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자 성인지미 불성인지악 소인 반시 / 《논어》 〈안연편)〉
經(경) 1. 《논어》를 읽는 당신은 어떤 독자세요?_1 / 군자 성인지미 불성인지악 소인 반시 -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
‘君子(군자) 成人之美(성인지미) 不成人之惡(불성인지악) 小人(소인) 反是(반시)’는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 제16장의 문장입니다. 물론 ‘자왈(子曰)’로 시작하는 공자님 말씀이지요. 저는 다음과 같은 정도로 번역합니다.
‘군자는 남의 아름다움은 이루어 주지만, 남의 악함은 이루어 주지 않는다. 소인은 이와 반대다.’
끊어 읽기는 ‘군자 성/인지/미 불성/인지/악 소인 반시’ 정도로 하면 되겠고요. 보통은 ‘군자는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어 주고, 남의 악함을 이루어 주지 않지만, 소인은 이와 반대다(반대로 한다)’라는 정도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成(성)’과 ‘不成(불성)’, 그리고 君子(군자)와 小人(소인) 간 대립의 뉘앙스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느낌이 들어서 토씨인 ‘을’을 ‘은’으로, ‘그러나(하지만)’에 해당하는 접속사를 ‘소인’ 앞에 두지 않고 ‘불성’ 앞에 두는 느낌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또, 전체 문장이 조금 늘어지는 듯하여 ‘불성인지악’에서 한 번 끊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문에는 문장 부호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본인이 알아서 끊어야 하는데, 전통적인 문장 끊기 방식대로 했을 경우 번역문이 만연체로 늘어지는 경우가 매우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보건대, 평소 우리말 문장을 쓸 때는 단문(短文)을 지향하던 사람도 정작 한문 문장을 번역할 때는 늘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아무래도 폐단(弊端)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문장을 끊는 데 개인의 자율성을 폭넓게 허용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좋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래야 개성 있는 문장, 또는 개성 있는 새로운 해석이 나올 여지가 생길 테니까요.
다음은 ‘美(미)’와 ‘惡(악)’입니다. ‘아름다울 미(美)’자와 ‘악할(추할) 악(惡)’자를 썼다고 해서 이걸 미학의 차원에서 미추(美醜)의 개념을 표현하는 문장이라고 본다면, 이는 지나친 비약이거나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여기서 미(美)는 아름다운 점, 곧 장점(長點)이나 강점(强點) 정도로, 악(惡)은 아름답지 않은 점, 곧 단점(短點)이나 약점(弱點) 정도로 파악하면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에 대해서는 어원(語原)의 차원에서 그 역사적인 연원(淵源)까지 따져 들어가 설명하려면 적지 않은 지면이 필요합니다. 하여 여기서는 상식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처럼 서로 반대되는 개념 정도로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反是(반시)는, ‘반(反)’자를 형용사로 보면 ‘이와 반대다’라고 번역할 수 있겠고, 동사로 보면 ‘이와 반대로 하다’라고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당연히 ‘거꾸로’나 ‘거꾸로 하다’라고 해도 되겠지요. 의미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누가 번역하든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미상불(未嘗不:아닌 게 아니라), 한문에서는 하나의 한자가 여러 가지 품사(品詞)로 활용되는 특징이 있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이를 문법 용어로는 ‘품사의 통용(通用)’이라고 하지요.
전체 문장의 의미는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아니, 어렵지 않게 느껴집니다. 아주 단순화시키면, 좋은 사람은 남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나쁜 사람은 남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니까요. 이 정도 의미를 모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군자는 이러이러한 사람이고, 소인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사실, 곧 정보를 전달하려는 문장이 아닙니다. 《논어》에서 군자(君子)는 지향(志向)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이것도 우리가 ‘남의 아름다움은 이루어 주지만, 남의 악함은 이루어 주지 않는’ 군자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기본적으로 바탕에 깔고 있는 문장이라고 보아야겠지요.
《논어》에는 이렇듯 처음 읽었을 때 쉽게 별 난관(難關) 없이 그 의미가 금세 파악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 성격의 문장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무신경하게 읽다 보면 겉으로 드러난 기본적인 문의(文意)만 파악하고 넘어가게 되고, 따라서 그 깊은 곳에 놓인 진짜 의미를 놓치기 십상입니다. 다 너무나 뻔한 소리로 느껴지는 탓이지요. 이것이 《논어》를 쉬우면서도 다른 어떤 경서들보다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누가 《논어》를 다 읽었다고 할 때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리는 ‘읽었다’라는 말을 너무 쉽게 내뱉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개는 ‘그저 읽었을’ 뿐입니다. ‘그저 읽었다’라는 것은 겉만 대강 훑어본 경우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읽기는 읽었는데, 정작 아무것도 진짜로 읽어내지는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논어》를 진짜로 읽은 사람은 《논어》를 읽기 전과 뭐가 달라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가 《논어》를 읽었다고 하는데, 그가 그 전과 조금도 달라진 점이 없다면, 그는 《논어》를 진짜로 읽은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헛읽은 것이지요. 엉터리로 읽은 것입니다. 쓸데없이 시간 낭비를 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논어》의 성격과 가치를 처음부터 잘못 파악하고 평생 그런 자기만의 편견을 지닌 채 살아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독서는 그 독서 행위를 한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독서의 진정한 힘이요 의미요 가치 아닐까요. 물론 그렇다고 제가 부담스럽지 않은 가벼운 독서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그것대로 우리 삶을 분명 풍요롭게 하는 구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독서에도 그 나름의 구실, 기능, 역할이 있음을 저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설(序說)〉에 나오는 정자(程子)의 말이 긴요하게 다가옵니다. 이 정자(程子)를 간단히 소개하면, 그는 정명도(程明道)라고 불리는 정호(程顥)의 동생 정이(程頤)로, 호가 이천(伊川)이라서 보통 정이천(程伊川)이라고 부릅니다. 합하여 ‘이정(二程)’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형제는 후대의 주자(朱子)와 더불어 ‘신유학(新儒學)’ 곧 ‘정주학(程朱學)’의 창시자들로 자리매김됩니다. 이 ‘정주학’이 바로 ‘성리학(性理學)’이지요?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설(序說)〉에서 ‘程子曰(정자왈)’로 시작하는 그 첫 문장은 이렇습니다.
‘讀論語(독논어) 有讀了全然無事者(유독료전연무사자) 有讀了後(유독료후) 其中得一兩句喜者(기중득일양구희자) 有讀了後(유독료후) 知好之者(지호지자) 有讀了後(유독료후) 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직유부지수지무지족지도지자).’
다음 글에서 이 문장을 통하여 ‘《논어》를 읽는다’라는 문제에 대해서 한번 짚어보고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