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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Cinema Aphorism_175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175

by 김정수

CA871. 제시 아이젠버그, 〈리얼 페인〉(2024)

영화는 키어런 컬킨으로 문을 열고, 키어런 컬킨으로 문을 닫는다. 키어런 컬킨은 아무리 봐도 이 영화의 주연인데, 어째서 아카데미는 그를 남우조연상 수상자로 결정했을까. 진정한 고통을 찾아서 쇼팽과 함께 떠나는 여정. 하긴 그곳은 쇼팽의 나라, 폴란드다. 이 고통(페인)은 공감의 다른 이름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 고통 또는 공감의 주체가 유대인이든, 르완다인이든, 미국인이든, 폴란드인이든, 영국인이든, 또는, 남자든, 여자든, 늙은이든, 젊은이든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리얼, 곧 진짜로, 진정으로 느끼느냐가 중요하다. 어쩌면 그는 극강의 F일까. 컬킨이 아이젠버그에게 공감 능력의 감소를 지적하는 서늘한 순간―. 그가 공항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그의 여정이 아직 충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일까. 쇼팽과 함께가 아니었다면 힘겨웠을지도 모를 여정.


CA872. 찰스 허먼 윔펠드,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2002)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존재며,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존재다. 사회가 그의 정체성을 결정해주며, 그는 그 결정에 순응하며 산다. 대부분의 인간은 그렇다. 하지만, 이 정체성에 의심을 품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이 도래한다. 대부분의 인간은 이 순간 판단을 유보하거나 무시하고 기존의 패턴을 유지해 나간다. 그것이 소위 ‘정상적인’ 삶이다. 문제는 그 순간에 덜컥 연루되는 족속들이 있다는 것. 그 가운데서도 성 정체성은 시대의 화두 또는 공안이라는 것.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무엇보다도 내가 어떤 성의 소유자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 나의 성이 무엇인지를 제일 먼저 결정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이 과정이 생략되면 그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 이 전언으로부터 그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CA873. 미츠이시 토미지로, 〈토미에 리플레이〉(2000)

끝없이 되살아나는 육체에 대한 공포. 문제는 이 공포의 근원이다. 과연 이 공포는 ‘무엇에 대한’ 공포인가. 불사신 같은 육체의 소유자는 여자며 소녀다. 그리고 이 공포는 남자들의 영혼을 억압한다.


CA874. 필 앨든 로빈슨, 〈섬 오브 올 피어스〉(2002)

핵폭탄에 대한 강박관념. 공포. 그 핵을 지닌 상대방에 대한 끝없는 의심. 핵 앞에서는 아무것도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엄연한 사실. 핵이 존재하는 한 이 고약한 상황은 계속된다는 것. 톰 클랜시의 상상력도 결국은 핵의 존재에 근거하는 것이다.


CA875. 러셀 멀케이, 〈쉐도우(섀도우, 샤도우)〉(1994)

누구나 그림자가 되고자 할 때 세상은 평온해진다. 그가 ‘쉐도우(그림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깨달음 때문, 아니, 덕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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