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103
CA511. 최동훈, 〈전우치〉(2009)
이름하여 ‘도술’과 관련된 인물들의 액션, 그러니까 홍길동이나 전우치 같은 인물들의 액션이 와이어를 통해서 구현될 수 있다는 믿음이나 상상력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심지어 구미호를 포함한 이른바 ‘한국형’ 귀신이나 악령들의 액션도 결국은 와이어 액션의 이미지에 가깝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지. 그것의 확인. 요컨대 ‘우아한’ 액션 또는 액션의 ‘우아함’이 핵심이다. 문제는 와이어 액션은 물리적인 차원에서 한계가 있다는 것. 따라서 어느 순간에는 속절없이 이것을 CG로 벌충해야만 한다는 것 또한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문제가 아닐지. 완성도에 대한 아쉬움과 더불어 욕심이 생기는 까닭. 어느 수준까지 구현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 강동원에 대한 만족감과 최동훈 영화에서 익숙한 백윤식과 김윤석의 이미지에 대한 아쉬움의 충돌. 다른 선택에 대한 기대감. 염정아와 임수정의 익숙함과 낯섦. 불의 정서와 물의 정서의 맞섬. 한데, 어째서 항상 죽음이 아니라 봉인일까. 죽음은 완전하지만, 봉인은 어쨌거나 불완전한데.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욕망의 표현? 이야기는 어쨌거나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독자의, 관객의 가장 뜨거운 욕망이자 기대라는 것? 아마도 전우치는 이 욕망과 기대에 부응할 운명을 타고난 것이 아닌지.
CA512. 이케다 토시하루, 〈가위남〉(2004)
흉기가 가위인 연쇄 살인. 가위, 날카롭고 단단하고, 한껏 펼쳤을 때 십자가 모양이 되는. 여학생이라고 말하는 것과 여고생이라고 특정할 때 그 어감의 다름. 일종의 자살 도우미? 모방범의 등장, 또는 출현. 파더 콤플렉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콤플렉스의 주체에 관련된 문제. 핵심은 가위일까, 살인일까, 여학생 또는 여고생일까. 죽이고 싶으면 죽이면 된다. 다만 그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한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해라.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면 된다. 하지만 책임을 질 수 없는 문제도 있다는 것. 죽으려고 애를 쓰는데도 죽어지지 않아서 괴로워하는 여자. 고농축 니코틴과 청산가리. 너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니다. 너 자체가 병이니까. 병에 걸린 사람과 그 병을 대신 앓아주는 사람. 증상과 분신. 진짜와 가짜. 본질과 형상. 너는 누구냐는 질문이 곧 나는 누구냐는 질문이 되는 형국. 살인을 할 때의 불쾌감과 살인에 대한 죄책감, 어느 쪽이 더 깊고 오래 갈까. 가위남인가, 가위녀인가. 가위남이 여자였다는 말은 옳은가. 이중인격. 최초 살인의 동기는 모욕감? 다중인격. 정신적인 외상. 해결책은 홀로서기에 대한 의지. 아버지의 자살이라는 사건. 아버지가 딸한테 해줄 수 있는 말, 다이죠부. 천상병의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한강의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누구를 위해서 뛰어내리는가. 딸을 위해서.
CA513. 임성찬, 〈가벼운 잠〉(2008)
감당할 수 없는 문제.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문제. 혼자 짊어지거나, 그냥 다 포기하고 죽어버려야 하는 문제. 이제 열린(최아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CA514. 정지영, 〈소년들〉(2023)
한 가지 사안에서 어떤 사람은 거기에 인생 전체가 걸려 있고, 어떤 사람은 그것이 직업으로서 ‘한갓’ 업무에 지나지 않을 때. 그가 숨어 산 것, 그가 증언을 거부한 것, 그가 다시 증언하기로 결심한 것. 사필귀정의 필연적인 불완전함, 또는 부실함, 또는 허술함. 무죄와 처벌 사이. 가해자도 있고, 피해자도 있는데,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피해’일 뿐이라는 것. 가해자는 가해의 기억을 금세 잊고, 피해자는 피해의 기억을 영원히 간직하므로. 처벌 없는, 또는 처벌조차 없는 때 늦은 무죄 판결을 과연 승소라고 할 수 있을까.
CA515. 모리타 요시미츠, 〈실락원〉(1997)
사랑이 찾아온 시간 따위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또는, 느닷없이 찾아온 사랑에 눈이 멀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끝까지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 과정에서 윤리·도덕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있는 걸 어쩌랴. 인간의 DNA는 무한한 사례와 가능성의 보고(寶庫)인 것을. 그게 조물주의 뜻인 것을. 이 ‘무한함’에 대한 뼈저린 자각이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