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Cinema Aphorism_102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102

by 김정수

CA506. 미이케 다카시, 〈크로우즈 제로 2〉(2009)

까마귀. 폐허. 먼지바람. 검은 교복. 담배. 대결. 소년원, 학교의 특정 기능을 극대화시킨 곳. 소년원은 정말 불량학생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변모시켜 내는 곳인가. 감옥에서도 그렇지만, 변모하는 사람은 변모의 가능성을 애초부터 제 몸속에 지니고 있는 법 아니던가. 도저히 변모할 것 같지 않은 사람을 변모시키지 못하는 소년원 또는 감옥이 무슨 소용일까.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일까. 휴전협정은 지키라고 있는 것인가, 깨라고 있는 것인가. 공권력은 어째서 이런 사적 폭력을 뿌리 뽑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 않는 것일까. 조금 더 수위가 높아진 유머, 아니, 개그. 담배의 기능. 이 시리즈를 보다 보면 공교육이란 이미 파탄 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형의 과업을 아우가 물려받는다는 것의 의미. 전부 쓰러뜨리고 제로(0)가 되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는 것. 그래서 실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것에 목숨을 거는 사태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것. 때리고 싶을 때가 있다면 맞고 싶을 때도 있다는 것. 사랑하고 싶을 때가 있다면 미워하고 싶을 때도 있듯이. 무엇이든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아버지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 아들은 어째서 아버지를 뛰어넘으려고 하는가. 남성 호르몬 수치가 너무 높은 영화. 校內土足不可(교내토족불가). 남근 상실의 시대. 또는 남근뿐인 시대. 승패와는 무관하게 싸움 자체를 즐기는 사람을 상대하는 법. 싸움이 없으면 못 견딘다는 것. 싸움 중독증. 또는 살아가는 방법. 그리고 〈사망유희〉(1978, 이소룡, 로버트 클루즈).


CA507. 하스미 에이치로, 〈가슴배구〉(2009)

도정(道程)과 동정(童貞). 수컷은 암컷의 가슴에 집착하는 시기가 있다. 이런 발상이 허용되는 것 자체의 신기함. 특활부실이라는 공간. 배구와 가슴. 아니, 배구공과 가슴. 성인 주간지. 일곱 자리 전화번호. 아야세 하루카가 불러일으키는 이상한 싱그러움. 필요한 인재를 끌어들이는 방법. 여선생님의 가슴이라는 동기(動機). 손으로 그린 영화 간판이 걸린 옛날 극장. 장담과 약속, 그리고 거짓말. 선생은 학생들 앞에서 어느 정도로 약속하고, 또 지켜야 하는가. 선생과 학생 사이의 신뢰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마지노선은? 지킬 수 없는 약속과 지켜서는 안 되는 약속. 자기 가슴이 모두의 꿈이라며 애인의 손길을 마다하는 태도. ‘내 앞에 길은 없다. 길은 내가 지나간 다음에 생긴다.’ 소문. 사적 차원의 일이 공적 차원의 속으로 들어가면 어째서 큰 문제가 되는 것일까. 공과 사가 그런 식으로 달라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반드시 지켜야 하는 사적 차원의 약속과 반드시 지킬 필요가 없는 공적 차원의 약속. 이건 무엇의 문제일까. 세상에는 어째서 지켜야 하는 약속과 지키지 않아도 되는 약속이 있는 것일까. 지키지 못할 약속 따위 아예 하지 않는 것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애를 쓰다가 결국 실패하는 것은 서로 어떻게 다른 것일까. 잘못된 약속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모든 약속은 신성하다? 중요한 것은 약속도 아니고, 약속을 지키는 것도 아니며, 오직 약속을 지키려 애쓰는 것뿐이라는 점. 그 애씀의 진정성. 한데, 관객 또한 그 아이들처럼 선생의 가슴을 보고 싶은 마음으로 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되는 걸까. 거짓말을 하면 선생으로 있을 수 있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선생 자리에서 물러 나와야 한다면? 그것이 무엇을 가져다주느냐가 기준일까. 지키고 싶어도, 또 지킬 수 있는데도 지킬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약속은 과연 무엇일까. 그들이 얻은 것은 ‘속가슴’이 아니라, ‘가슴속’이라는 신박한 마지막 전언.


CA508. 김현석, 〈스카우트〉(2007)

스카우트를 당하는 사람과 스카우트를 하는 사람. 오래도록 기억되는 사람과 깡그리 잊히는 사람. 아니, 처음부터 기억조차 되지 않는 사람. 어째서 이렇게 나뉘는 것일까. 선동열이 그 시대를 통과해 온 방식. 시대가 그를 피해 간 것일까, 아니면 그가 시대를 피해 간 것일까. 그것은 시대의 배려였을까, 개인적인 간계였을까. 거기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어째서 사람들은 그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일까. 어쩌면 그 자체가 책임을 지는 방식의 하나일까. 그래도 되는 것일까. 그것은 성역일까, 처세일까. 싸우는 쪽과 그 열매를 취하는 쪽의 이 기이한 불일치. 어째서 그는 기억되고, 나머지 모든 사람은 잊히는 것일까. 개인으로서 기억되는 것과 덩어리로서 잊히는 것의 차이. 기억과 망각 사이의 이 깊디깊은 골짜기. 이것이 판결이라면 시대는 어째서 이런 식으로 판결을 내리는가. 이 판결은 과연 정당한가. 이런 판결을 내리는 시대의 책임은 어디에 물어야 하는가. 시대 그 자체는 누가 심판하는가. 또는, 어떻게 심판하는가. 어째서 아무도 이 심판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걸까. 한데, 이것조차도 그 고유의 존재방식은 어째서 추억의 빛깔을 하고 있을까. 우리는 어째서 이걸 추억이라는 모양새로 허용하는 것일까. 이 심리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CA509. 제임스 맥티그, 〈닌자 어쌔신〉(2009)

심장이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 그래야 산다. 그저 살을 빼는 것만이 아니라, 단련했다는 것. 〈내 사랑 내 곁에〉(2009, 박진표)의 김명민과 다른 경우. 그래도 몸이 영화의 거의 전부가 되어 있는 형국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 그 정도로 몸을 단련할 수 있는 사람들이, 또는 몸을 단련한 결과가 그 정도인 사람들이 어째서 스포츠를 하지 않을까. 이 경우 영화배우는 이미 스포츠맨인 걸까. 그렇게 규정해도 될까. 고산지대의 훈련장. 〈쿵푸 팬더〉(2008, 마크 오스본 & 존 스티븐슨)의 잔영. 한데, 그것은 정말 몸의 단련일까. 어쩌면 다른 그 무엇이 아닐까. 그들이 정말로 단련하는 것은 무엇일까. 몸의 유통기한은 과연 얼마나 늘릴 수 있을까. 그들의 장래는 어떤 것일까.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몸은 영화에 어느 만큼 이바지할 수 있을까. 연기훈련은 몸의 훈련과 어떻게 다를까. 비(Rain)는 이소룡의 길을 갈까, 성룡의 길을 갈까, 이연걸의 길을 갈까. 아니면 주윤발의 길을 갈까. 할리우드는 비를 어떤 식으로 활용할 속셈일까. 그것은 충분한 활용일까. 언제나 바닥에 깔려 있는 기본 의문. 닌자와 사무라이는 어느 쪽이 더 고수일까. 맞붙었을 때 어느 쪽에 승산이 있을까. 닌자의 최고수와 사무라이의 최고수는 어떻게 다를까. 그가 사무라이가 아니라 닌자인 이유는?


CA510. F. 게리 그레이, 〈모범 시민〉(2009)

복수를 위한 심모원려(深謀遠慮). 복수에 대한 의지가 어째서 삶의 의지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첼로와 사형 집행. 일종의 무대. 두 개의 무대. 공연. 십 년 뒤. 카운슬러와 검사. 이 명칭 또는 호칭의 미묘한 다름과 같음. 자백 말고는 아무런 증거도 없는 사건. 심증과 물증. 물증 없는 심증은 어째서 생기는 것일까. 그 심리적 기원은 무엇일까. 10년은 한 ‘모범 시민’이 기도(企圖)하는 복수의 심모원려를 위해서 과연 충분한 기간일까. 내뱉은 말에 대한 책임. 과연 이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애초 이런 책임을 충분히 질 수 있도록 인간은 설계된 것일까.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과연 복수일까. 아니, 복수라는 천박한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 요컨대, ‘broken thing’과의 전쟁. 어째서 모든 것이 거래(deal)될 수 있는 것일까. 제발 이런 결말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떠오르는 순간. 감독과 관객 사이의 대결은 여기서부터. 클라우제비츠. 더는 살인자와 거래하지 않는다는 것. 이 엄정한 교훈. 이 교훈을 위한 그 모든 것. 이 교훈을 받아들였기에 그는 살아남은 것일까. 그는 과연 남은 삶을 이 교훈을 지키며 살 수 있을까. “To achieve victory we must mass our forces at the hub of all power & movement. The enemy’s ‘Center of Gravity’” - Von Clausewit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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