. 빵과 체리, 한 끼의 식사. 예쁜 목소리와 아름다운 음악은 어떻게 다른가. 예쁜 목소리를 따라가는 것과 아름다운 음악을 따라가는 것. 어느 쪽이든 길을 잃게 된다는 것. 음악을 따라가다 길을 잃은 시각장애인의 행방을 찾고 싶다면 눈을 감고 음악을 따라가라. 눈을 감은 소녀가 눈이 먼 소년을 찾아가는 이 기적 같은 순간.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면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다는 것. 사장님의 야단도 마찬가지. 체리 귀고리, 꽃잎 매니큐어. 소년이 하는 일이 전통 현악기 조율이라는 것. 느닷없는 베토벤 5번 교향곡 1악장 도입부. 음표 네 개. 집주인이 집세 독촉하러 올 때 문 두드리는 소리. 이 서글프고 우스꽝스러운 유머.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 집주인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 그다음에 소년을 기다리는 운명은? 눈이 먼 소년의 연주에 맞추어서 춤추는 눈을 뜬 소녀. 똥 위에 앉은 벌과 꽃 위에 앉은 벌을 구별하는 방법. 벌이 내는 날갯짓 소리. 듣기 싫은 소리와 듣기 좋은 소리. 전쟁으로 형편없이 떨어진 화폐가치. 집세 상승. 소년은 열심히 일해서 집세를 벌어와야 한다. 눈먼 어린 아들한테 집세 낼 돈을 가불해 오라고 말하는 엄마. 소리를 들려주는 것과 보여주는 것. 소리는 듣는 것일까, 보는 것일까.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아니라, 노동하는 아이들. 한데, 소년의 조율이 실패한 것은 어째서일까. ‘앞 못 보는 소년’이라고 할 때와 ‘시각장애인 소년’이라고 할 때의 어감의 차이. 소리 나지 않는 것을 찾아낼 때 소년이 의지하는 감각. 귀를 막으면 들리기 시작하는 물소리. 시간이 지날수록 보기보다는 듣게 되는 영화. 시각보다는 청각의 활성화. 사람 목소리를 듣고 반응하는 개, 양, 염소. 어쩌면 타잔은 진짜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클로즈업.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빛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 오로지 소리만이 유의미하다는 것. 거울의 쓸모없음. ‘운명교향곡’ 1악장을 이란의 전통 현악기와 타악만으로 연주하기.
CA469. 스즈키 마사유키, 〈GTO〉(1999)
Great Teacher Onizuka. 문제 학생에 괴짜 선생. 학생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또는 다룰 것인가. 이 경우 이것은 마인드의 문제일까, 기술의 문제일까. 죽고 싶은 아이들과 비뚤어지고 싶은 아이들. 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아이들.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몰락해 가는 마을. 지역경제의 파탄. 삶의 터전을 잃는다는 문제. 테마파크가 어떤 역할을 해 주리라는 기대. 하지만 모든 것은 착각이요 신기루였다는 것. 학생들의 미래 또한 그런 착각과 신기루인지도 모른다는 것. 그게 현실이라는 것. 역시 떠나야 하는가. 홋카이도, 일본의 가장 북쪽. 가장 춥고 눈이 많은 곳. 여기로 온다는 것과 여기서 떠난다는 것. 그 두 가지 움직임의 겹침.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아니라, 그 부모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계급의 차이. 그것이 학생들 사이의 관계에 끼치는 영향. 마을의 미래와 아이들의 미래, 그 겹치고 어긋나는 상관관계. 약한 남학생을 강한 남학생으로 만들려는 선생의 노력. 또는, 보호와 교육. 단역으로 나온 츠마부키 사토시. 재단 이사장에게 학생들은 무엇인가. 고객일 뿐인가. 학생은 선생의 제자지, 이사장의 제자는 아니라는 것. 이 엄연한 차이. 학생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기준. 한 량짜리 시골 전차 또는 기차. 이사장 딸이 친구일 때. 친구가 있느냐 없느냐, 많으냐 적으냐. 이것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까. 꼭 있어야 하고, 많아야 하는 걸까. 없다면 그것은 누구 탓일까. 본인한테 무슨 문제가 있기 때문일까. 시간이 멈추었다가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순간. 문제를 해결하는 구실은 어째서 외부인한테 있는 것일까. 문제를 해결한 다음 그 외부인은 어째서 떠나야만 하는가. 그 외부인이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까닭은?
CA470. 스튜어트 고든, 〈스턱〉(2007)
노숙자에게 쇼핑센터의 카트는 어떤 구실을 하는 물건일까. 승진을 앞둔 양로원 간호사가 음주 운전으로 사람을 친다. 그리고 날마다 저지르는 작은 죄악들. 그렇기에 죄라고 느끼지 못하는 악행들. 이것이 죄냐 아니냐를 따져서 가를 수는 있지만, 죄라고 느끼지는 못하는 현상. 아니, 느껴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는 마음의 어떤 마비 상태. 남을 돕는 일을 하는 사람과 죄의 충돌.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의식과 그것을 은폐하려는 본능 사이의 대결에서 대개 본능 쪽이 이기는 것은 인간에게 무엇보다도 자기 보호본능이 앞서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무슨 일이든 인간의 양심에 맡겨두는 일 따위의 효능은 애초부터 없는 셈이다. 법과 제도의 효용도 이런 데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닌지. 사회적 약자에게 닥친 사고나 불행은 어째서 압도적인가. 피해자의 처지와 가해자의 처지, 이 가운데 어느 쪽에 대한 감정이입이 더 강렬할까. 법과 제도는 처벌이 중심일까, 구원이 중심일까. 시스템이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로지 모든 해결책이 개인의 몫으로 남을 때. 이때의 분노는 무엇을 향한 것인가. 실화. 마음에 드는 요소, 그 첫째는 제목. 스턱(Stuck). 스틱(Stick)의 과거분사. 끼이다. 끼인 상태. 끼인 사람. 단순하고 명확하다. 시각적이다. 마음에 드는 요소, 그 둘째는 러닝 타임. 85분. 군더더기를 넣을 틈새가 없다. 존 포드의 〈웨건 마스터〉(1950)보다도 1분이 더 짧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기준을 적용하면 〈스턱〉이 〈웨건 마스터〉를 1분 차이로 이긴 셈이다. 마음에 드는 요소, 그 셋째는 배우. 미나 수바리와 스티븐 레아. 본의 아닌 가해자와 피해자. 악녀와 ‘당한 남자’. 어느 쪽이 승자고 어느 쪽이 패자든, 이토록 절묘한 콤비를 언제 또 만나봤더냐, 싶다. 남을 돕는 일을 하는 사람이 거꾸로 남을 해치는 처지에 놓인다는 것. 어쩌면 선택. 그 자신도 어찌해 볼 수 없는. 이 고약한 이율배반. 문명은 아직도 어둠 속의 통제력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는 자각. 밤이 되면 문명도 눈을 감는다? 그러니 문명은 아직까지는 지나치게 시각적인 차원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사람한테건 기계한테건. 어쨌거나 목격되지 않은 범죄는 범죄가 못 된다는 것. 느닷없이 벌어진 큰 사고가 날마다 저지르는 자질구레한 악행들의 악스러움을 거울에 비추듯 선명하게 드러내어 보여준다는 것. 안일한 삶을 충격하는 효과. 인간의 자기 보호본능은 최고로 강렬한 이성으로조차 통제할 수 없다는 것. 스스로 저지른 범행의 끔찍한 결과 앞에 조장되는 저 불가해한 마비 상태. 실수가 범행으로 옮겨가는 지점에 대한 성찰. 한데, 그를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남게 한 것은 생명력일까, 의지일까, 아니면 신의 섭리일까. 여자와 그 여자의 애인이 죽는 것은 과연 심판일까. 그렇게 해석해도 괜찮을까. 이것은 어느 만큼 종교적인 태도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