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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Cinema Aphorism_173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173

by 김정수

CA861. 에드바르트 베르거, 〈콘클라베〉(2024)

반전의 점층법. 우리는 모두 그 콘클라베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래서 영화가 아무리 스릴러스러운 분위기와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관객은 스토리가 어디에 이를 것인지를 모를 수가 없다. 그래서 영화는 얼마간 심드렁하다. 심지어 관객은 이 심드렁함이 후반부에 있을 어떤 반전을 위한 준비 과정이라는 것까지도 헤아릴 수 있다. 따라서 이제 남는 문제는 반전 자체다. 어떤 성격의, 얼마만 한 충격의 반전일 것인가. 이 영화는 바로 이 남은 문제, 이 마지막 반전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렇다는 것을 관객은 마지막 순간에야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다. 내 생각에 이 반전이 영화 전체를 살렸다. 다시 말하면, 이 반전은 영화 전체를 살릴 정도의 반전이다.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이 마지막 반전을 확인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마지막 반전만 밝히지 않는다면, 영화의 나머지 전부에 대한 발언은 스포일러가 될 수 없다. 또는 스포일러의 자격을 잃는다. ‘받아들임’의 윤리. 받아들여지려면, 나부터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이보다 더한 종교적 겸손이 있을까. 온전히 ‘믿지’ 않는다면 도저히 그럴 수 없는 겸손.


CA862. 허안화, 〈여인 사십(女人四十)〉(1995)

세상의 모든 치매 환자는 그 가족을 지옥경 속으로 아주 손쉽게 끌고 들어간다. 하지만 그 지옥경을 삶에 대한 성찰의 장으로 만드느냐, 아니면 파멸의 장으로 만드느냐를 선택하는 것은 고스란히 가족의 몫이다. 여기에서 세상의 모든 가족은 두 부류로 나뉘지 않을까. 그리고 그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하느냐를 기준으로 그 가족의 구원과 파멸이 결정될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정말 잔인한 게임의 규칙이다.


CA863. 김국형, 〈구멍〉(2000)

미로에 빠진 인간을 그리려다 스토리 자체가 출구 없는 미로에 갇혀버리고 만 느낌. 안성기의 존재감 또는 매력이 충분히 드러났더라면 결과가 달랐을까. 서사의 결과든, 현실의 결과든.


CA864. 폴 토마스 앤더슨, 〈매그놀리아〉(1999)

하늘에서 천벌처럼 쏟아져 내리는 황소개구리의 비(雨)는 노아의 홍수가 왜 필요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그런 식의 충격이 없이 인간은 자신의 죄악을 중단하지 못한다. 그것은 죄악에 대한 인식이나 자각의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다. 이런 점에서 감독은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셈이다.


CA865. 돈 시겔, 〈돌파구(Charly Varrick)〉(1973)

그는 자기 손 한 번 대지 않고 75만 불을 둘러싼 모든 적을 잠재우는 데 성공하여 마지막 승자가 된다. 그가 왜 은행을 터느냐는 질문을 한 번도 던지지 않고 관객이 그에게 감정이입을 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감독의 솜씨 또는 재능의 어떠함이 드러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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