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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n 10. 2024

13. 사랑의 실천, 그 단순한 기쁨을 위하여

  - 피에르 신부, 《단순한 기쁨》

13. 사랑의 실천, 그 단순한 기쁨을 위하여 / 《단순한 기쁨》 - 피에르 신부 지음, 백선희 옮김, 마음산책

복잡한 삶 속의 단순한 기쁨

   원제(Mémoire d'un Croyant : 어느 믿는 자의 회고)하고는 다르지만, 우리말 제목이 참 쿨한 책입니다. ‘기쁨’ 때문이 아니라 ‘단순한’ 때문입니다. 복잡한 기쁨이 아니라 단순한 기쁨―. 정말 잘 어울리는 조합 아닙니까. 하긴, 세상에 복잡한 기쁨이라는 것도 있을까요?

   문명이 발달할수록 우리네 삶이 점점 더 복잡해져 간다는 것은 저만의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칫 문명의 이기(利器)가 가져다주는 편리함이 늘어날수록 우리네 삶도 그에 비례해서 점점 더 단순해진다고 생각하는, 혹은 느끼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편리함을 단순함과 혼동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단순함을 얻어 누리려고 편리함을 계속 추구하다가 결국은 더욱 복잡한 삶의 굴레를 뒤집어쓰게 되는 셈입니다. 문명의 발달을 추구하는 한 이는 피할 수 없는 악순환일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이는 우리가 지금 삶에서 얼마나 휴식과 여행을 깊이 갈망하는가를 따져보면 금세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요. 휴식이나 여행에 대한 갈망은 한 마디로 삶의 복잡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을 터이니까요.

   문명의 이기가 허락하는 편리함만큼이나 삶이 단순하다면 인간이 휴식이나 여행을 그토록 갈망할 까닭이 없지 않겠습니까. 나빠진 경제 상황을 회복하기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어가는 것도 어쩌면 우리네 삶이 그만큼 더 복잡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복잡한 삶에 스트레스는 있을지언정 기쁨은 있을 턱이 없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기쁨’이라는 제목은 참 마땅하며 동시에 매혹적입니다. 하지만 이 매혹이 진짜라면, 혹은 진짜이려면 책의 내용도 ‘진짜’ ‘단순한 기쁨’으로 넘쳐야겠지요.

   이 점에서 이 책은 제목이 부추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제 느낌이요 판단입니다.     


체험이 바탕인 공감의 글

   그렇다고 제목만을 보고 이 책을 그저 ‘단순한’ ‘기쁨’에 관한 철학적 단상이나 아포리즘을 모아놓은, 일종의 문학성 짙은 인생론 따위, 한갓 에세이집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제가 썩 좋아하는 표현 방식은 아니지만, 이렇게 한번 말해보고 싶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글이 있다고요.

   하나는 많은 독서와 공부를 통해서 얻은 지식을 자료로 삼아 쓴 글이고, 또 하나는 진솔한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쓴 글입니다. 앞의 것이 지식의 전달을 겨냥한 글이라면, 뒤의 것은 마음의 공감에 주안점을 둔 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모든 글을 이렇듯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또 꼭 그래야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쪽은 진솔한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 아닐까요. 적어도 지식 전달에 초점을 맞춘 글보다는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글이 독자의 마음을 그 깊은 곳까지 어루만지기가 조금은 더 수월하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체험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글은, 그것이 아무리 지식의 전달 자체를 주된 목적으로 삼고 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어느 정도의 공허함은 면키가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런 글은 이해하기는 고사하고 끝까지 읽기조차 쉽지 않을 것입니다. 《단순한 기쁨》은 철저하게 체험을 바탕으로 쓴 글들로만 엮은 책입니다.

   물론 이 체험은 ‘단순한 기쁨’에 관한 체험입니다. 더욱이 이 책의 저자는 이 ‘단순한 기쁨’을 ‘타인과 더불어 사는 기쁨’이라고 명쾌하게 규정하고 시작합니다. 말장난 같지만, 단순히 단순한 기쁨이기만 한 것은 아닌 셈입니다.     


신부가 되기로 결심한 사내

   이 책의 저자 아베 피에르는 프랑스의 가톨릭 신부입니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신부가 아닙니다.

   그는 1912년에 태어났습니다. 이는 그가 험한 시대를 살아야 했다는 뜻입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삶이었을 테니까요.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9세 때 모든 유산을 포기하고 수도회에 들어가 신부가 됩니다. 어린 시절 예수님의 마음에 들려고 무진 애를 썼다는 그의 고백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목숨을 걸고 레지스탕스로 활약합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국회의원이 되어 현실정치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가장 빛나는 경력은 빈민 구호 공동체인 ‘엠마우스’를 창설하여 평생 집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 일했던 것입니다. 이 책은 바로 그 이야기가 몸통입니다.     


엠마우스, 예수님의 양보

   하나의 에피소드가 가슴을 칩니다.

   엠마우스 초기의 일입니다. 그는 아직 변변히 사람들을 머물게 할 곳도 마련하지 못한 형편이었습니다.

   어느 날, 불법으로 살고 있던 빈집에서 막 쫓겨난 일가족이 그를 찾아옵니다. 고향 집을 유스 호스텔처럼 임시로 고쳐 쓰고 있던 그곳은 이미 독일인, 프랑스인, 영국인 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느닷없이 나타난 그 가족한테 내어줄 자리가 따로 있을 턱이 없는 궁색한 처지였지요.

   하지만 그는 궁리 끝에 ‘무엄하게도’ 예배실에 있던 예수님상(!)을 들어내어 기꺼이 그 집 잃은 불쌍한 일가족을 위한 보금자리를 만듭니다. 그는 말합니다.

   ‘때때로 나는 노숙자들을 위한 우리의 투쟁이 이처럼 널리 발전하게 된 것이 우리 집에 계시던 예수께서 맨 먼저 당신의 자리를 집 없는 가족에게 내놓으셨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매우 유머러스하면서도 심금을 적시는 말입니다. 그가 어떤 위인인지를 단박에 알 수 있게 하는 일화지요.


그분이 계심을 믿느냐, 그분을 믿느냐?

   무엇보다도 믿음에 관한 그의 말들이 귀에 몹시 솔깃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상투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도 그 말들이 듣는 족족 귀에 착착 감겨오는 까닭은 그것이 바로 그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나는 하느님이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다.’

   묘한 수사법이지만, 이 한마디에 담겨 있는 그의 신앙의 깊이와 통찰은 이 책을 손에 든 사람의 마음을 잔잔한 놀라움으로 가만히 흔들어 놓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계심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하느님을 신뢰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늘 불안하고 두려움에 떱니다. 나아가 불평하고 원망하지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또한 예수님이 계심은 믿었지만, 정작 예수님은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끝까지 물 위로 걸어가지 못하고 도중에 맥없이 물에 빠지고 말았지요. 신앙에서 이 차이는 매우 크고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God is Love!

   한데 ‘어쨌거나’ 그가 믿는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사랑과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바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는다고 덧붙입니다.

   ‘그분은 존재 자체가 사랑이며, 그것이 그분의 본질을 이룬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잊기 쉬운 하느님의 속성입니다.

   하지만 이 사랑에는 타인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는 것을 그는 또한 잊지 않고 강조합니다.

   ‘사랑하도록 강요받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심지어 인간한테는 사랑하지 않을 자유조차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렇기에 사랑이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는 걸까요?” 하고 물어올 때 그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이지요” 하고 서슴없이 답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거듭 다음과 같은 ‘기묘한’ 표현을 쓰는 것도 결국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어쨌든 사랑이시다.’

   ‘어쨌든’이라는 단서가 날카롭게 가슴을 저밉니다. 이러저러한 까닭에서가 아니라, ‘어쨌든’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용서의 실천이자 체험

   이토록 사랑에 투철한 그이기에 종전(終戰) 뒤 벌어진 전범(戰犯) 재판에서 그는 자신을 배반했던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증언합니다. 용서하지 않는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니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전쟁 중에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던 피에르 신부를 게슈타포에 밀고했던 인물입니다. 당연히 그 탓에 신부는 체포되었지만, 다행히도 나중에 무사히 탈출합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전공과 관련된 중요한 연구 저작을 인쇄하는 데 필요한 종이를 구하는 일로 부득이 게슈타포 소속의 프랑스인 장교한테서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작은 일이 빌미가 되어 밀고를 강요당했던 것이고요.

   피에르 신부는 바로 그 일의 불가피함을 재판정에서 피해 당사자로서 증언해 주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그 사람은 사형선고를 받을 위기에서 목숨을 건집니다.

   사랑에서 시작하여 용서로 마친 셈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사랑과 용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랑과 용서의 실천이자 체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기쁨’인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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