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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Apr 29. 2024

經(경)2. 《논어》를 읽는 당신은 어떤 독자세요?_2

- 독논어 유독료전연무사자 / 《논어집주》 〈서설〉

經(경)2. 《논어》를 읽는 당신은 어떤 독자세요?_2 / 독논어 유독료전연무사자 - 《논어집주》 〈서설〉

   먼저, ‘讀論語(독논어) 有讀了全然無事者(유독료전연무사자)’에서 ‘讀論語(독논어)’는 ‘독/논어’로 끊어 읽고, ‘논어를 읽다’로 번역할 수 있겠지요. 이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다음이 문제입니다.

   ‘有讀了全然無事者(유독료전연무사자)’는 ‘유/독료/전연/무사자’로 끊어 읽으면 되겠고, 그대로 번역하면 우선은 ‘읽기가 끝나고 전혀 일이 없는 사람이 있다’ 정도로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번역대로는 무슨 의미인지가 확실치 않습니다. 바로 ‘일이 없는’으로 번역한 ‘무사(無事)’가 무슨 의미인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무탈하다’, 곧 ‘아무런 탈이 없다’라는 뜻으로 ‘무사하다’라고 말할 때의 ‘무사’가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하여 이 ‘무사’를 글자 그대로 ‘일이 없다’라고 하면 이 ‘일’이 무슨 일인지를 알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씩 짚어가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전연(全然)’은 ‘전혀’의 뜻으로, 지금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곧잘 쓰는 말이지요? 국어사전에는 더하여 ‘아주’, ‘도무지’, ‘조금도’, ‘온전히’ 따위의 뜻도 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전연’으로 번역해도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了(료)’는 ‘마치다’나 ‘끝나다’의 뜻이니까 ‘독료(讀了)’는 ‘읽기가 끝나다’나 ‘읽기를 마치다’로 번역하면 되겠지요. 비슷한 말로 지금도 쓰는 ‘독파(讀破)’가 있지요?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것을 가리키는 말 아닙니까. ‘독료(讀了)’가 바로 그런 뜻입니다.

   마지막의 ‘자(者)’는 ‘읽을 독(讀)’이라는 행위의 주체가 사물일 수 없고 사람이니까 ‘것’이 아니라, ‘사람’이나 그냥 ‘자’로 번역하는 게 좋겠습니다.

   맨 앞의 ‘있을 유(有)’는 맨 나중에 번역하면 됩니다. 여기서처럼 문장이나 어떤 구의 맨 앞에 나와 있는 ‘있을 유(有)’자는 마지막 순서로 번역하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문장을 번역하면 ‘읽기가 끝나고 전혀 일이 없는 사람이 있다’가 되는 것입니다.

   ‘읽기가 끝나고’의 경우, 읽는 행위의 주체를 강조하고 싶다면 ‘읽기를 끝내고’나 ‘읽기를 마치고’로 해도 좋겠습니다. 아니면, 조금 더 자연스럽게 ‘다 읽고 나서’나 ‘다 읽은 뒤(후)에’라고 해도 괜찮겠지요. 물론 여기서 ‘읽을 독(讀)’의 목적어, 곧 그 대상은 바로 앞에 나와 있는 ‘논어’입니다.

   그럼, 이 문장과 합하여 번역할 때 첫머리의 ‘독논어(讀論語)’는 어떻게 처리하면 앞뒤 연결이 자연스러울까요? 저는 ‘논어를 읽을 때’나 ‘논어를 읽는 경우’ 정도로 합니다.

   한문 문장에 기본적으로 생략이 많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요? 제가 공부를 하면서 보니까 그 가운데서도 이렇게 ‘때’나 ‘경우’에 해당하는 글자는 으레 쓰지를 않는 것이 한문 문장의 특징이었습니다. ‘경우(境遇)’까지는 아니더라도 ‘때 시(時)’자 정도는 써 주면 번역하기가 한결 수월할 텐데,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면서 공부했습니다.

   제가 배웠던 교수님께서는 《논어집주》 〈서설〉 강독 시간에 이 ‘독논어’를 ‘논어를 읽음에’라고 번역해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일반적으로는 아마도 ‘논어를 읽는 데 있어서’라고 하기 쉬울 테지만, 이는 우리 말법에 어긋나는 표현 아닙니까. 그래서 ‘논어를 읽음에’라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어느 번역이든 의미는 다 통합니다.

   따라서 ‘讀論語(독논어) 有讀了全然無事者(유독료전연무사자)’ 전체를 번역하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논어를 읽을 때 읽기를 마치고 전혀 일이 없는 사람이 있다.

   물론 한문 문장 번역이 대개 그렇듯, 이 역시 완벽하거나 완전하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 문장의 속뜻은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논어》라는 책을 다 읽었는데도 그 사람에게, 곧 그 사람의 내면에 전혀 아무런 변화가 생기지 않는 경우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앞서 언급한 대로, 《논어》를 제대로 읽지 않은, 헛읽은, 엉터리로 읽은 사람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이 ‘일 사(事)’자는 ‘내면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무사자(無事者)’를 ‘내면의 변화가 없는 사람’이나 ‘변화가 없는 자’라고 하면 이것은 번역이 아니라 해설이라고 해야겠지요. 의역이라고 하기에도 좀 지나친 느낌이 듭니다.

   그러니까 지금 정자(程子)는 《논어》를 읽은 사람들의 다양한 변화나 반응의 양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자는 이 사례를 모두 네 가지로 요약해서 정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신약성서》 〈마가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저 유명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떠올렸습니다. 여기서 ‘씨’는 ‘말씀’의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말씀이라는 씨가 길가에 뿌려진 경우, 돌밭에 뿌려진 경우, 가시떨기에 뿌려진 경우, 좋은 땅에 뿌려진 경우 등 네 가지 사례가 있는데, 그 각각의 경우에 말씀이라는 씨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비유적 설명 아닙니까. 역시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네 가지 변화나 반응의 양상에 대한 언급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공교롭게도 정자 또한 그와 똑같이 ‘네 가지’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군요. 그러니까 《신약성서》 〈마가복음〉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씨’는 《논어집주》 〈서설〉의 ‘논어’에 해당한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무사자(無事者)’는 그 첫 번째 유형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다음 글에서 정자가 예로 든 나머지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에 대하여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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