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105
CA521. 닉 햄, 〈더 홀〉(2001)
왕따를 당하는 학생의 잔혹한 복수극. 물론 이 뻔한 이야기의 중심에는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또는 피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 놓여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서사는 이 질문을 주제 의식의 차원에서 충분히 조명해 낼 수 있을 만큼 넉넉히 통제되지 않았다.
CA522. 닉 카사베츠, 〈더 홀(She's So Lovely)〉(1997)
그녀는 왜 범죄자를 좋아한 것일까. 그가 살인죄로 감옥에 갔을 때 왜 그녀는 다른 남자와 동거를 시작하고 아이까지 낳은 것일까. 그리고 그가 출소했을 때 왜 서슴없이 자신과 함께 살아준 그 다른 남자를, 그리고 그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미련 없이 떠나 그에게로 간 것일까. 어째서인지, 미국의 서브 컬처에 해당하는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심리에는 감정이입이 잘 안 되는 대목이 분명히 있다.
CA523. 커크 와이즈 & 게리 트라우스데일, 〈아틀란티스〉(2001)
다섯 살 난 아들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추면 이건 그저 신나는 해저 여행과 모험일 뿐이다. 그걸 뛰어넘는 무엇을 원한다는 것 자체가 불순하거나 불경스러운 처사다. 아틀란티스라는 말을 처음 들어보는 아이의 눈에는 그저 모든 것이 신기하게만 보인다. 유감스러운 것은 오직 이 애니메이션을 뮤지컬로 만들지 않았다는 점일 뿐. 신나고 감동적인 노래와 율동이 빠지고 나니, 남은 것은 지루한 동어반복이다. 디즈니는 어린이들이 가장 무서운 관객임을 더러 잊어버린다.
CA524. 앙드레 카야트, 〈라인강 가는 길〉(1960)
자유를 찾아 탈출을 감행한 남자는 조국에서 사랑과 일 모두를 잃는다. 적지에 포로로 남은 남자는 전쟁이 끝나고 조국으로 송환되지만, 적지에 남은 여인을 찾아 다시 떠난다. 조국에서 자신을 이해해 줄 줄 모르는 아내와 장인 장모와 함께 사는 것은 그대로 지옥이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또, 자신이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의식이 중요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독일의 후방에서 벌어진 일은 홀로 된 여인들과 노동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파견된 포로들 사이의 정분이다. 이 주제에 대한 천착도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는 느낌이다.
CA525. 김수용, 〈만추〉(1982)
특별 휴가를 받고 나온 모범수 여인(김혜자)과 범죄조직에 연루되어 살인을 저지르고 쫓기는 신세의 남자(정동환)와의 만남. 이들의 만남을 사회가 인정할 턱이 없다. 을씨년스러운 만추의 계절에 이들은 여자가 출감하는 2년 뒤를 기약하고 헤어지지만, 살인죄는 그보다 훨씬 더 길거나 결정적인 형벌, 곧 ‘사형이나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해당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때는 교도소 앞 간이 식당에서 파는 가락국수 한 그릇의 값이 5백 원이던 시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