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Cinema Aphorism_130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130

by 김정수

CA646. 오즈 야스지로, 〈외아들〉(1936)

홀어머니에 외아들. 그렇다면 이 단 두 사람으로 이루어진 가족의 앞날이란 뻔한 것이다.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헌신적인 희생, 또는 아들의 미래에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가족의 운명. 하지만 한창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제국주의 일본의 본토에서 그들의 앞에 놓인 것은 궁핍과 절망뿐이다. 물론 그것을 바라보는 감독의 눈길마저 온전히 그런 것은 아니다. 하긴 이 영화의 감독은 오즈 야스지로니까.


CA647. 하디 마틴스, 〈카스카듀어(Cascadeur)〉(1998)

레굴라 그로윌러 in. 독일인들의 잠재의식 속에 히틀러라는 인물이 얼마나 심각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영화. 설사 이 영화가 모험 활극, 내지는 액션 스릴러의 장르 구조를 택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히틀러의 죽음에 대해 ‘아주 정확히는’ 알고 있지 못하다. 그러니 정말로 그가 어딘가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는지 알 게 무언가. 거기에는 공포와 소망이 함께 얽혀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 과연 기우이기만 할까.


CA648. 안토니 호프먼, 〈레드 플레닛〉(2000)

화성 탐사는 온전히 헛것인지도 모른다는 것. 이 우려가 자꾸만 화성 탐사에 관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동인(動因)인 셈이다. 그리하여 미국은 이미 막대한 예산을 허공에 날려버렸는지도 모른다는 것. 하지만 모든 대규모 국책사업은 ‘허공’을 얼마간 요구한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닐까.


CA649. 오즈 야스지로, 〈동경 이야기〉(1953)

어쩌면 오즈 야스지로는 희대의 사기꾼일까. 패전 직후의 일본에서 그들은 전쟁에 대한 어떠한 상념도 없이 지극히 평온한 일상을 살아갈 따름이다. 그래서 그러한 설정이 가능하다. 분명히 패전 직후임에도 그들은 전쟁의 후유증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같다. 전쟁의 현장에서 떨어져 있는 본토의 인민들. 하지만 이것은 위안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그저 간신히 불행을 면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더 정확한 관찰의 결과일 것이다. 느닷없는 웃음과 느닷없는 비난과 느닷없는 죽음. 왜 일본인들은 아이들에게 버르장머리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 걸까. 그들의 예절과 우리의 예절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들은 굉장히 예의를 지키며 사는 것 같지만, 우리의 기준에 맞추어보면 세상에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이 바로 그들이다. 아들은 부모님을 보고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태연히 앉아서 말로만 인사를 한다. 아이들이 조부모님한테 함부로 버릇없이 굴어도 꾸중을 하지도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숫제 예의를 가르치지 않는 느낌에 가깝다. 아버지가 자식들한테 허리를 굽실거리며 어머니의 장례식에 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차린다. 이런 요소들로 걸작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야말로 예술의 기적 아닐까. 오즈의, 또는 오즈만의 마술―. 이 마술은 허황한 상상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정확한 관찰이 그 기반이다.


CA650. 랜들 밀러, 〈식스맨(The 6th Man)〉(1997)

죽어 유령이 된 농구선수 형의 분별없는 욕망을 살아남은 선수인 동생이 바로잡아 준다는 ‘해괴한’ 설정. 죽은 자가 산 자를, 이 아니라, 산 자가 죽은 자를 깨우쳐 준다는 것. 시간, 또는 운명의 비가역성에 대한 파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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