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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l 15. 2024

23. 배움으로 통하는 서로 다른 세계

  - 가쓰라 노조미, 《슈퍼마켓 스타》

23. 배움으로 통하는 서로 다른 세계 / 《슈퍼마켓 스타》 - 가쓰라 노조미 지음, 양억관 옮김, 북폴리오

공무원, 슈퍼마켓에서 일하다

   제목과 표지를 보고 처음에는 만화책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소설이었습니다. 참 재미있게 읽었지요. 극의 공간적 배경이 제목 그대로 슈퍼마켓(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할인마트)이니, 듣기만 해도 흥미롭지 않습니까.

   드라마에서는 이 비슷한 설정(예컨대 백화점)을 더러 본 적이 있지만, 소설에서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소설을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만 지레 넘겨짚는다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여기에 이 소설의 독특한 점이 놓여 있습니다.

   현청(우리나라로 치면 도청쯤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의 한 말단 공무원이 진급 전(前) 과정으로 현 안에 있는 한 중대형 슈퍼마켓에 파견되어 1년 동안 연수 과정 삼아 근무를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줄기입니다.

   아마, 공무원이 민간업체에서 한시적으로 일을 하는, 이런 종류의 파견근무가 일본 사회에서는 어지간히 공식화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래도 생소한 느낌이지요. 하지만 생소하기에 그만큼 흥미롭고 궁금한 설정입니다.

   그러니까 정해진 원칙 또는 매뉴얼에 입각하여 업무처리를 하는 것이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공무원과 능수능란하고 창의적인 수완으로 판매고를 올려야 하는 슈퍼마켓 사람들의 조합인 셈입니다.

   이를테면, 공무원과 상인(商人)의 결합이라고 하면 될까요. 아무래도 잘 어울린다는 느낌은 아니지요? 그 본디 성격상 꽤 거리가 먼 관계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 공무원은 공무원 특유의 업무를 장소만 달리하여 계속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슈퍼마켓 직원들과 똑같은 신분이 되어, 그동안 공무원으로서 수행했던 업무와는 완전히 그 종류와 성질이 다른 일들을 실제로 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이 소설이 갖추고 있는 독특한 설정의 흥미로운 국면이 놓여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과정에서 서로 아귀가 맞지 않는 인물들끼리, 혹은 그런 개인과 조직 사이에서 벌어지는 온갖 갈등 상황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니까요. 그 과정을 한 단계 한 단계 점층적으로 끌어올리는 작가의 솜씨가 남다릅니다.     


충고와 가르침의 목록

   내용에 대한 상세한 소개는 그만두고, 여기서는 이 소설에서가 아니면 접하기 힘든 인상적인 대목, 주로 주인공 노무라 사토시가 슈퍼마켓 측으로부터 듣는 이런저런 충고 또는 가르침의 소리 몇 가지만 소개하려고 합니다.     


  #1. 손님이 느끼는 기분

   슈퍼마켓 사람들이 ‘현청 씨’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주인공 노무라 사토시는 이런저런 지적을 받자 “배우지 못한 사항이라서” 하고 ‘공무원답게’ 당연한 듯 대꾸합니다. 그때 그가 듣는 말입니다.

   “나도 배운 적이 없기는 마찬가지야. …… 이런 말을 하면 손님이 어떤 느낌을 받을지, 그런 거 몰라? 장사는 배우는 게 아니라 손님의 기분을 느끼는 거야. 현청 씨는 자격이 없어.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을 테니까.”

   물론 공무원 쪽에서는 이걸 속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의 편견이나 오해라고 지적하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 볼 만한 점은 분명히 있지 않나 싶네요.     


  #2. 손님이 원하는 서비스

   이 역시 비슷한 상황에서 ‘현청 씨’가 받는 충고입니다.

   “서비스업이란 모범 답안이 없는 일이야. 온갖 손님이 온갖 요구를 하니까. 그래서 말인데, 라틴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게으름뱅이지만 서비스를 시키면 최고래. …… 그 사람들은 즐기고 노는 데 열심이기 때문이라 그렇다고 해. 어떻게 서비스를 받고 싶다는 걸 아니까, 어떻게 서비스를 하면 된다는 것도 안다는 거지.”

   이 말을 듣고 ‘현청 씨’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역시 이곳은 최고의 연수 장소다.’

   조금씩 배우면서 깨우쳐 가는 과정에 들어선 것이지요.     


  #3. 손님의 도둑질

   ‘현청 씨’는 어느 날 매장에서 몰래 도둑질하는 사람을 적발합니다. 한데, 그 일을 놓고 슈퍼마켓 측으로부터 칭찬을 듣기는커녕 오히려 꾸중을 듣습니다.

   다음은 바로 그 상황에서 현청 씨가 듣는 말입니다.

   “훔치는 척하고 숨기는 거야, 매장 속에. 그래서 잡히면 신체검사를 하게 만들고, 결백을 주장하는 거지. 도둑 취급을 당했다고 항의해서 사죄금을 받을 목적으로.”

   이에 현청 씨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있느냐고 항의하자 이렇게 한마디를 더 듣게 됩니다.

   “진짜 도둑이라고 하더라도 가게를 나선 후에 잡는 거야. 수상쩍게 보이면 수위실에 전화하면 그만이야. …… 쓸데없는 일로 가게에 피해를 끼칠 거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나아. 허수아비처럼 서 있기만 해도 돼.”

   이에 ‘현청 씨’는 역시 ‘공무원답게’ 미리 가르쳐주면 되지 않느냐고 항의해 보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입니다. 결국 속으로 ‘지옥에나 떨어져라’ 하고 중얼거리고 말지요.     


  #4. 팔다 남은 음식 재활용

   다음은 날이 더워지는 계절만 되면 먹거리와 관련하여 온갖 음식 위생에 대한 문제가 관심의 초점이 되곤 하는 우리에게 특히 흥미로울 내용입니다.

   바로 슈퍼마켓 식품부에서 어떻게 팔다 남은 음식을 재활용(!)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식품위생법 위반이지만,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일이랍니다.

   대상은 고로케입니다.

   어느 날 ‘현청 씨’는 식품부에서 유통기한으로 표시된 날짜가 이미 지난 고로케를 수돗물로 씻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놀라서 뭐 하는 거냐고 따져 물어봅니다. 그때 듣게 되는 말입니다.

   “물에 적신 후에 튀겨요. 그러면 (다시) 바삭바삭해져서 맛있어요.”

   당연히 공무원인 ‘현청 씨’는, 손님에게 그런 사실을 알리고 파느냐고,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문(愚問)이지요. 불법인데, 알릴 리가 없잖아요?

   이 순간 ‘공무원답게’ 경악하는 ‘현청 씨’ 얼굴이 눈에 선히 보이는 듯하지 않습니까.     


  #5. 고객 관찰하는 법

   어느 날 ‘현청 씨’는 상사인 니노미야(실은 지금까지 현청 씨가 들은 충고의 대부분은 그녀의 것입니다)와 함께 이웃 백화점으로 가서 고객 관찰하는 법을 배웁니다.

   니노미야는 수많은 고객 가운데 한 여자를 점찍어 ‘현청 씨’한테 관찰하게 한 다음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보라고 합니다.

   물론, 가만히 앉아서 찾아오는 민원인 상대만 하던 공무원 ‘현청 씨’가 그런 능동적인 일을 제대로 해낼 리가 없지요.

   니노미야는 말합니다. 아니, 가르칩니다.

   “(그녀는) 3시 반에 백화점에 왔어. 저 나이에 아이가 있다면 아주 어릴 거야.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직장이 있다면 문제가 다르겠지만. 이 백화점에 들어온 후로 저 사람, 한 번도 손목시계를 보지 않았어. 시간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것은 아이가 없거나 남편이 늦게 돌아오기 때문이 아닐까?”

   ‘현청 씨’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맙니다. 그런 ‘현청 씨’를 상대로 니노미야는 이렇게 마지막 쐐기를 박습니다.

   “사람이 안 보이면 실패하고 말아.”     


가르치고 배움으로 서로 통하기

   어떻습니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감이 잡히지요?

   이 공무원 ‘현청 씨’ 노무라 사토시는 이렇게 스스로 조금씩 깨어지며 점점 변화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때로는 슈퍼마켓의 부정적인 면도 알게 되지만, 배우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수지타산을 따지자면 결코 손해가 아님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결국 이 연수 과정을 긍정하게 되지요.

   그렇다고 그가 슈퍼마켓에 순응하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역시 그는 태생이 공무원입니다. 공무원 특유의 뚝심이랄까, 정신으로 슈퍼마켓의 부정적인 면을 개혁하는 데 앞장서서 결국 결실을 이루어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현청과 슈퍼마켓이라는 두 세계가 배움이라는 과정을 거쳐 서로 ‘통(通)하는’ 것입니다.     


현청과 슈퍼마켓

   이 소설의 일본어 원제는 ‘현청의 스타’(현청의 별)입니다.

   우리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은 ‘슈퍼마켓 스타’(슈퍼마켓의 별)이고요.

   따라서 서로 방점을 다른 데 두었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현청’을 우리 실정에 맞는 용어로 ‘구청’이나 ‘도청’, 또는 ‘시청’ 따위로 바꾸기도 여의치 않았을 것 같기는 합니다.

   이를 통하여 이 소설을 대하는 두 나라의, 또는 두 나라 독자들의 태도가 서로 어떻게 다른지를 음미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아닐까 싶네요.     


영화로 만들어지다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을 영화로 만들지 않았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2005년에 이 소설을, 우리 드라마 〈하얀 거탑〉(2007)의 원작인 일본판 〈하얀 거탑〉(2003)의 연출자이기도 한 니시타니 히로시 감독이 〈춤추는 대수사선〉(2000)의 오다 유지와 〈메종 드 히미코〉(2006)의 시바사키 고우를 기용하여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그 작품이 바로 〈현청의 별〉(2006)이지요.

   이 영화에서는 오다 유지가 ‘현청 씨’ 역이고, 저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7)의 나카타니 미키하고 자꾸만 헷갈리는 시바사키 고우가 ‘니노미야’ 역입니다.

   한데, 소설에서는 ‘니노미야’가 ‘현청 씨’보다 나이가 많아서 직장 상사 느낌이 제법 나지만, 영화에서는 거꾸로 ‘니노미야’를 ‘현청 씨’보다 나이가 어린 여자로 설정하여 둘 사이에 동료애를 뛰어넘는 모종의 연애 감정이 생기게끔 처리해 놓았습니다.

   일종의 멜로 라인이 서브플롯으로 섞여 있는 셈이지요.

   이 영화, 그해 일본에서 흥행 1위였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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