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도전, 〈방김거사야거〉_2
H04. 가을, 벗을 찾아가는 이의 마음 / 鄭道傳(정도전), 〈訪金居士野居(방김거사야거)〉_2
첫 구는 ‘秋陰漠漠四山空(추음막막사산공)’입니다.
가을 추(秋), 그늘 음(陰), 아득할 막(漠), 아득할 막(漠), 넉(넷) 사(四), 뫼(산) 산(山), 빌 공(空).
특별히 어려운 글자는 없는데, 漠(막) 자에 대해서는 조금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여기서 저는 이 글자의 뜻을 조금 문학스러운 느낌이 나게 ‘아득하다’로 했지만, 실은 ‘넓다’가 기본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desert나 sand로 표현하는 ‘사막(沙漠)’에 바로 이 ‘막(漠)’ 자를 씁니다. 자전(字典) 또는 옥편(玉篇)에도 이 글자의 첫 번째 뜻이 대개는 ‘사막’으로 되어 있지요.
한데, 이 글자 두 개를 첩어(疊語)가 되게 나란히 겹쳐 써서 ‘막막(漠漠)’으로 하면 ‘매우 넓고 넓어 끝이 없는 모양’이나 ‘끝없이 넓어 아득한 모양’ 정도의 의미가 됩니다. 형용사나 부사로 쓰일 수 있는 말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사막이 막막하게 펼쳐져 있다’와 같은 식으로 쓰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글로만 ‘막막하다’라고 하면 ‘졸지에 실업자가 되어 먹고살 길이 막막하다’라고 할 때처럼, 우리는 보통 이 말을 ‘앞날이 암담하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매우 부정적인 뉘앙스지요. 이때의 ‘막막’에는 ‘쓸쓸할 막(寞)’ 자를 씁니다. 곧 ‘막막(寞寞)’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막막(漠漠)’은 ‘넓다, 아득하다’라는 뜻이고, ‘막막(寞寞)’은 ‘쓸쓸하다, 외롭다’라는 뜻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국어사전에도 두 가지가 각기 다른 뜻의 낱말로 올라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둘이 서로 전혀 상반된 느낌의 낱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어요. 누구나 아득히 넓은 사막과 같은 곳에 홀로 있으면 쓸쓸하고 외로울 테니까요. 그러니까 둘은, 어쨌거나, 정서적으로 비슷한 느낌의 낱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혼동하여 쓰기도 합니다.
이제 시를 보겠습니다.
이 첫 구는 ‘추음/막막/사산/공’ 정도로 끊어 읽으면 되겠네요.
먼저, ‘秋陰(추음)’입니다. 저는 이걸 글자 그대로 풀어서 ‘가을의 그늘’로 하겠습니다.
‘漠漠(막막)’은 그냥 ‘막막하다’라고 해도 되겠지만, 저는 명확하고 문학스러운 느낌이 나도록 ‘아득하다’라고 하겠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앞의 ‘秋陰(추음)’과 얽어서 ‘가을의 그늘이 막막하다’나 ‘가을의 그늘이 넓고 넓다’라고 하면 아무래도 어딘가 조금 어색한 느낌이지요?
‘四山(사산)’은 그대로 풀이하면 ‘네 산’이지만, 이건 온 사방에 둘러서 있는 산(들)이라는 의미로 보는 게 맞겠지요. 그래서 저는 ‘온 산’ 정도로 하겠습니다.
마지막 ‘空(공)’도 뜻 그대로 그냥 ‘비었다’나 ‘비어 있다’ 정도로 하면 되지 싶습니다. 물론 그 주체는 바로 앞의 ‘四山(사산)’이겠지요.
이를 바탕으로 이제 이 첫 구 전체를 번역하면 이런 정도로 할 수 있겠습니다.
‘가을의 그늘은 아득하고 온 산은 비어 있다.’
물론 이는 토씨를 포함하여 나중에 네 구의 번역문을 모두 합할 때 시의 느낌이나 정서, 그리고 의미에 맞게 다듬을 것입니다.
앞서 이미 다루었지만, 제목으로 미루어볼 때 이 시의 화자는 지금 아마도 벗으로 추정되는 누군가를 방문하러 가는 길입니다.
계절은 ‘가을 추(秋)’ 자가 있으니까 당연히 가을이겠고, 공간은 ‘뫼 산(山)’ 자로 보아 산속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화자가 찾아가는 ‘김거사’라는 사람은 산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늘(陰)’은 산속이니까 역시 우거진 나무들의 그늘이겠지요. 바야흐로 화자는 가을의 산속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한데, 그 그늘이 막막하다는군요. ‘막막(寞寞)’이 아니라, ‘막막(漠漠)’이니까, 아득한 느낌인 것이지요. 또는, 화자가 가을날 산속에 어려 있는, 또는 감돌고 있는 그늘을 아득한 느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듯 가을 산속에서 아득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 화자가 ‘四山(사산)’ 곧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산을 보면서, 또는 그 산을 가리켜 空(공), 곧 비어 있다고 말하고 있네요.
예, 이 첫 구의 핵심이 되는 글자가 바로 이 ‘空(공)’ 자입니다.
화자를 가운데 두고 사방에 둘러서 있는 산, 곧 온 산이 비어 있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산이 원체 헐벗어 나무가 듬성듬성하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앞의 아득하다는 뜻의 ‘漠漠(막막)’이라는 시어와 연결하여 화자가 느끼는 어떤 허허로움이나 공허감을 비었다는 뜻의 ‘空(공)’이라는 글자로 빗대듯 표현한 것일까요? 이것도 아니라면, 깊은 가을산 속에 홀로 있는 사람, 곧 화자 자신의 고독이나 외로움의 정서를 표현한 것일까요?
예, 이것은 가을(秋)이라는 계절을 염두에 두고 그 뜻을 새겨보아야 할 시어입니다. 한시(漢詩)에는 가을 이후에 잎이 떨어져 가지들이 앙상해진 나무로 이루어진 산을 ‘空山(공산)’이라는 시어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한시에서 ‘山(산)’ 자와 ‘空(공)’ 자가 함께 쓰일 때는 거의 예외 없이 낙엽의 계절인 가을 이후의 산을 의미한다고 보면 무리가 없겠습니다.
지금 이 시의 화자는 낙엽 지는 가을이라는 계절에 자기 벗 김거사의 거처가 있는 곳인 어느 산속으로 찾아 들어와 아득한 기분에 사로잡혀 허허로움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이 ‘허허로움’의 ‘허허(虛虛)’도 ‘빌 허(虛)’ 자 두 개로 이루어진 말이지요.)
이 정도만으로도 저한테는 가을이라는 계절 특유의 정서가 물씬 느껴지는데,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이제부터 어떤 모양새로 시상이 펼쳐질지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다음 글에서 둘째 구를 살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