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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n 12. 2024

14. 꼴찌의 떳떳함과 일등의 행복을 위하여

  - 박성숙, 《꼴찌도 행복한 교실》

14. 꼴찌의 떳떳함과 일등의 행복을 위하여 / 《꼴찌도 행복한 교실》 - 박성숙 지음, 21세기북스

다 같이 행복하지 않은 교육 현실

   제목이 가슴을 칩니다. ‘일등만 행복한 교실’이 아니라 ‘꼴찌도 행복한 교실’―.

   너무나 오래도록 교육 문제라는 고질병을 앓아오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일등과 꼴찌가 다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교실이란 정말 꿈같은 이야기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교육 문제가 결국 대학 입시 문제로 귀결되는 지금의 무한경쟁 체제에서는 일등과 꼴찌가 동시에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실은 꼴찌뿐만이 아니라, 일등도 똑같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 아니겠습니까.

   꼴찌는 낙오했다는 절망감으로, 일등은 그 자리를 계속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행복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이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의 본질인 것이지요.

   그러니, 이것은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해결하려는 시도, 참조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반드시 해결하고는 싶지만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가 어려운 문제로 교육 앞에 내세울 만한 다른 문제는 흔치 않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니겠습니까.

   이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또 교육부 수장이 바뀔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교육정책과 제도가 당장 뒤따라 바뀌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모범답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교육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 또는 노력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 강우석)라는 통렬한 제목의 영화가 나온 뒤로 무려 3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지났는데도 이 땅의 교육 현실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교육 문제의 해결을 위해 검토해 볼 만한 방책으로 우선 가장 손쉽게 꼽아볼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다른 나라, 특히 교육 선진국의 제도를 참조하는 일일 것입니다.

   한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는 교육제도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라면, 또는 우리 현실에 접목하는 데 문제가 있는 제도라면 섣불리 도입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당연하지요. 부작용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시행착오를 최대한 줄여야 합니다.

   희생은 언제나 새로운 제도를 도입해서 적용하고 시행하는 쪽이 아니라, 그 제도에 입각한 새로운 교육을 받아야 하는 학생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학생들 처지에서는 자기 삶이, 자기 장래가 그에 따라 좌우되는 문제일 테니까요.

   세상 모든 일이 대체로 그렇듯, 자칫하다가는 희생당하는 쪽만 억울하기 십상이지요.

   과녁은 ‘참조’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어떤 태도로 참조하느냐―.

   무엇보다도 겨냥을 잘해야 합니다.

   그저 구경이나 관찰이어서는 곤란합니다. 그래서는 그 제도의 본질이나 핵심을 온전히 들여다보기 힘듭니다. 기계적인 참조와 도입은 위험한 것이지요.

   이 책은 바로 그 참조가 구경이나 관찰이 아니라, 체험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남다릅니다.     


날것의 온전한 체험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모든 정규 교육과정을 마친 사람으로 남편과 함께 독일로 유학을 갔고, 그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두 아이를 독일의 교육제도 속에서 키웠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 체험담인 셈입니다.

   삶 속에서 이루어진 체험이라 겉핥기일 수가 없습니다. ‘독일을 알면 행복한 교육이 보인다’라는 이 책의 부제가 믿을 만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흔히 외국에서도 한국에서와 똑같은 방식으로 아이들을 교육하려고 드는 여느 한국인 부모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끼리 비좁은 커뮤니티를 이루어 끼리끼리만 어울려 지내면서 아이들한테 고액 과외를 시키고, 방과 후에는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는 식으로 아이를 키우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자가 살고 있는 아헨이라는 도시는 교포들이 많지 않은 곳이라는군요. 덕분에 저자의 아이들은 독일의 아이들과 어울리며 철저히 독일식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 과정에 대한 어머니의 기록입니다. 문자 그대로 날 것의 온전한 체험이지요.     


타산지석

   저자는 어머니이되 한국에서 모든 정규 교육과정을 밟은, 주입식 교육과 입시지옥의 현장을 고스란히 다 겪은 한국인 어머니입니다.

   따라서 그런 그의 눈에 아이들이 받는 독일식 교육과정 하나하나는 그지없이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 낯섦은 독일의 교육과 한국의 교육을 서로 견주어 보는 작업을 통하여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이것이 이 책의 핵심입니다.

   독자도 저자를 따라서 그 낯섦을 하나하나 체험하며 독일교육의 특징을 파악하고, 그에 견주어 우리나라 교육이 어떤 문제를 지니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럼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도 찾을 수 있게 될지 모릅니다. 요컨대 타산지석(他山之石)입니다. 이것이 이 책의 목표인 셈이지요.

   하루하루 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들이기에 교육학적 차원에서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들을 늘어놓는다거나, 복잡한 수치 분석과 가치 평가를 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 책의 장점입니다.

   첫대목에서부터 독자는 저자와 더불어 문화적인 충격을 경험합니다. 신선합니다.     


선행학습 금지

   저자는 우선 낙제냐 아니냐 정도의 구분만 할 수 있을 뿐, 도무지 아이의 등수를 확인할 수 없는 성적표에 대한 답답함과 의문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경쟁에서 이겨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가는’ 교육을 중요시하는 독일에서 이는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줄곧 1등부터 꼴찌까지 차례로 ‘줄 세우기’식의 교육 방법에 익숙해져 있는 저자로서 이 답답함과 의문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넉넉하게 공감이 갑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또래보다 월등히 성적이 뛰어나거나, 선행학습으로 교과과정 이상의 것을 이미 알고 있는 학생에 대한 학교의 대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교육을 통한 선행학습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취급하는 풍토지만, 독일학교에서 이는 선생님을 무시하는 행위로, 지탄의 대상이 됩니다.

   실제로 저자의 큰아이는 김나지움 6학년 때 한 학생이 예습을 해와서 이것저것 아는 척을 하다가 수업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선생님께 꾸중을 듣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선생님은 그 학생한테 이릅니다.

   “너 한 번만 더 미리 공부해 와서 수업을 방해하면 월반을 시켜 버리겠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선행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우리네 교육풍토에서는 참 해괴하게까지 여겨지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는 공교육의 교권과 교사의 재량권이 그만큼 든든하게 인정받고, 보호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교사는 시험 기간을 자의적으로 정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날 저자는 불시에 시험을 치르곤 하는 아이의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항의합니다. 시험 기간만이라도 아이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그 날짜나 일정을 미리 알려달라는 것이지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우리의 교육풍토에서는 마땅한 항의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교사는 떳떳하게 말합니다.

   “시험 날짜를 미리 알려주면 부모들은 분명 아이들을 놀지도 못하게 하고 공부만 시키려 할 것이 뻔합니다. 시험으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지는 여러 연구 결과를 통해 알려진 바 있습니다. 날짜를 예고해서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받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말문이 막힙니다.     


아이들은 뛰어놀아야 하는데

   이는 영재를 우습게 여기는 독일 사람들의 사고방식과도 관계가 깊습니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천재 피아니스트, 천재 운동선수…….

   이처럼 ‘천재’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반응한답니다.

   ‘그 어린것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 얼마나 살인적인 연습을 해야 했을까. 아이들은 뛰어놀아야 하는데…….’

   저자의 말대로 어린 시절의 영재는 부모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부모의 욕심과 아이의 재능, 이 둘의 행복한 결합은 참 드문 일이지요. 이 얽힘의 과정에서 곧잘 망가지는 쪽은 아이들입니다.

   이쯤 되면 정말 독일의 학교에서는 꼴찌가 행복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교육 문제가 없고, 교사의 권위가 살아 있고, 학부모와 학생이 다 같이 교육 문제로 스트레스받을 일이 없고, 촌지가 없고, 아이의 장래가 성적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직업교육의 과정이 잘 갖추어져 있고, 명문대의 폐해가 없고…….

   물론 이렇게만 보면, 독일이야말로 참 이상적인 교육제도를 갖춘 나라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자가 독일의 교육제도를 무턱대고 찬양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이 있습니다.     


이상적인 모델의 탄생을 기원함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독일의 학부모들은 교육 문제에 너무나 무관심합니다.

   전반적으로 학력 하향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덩달아 국제경쟁력도 떨어집니다.

   여기서 독일 교육계는 우리와는 참 다른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경쟁체제로 들어가면 지금까지처럼 인성을 풍부히 기를 수 있는 폭 넓고 깊이 있는 교육은 어려워질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말합니다.

   ‘두 나라 교육의 장점을 적당히 섞을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 탄생할 것 같은데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이 고민의 촉발이 이 책의 마지막 목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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