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101
CA501. 코랄리 파르자, 〈서브스턴스〉(2024)
중요한 것은 ‘이런 나’와 ‘그런 나’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나’와 ‘그런 나’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이다. 하나이기에 하나이려면 하나여야 하므로, 그 둘은 반드시 서로 화해해야 한다. 화해만이 행복한 공존의 유일한 전제다. 다시 말하면, 내가 나와 화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엄중한 실존의 조건이다. 우리는 화해해야 한다. 심지어 신과도. 신의 경우 우리는 ‘화해’를 ‘회개’나 ‘용서’라는 다른 일방적인 성격의 명칭들로 부르고 있을 뿐이다. 이 점을 착각하는 데서부터 자아의 분열이 시작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데미 무어에게 경배를! 〈사랑과 영혼〉(제리 주커, 1990)에서 〈지.아이. 제인〉(리들리 스코트, 1997)을 거쳐 마침내 〈서브스턴스〉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그 어떤 여성 영화배우도 보여주지 못한 장엄하고 아름다운 ‘몰락’과 ‘상승’의 궤적이다.
CA502. 최원섭, 〈히트맨 2〉(2025)
코미디와 정격 드라마 사이에서 적절한 위치 선정 하기의 어려움. 그들이 그에게 복수심을 품게 된 배경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진지한 접근이 부족하다는 점은 이 영화를 충분히 드라마이지 못 하게 만들었고, 복수를 모든 액션의 심리적 동기로 삼았다는 점은 이 영화를 충분히 코미디이지 못 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권상우의 직업이 웹툰 작가라는 사실부터가 애초 무리한 설정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이 캐릭터가 권상우에게 잘 어울린다는 점만큼은 부정하기 힘들다.
CA503. 정기훈, 〈애자〉(2009)
어째서 미운 정은 고운 정보다 더 질길까. 그래서 끊기가 더 어려운 것일까.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상극이면서 상극이 아닌 관계. 자신의 운전 과실로 남편을 죽게 만들고, 아들을 다리 절게 만든 여자의 일생. 무사히 살아남은 두 여인, 엄마와 딸. 하지만 무사한 것은 실은 몸뿐인 것을. 그 세월을 어떻게 살아냈을까. 수의사, 유기견을 안락사시키는 데 반대하는. 하지만 자신의 마지막 순간 결국 안락사를 선택하는 여자. 이것이 정말 기구한 인생일까.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을까. 그렇게 살아야만 했을까. 고통에 대한 설명은 있지만, 고통에 대한 동감은 한 박자씩 뒤처지는. 아니, 충분하지 않은. 애자의 성(姓)은 어째서 ‘박’일까. 붙여 읽으면 ‘박애자’가 된다. 박애, 자. 그리고 김영애. 또 하나의 어머니. 어쩌면 김혜자, 나문희, 김해숙과 더불어 또 하나의 어머니상. 또는, 최강희라는 또 다른 딸의 상. 그런 엄마에 그런 딸. 모전여전. 이 관계의 질긴 상투성과 전형성. 다음 세대의 어머니들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게 만드는 국면. 지금의 젊은 여배우들 가운데 뒷날 과연 누구를 어머니로 내세울 수 있을까. 엔딩 타이틀이 떠오르는 동안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짤막한 화면들의 뜬금없는 기이함. 어째서 이런 결말로 나아갔을까. 어째서 애자의 장래가 그래야 하는 것일까. 아니, 그럴 수 있는 것일까. 그게 맞는 것일까. 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이건 화룡점정이 아니라, 혹 용두사미가 아닐까. 이건 나만의 신경과민일까. 애자의 애자다움을 지키려는 조치는 그와는 조금 달라야 하지 않을까.
CA504. 올리비에 메가통, 〈콜롬비아나〉(2011)
허무주의.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의 로마제국 제9군단 전멸사인 〈센추리온〉(2010, 닐 마셜)의 허무주의. 병자호란 시대 조선 백성들의 수난사인 〈최종병기 활〉(2011, 김한민)의 허무주의. 석유 매장지 탐사 대원들의 잔혹한 생존기인 〈제7광구〉(2011, 김지훈)의 허무주의.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다 죽거나, 주인공 한 사람만 살아남는다는 것. 그리고 온 가족이 다 죽고, 상대 조직원들도 다 죽는 청부살인 집단의 복수극인 〈콜롬비아나〉의 허무주의. 결과적으로 그것만이 투쟁의 목적이 되어버린 형국이 지니는 끝 간 데 없는 허무주의의 행렬.
CA505. 크리스 밀러 & 필 로드,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2009)
성경 속의 ‘만나’라는 지고의 음식.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내려온다는 상상. 비와 눈. 햇살.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과잉이라는 사태다. 알맞지 않다면 하늘에서 무상으로 내려오는 은총도, 폭우나 폭설이 그렇듯, 인간은 감당할 수 없다는 것. 음식은 생존의 필수조건이기도 하지만, 음식의 과잉은 파멸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것. 지나친 축적과 지나친 결핍은 둘 다 인간에게는 재앙이라는 것. 재앙인 이상 조절이 필요하다는 것. 하지만 어느 만큼이 인간에게 가장 알맞은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인간 자신도 정확히는 모른다. 성경에서는 신이 그걸 결정한다. 그래서 아무 문제가 없었다. 왜? 신은 전능하신 분이니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언제나처럼 신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이다. 그러니 음식이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는 인식까지만이 인간의 몫이라는 것. 나머지는 신의 영역이리라는 것. 그 어떤 전능한 판단력이 조절해 주지 않으면 인간은 스스로 파멸에 이르는 족속, 곧 자멸의 본성을 타고난 족속이니까. 이 경우 과잉의 부분을 아낌없이 버리는 것이 신의 바람이리라는 것. 하지만 인간은 잉여 부분의 축적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러니, 은총은 어쩌면 진작에 파기했어야 할 계약인지도 모른다는 것. 은총의 조건을 충족시키기에 인간은 참으로 부족함이 많은 딱한 존재이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