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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l 17. 2024

24. 어떤 마음가짐으로 성서를 읽어야 하는가

  - 김호경, 《인간의 옷을 입은 성서》

24. 어떤 마음가짐으로 성서를 읽어야 하는가 / 《인간의 옷을 입은 성서》 - 김호경 지음, 책세상

성서를 대하는 태도의 양상

   성서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읽어야 할까요.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행위일까요.

   성서가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사정은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성싶습니다.(이에 대해서는 오히려 2위가 어떤 책이냐가 더 궁금하지요? 얼마 전에 읽은 관련 기사에서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2위라고 되어 있어서 흠칫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데도 저는 신앙심이 아주 깊은 사람을 빼놓고는 평소 성서를 즐겨 읽는다는 사람, 성서가 너무나 재미있어서 읽지 않을 수 없다는 사람, 성서가 읽고 싶어서 스스로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꾸준히 성서를 읽는다는 사람을 본 기억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무슨 자신감과 확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흔히 성서를 최고의 베스트셀러일 뿐만 아니라, 문자 그대로 최고의 책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꼭 신앙의 차원에서가 아니더라도 성서 읽기에 대해서는 어떤 의무감 비슷한 정서가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 퍼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듭니다.

   그런데도 성서는 여전히 잘 읽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뭔가 모순입니다.

   교회에서 흔히 성서 읽기를 여러 가지 유무형의 상품을 걸고 독려하는 이벤트를 하는 것도 결국은 성서가 평소에 신자들 사이에서조차 잘 읽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의 반증입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말할 때 이 ‘독서’의 대상에 성서를 넣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 또한 부정하기 힘든 사실인 듯합니다.

   어째서 이런 것일까요.

   성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또는 성서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근본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서를 읽는다는 것

   물론 이런 문제를 따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그래도 조금만 생각을 가다듬으면 어지간히 짐작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우리가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과 같은 문학성 짙은 진지한 걸작이나, 황석영의 《장길산》 같은 재미있는 대하소설이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 같은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이나,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같은 격조 높은 세계 명작이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같은 세련된 과학교양서적을 읽는 기분으로 성서를 대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만화책이나 잡지를 보는 태도로 성서를 읽지도 않을 것이고요.

   하지만 성서는 엄연히 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서를 도대체 어떤 책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성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성서를 읽음으로써 무엇을 얻는 것일까요.

   과연 성서는 우리에게 무엇일까요.

   이 책 《인간의 옷을 입은 성서》는 바로 이런 질문들에 답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150쪽 남짓한 분량에 지나지 않는 시집 크기의 소책자답게 그 답이 일목요연하고도 명쾌하여 귀에 솔깃합니다.

   저자는 신약성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신학자이지만, 대학에서는 국문학을 전공한 분입니다.

   그래서인지, 가볍지 않은 내용인데도 글이 맛깔스럽고 친절합니다.

   제목부터가 그렇습니다.

   신의 옷이 아닌, 인간의 옷을 입은 성서―.

   듣기만 해도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기록한 목적과 읽는 목적

   초점은 신약성서입니다.

   이를 위해서 저자는 책을 세 개의 장으로 나누었습니다.

   제1장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성서가 무려 100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 특히 신약성서의 네 복음서가 어떻게 씌었는지를 역사적인 안목에서 살펴봅니다.

   신약성서를 한 번이라도 정독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겠지만, 네 복음서는 같은 이야기를 조금씩 다르게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것이 네 복음서의 저자와 그 집필의 시기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며, 이는 무엇보다도 각각의 복음서를 쓴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목적이 다른 것은 네 복음서가 기록된 시기의 역사적 정황이 각기 다른 까닭입니다.

   예컨대, 서기 80년대 중반에 기록된 마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들에 견주어 유난히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는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성을 명확히 해야 했던 당시의 시대 상황이 반영된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요소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똑같은 사건과 똑같은 인물이 복음서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모순을 이해할 길이 없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저자는 성서를 읽는 목적이 성서의 의미를 찾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야만 성서를 앞뒤 인과관계가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는 엉터리 책으로 오해하는 일이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그저 읽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해석이 필요하다는 뜻이지요.     


다양한 관점들

   제2장의 주제는 다양성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을 보는 다양한 관점들과 만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모습을 복음서 기자들이 서로 얼마나 다르게 그리고 있는가를 실례를 들어가며 견주어 보는 대목이 몹시 흥미롭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가 눈길을 끕니다.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이 똑같은 이야기가 꼼꼼히 뜯어보면 실은 얼마나 다른지를 저자는 상세히 분석하여 보여줍니다.

   우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고 되어 있는데,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쪽은 머리요, 다른 쪽은 발입니다.

   머리에 부은 것은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하는 예언적인 행위이며, 발에 부은 것은 팔레스타인의 사막지대에서 먼 길을 온 손님을 상대로 베푸는 풍습으로, 이는 대단히 큰 차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향유를 머리에 부은 여인은 예언자인 셈이고, 발에 부은 여인은 죄인인 셈이기 때문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이 일이 벌어진 현장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문둥이 시몬의 집이고, 누가복음에서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이며, 요한복음에서는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축하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여인은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입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도대체 무엇이 맞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다른 것은 다른 대로

   저자는 이렇게 답합니다.

   ‘다른 것은 다른 대로 놔두면 된다. 다른 대로 해석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면 그것이 살아난다.’

   그러니까 ‘성서를 일 점 일 획도 건드리고 싶지 않다면, 다른 것을 그대로 놓아두고 의미를 따라가는 것이 순리’라는 것이지요.

   똑같은 이야기가 복음서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각각의 복음서가 이 이야기를 통하여 강조하려고 하는 바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이름 없는 여인의 예언적 행동을 강조하려는 것이고,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여주시는 권세를 이 여인을 통하여 강조하려는 것이며,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강조함과 더불어 마리아라는 여인과 배반자 유다 사이의 대조를 도드라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양성’입니다.

   이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성서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입니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은 다릅니다. 다르지만 틀리지는 않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통일성, 신과 인간의 관계

   마지막 제3장에서는 통일성을 이야기합니다.

   다양성과 함께 통일성은 성서를 이루는 두 축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앞의 두 장을 통해서도 이미 어지간히 드러났지만, 그저 다양하기만 하고 통일성이 없다면 성서는 그야말로 허황하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책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요.

   저자는 성서의 통일성은 성서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속성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그저 하나님과 인간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나아가 어떤 관계를 맺고자 하는지를 이야기할 뿐입니다.

   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망가지는 모습을 성서는 보여줍니다.

   바로 이 관계를 바로잡으려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율법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이 끊일 사이가 없습니다. 율법 때문입니다. 이는 나중에 사도 바울도 똑같이 겪는 일이지요.

   마가복음 2장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는 사건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것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따라서 율법을 어긴 것이라고 예수님께 시비를 걸어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 단호합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여기서 예수님의 반대는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이 인간을 억누르는 것, 그리고 인간이 그 율법을 빙자하여 저지르는 위선에 대한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바로잡으시려는 것이지요.

   그러니, 성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바른 관계에 대한 한없는 의지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 셈이고, 이것이 통일성의 바탕입니다.

   그래서 저자의 마지막 말이 읽는 이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합니다.

   ‘성서를 읽는 것은 성서로 세상을 보고, 거기서 현재를 사는 통찰력을 얻고, 미래를 꿈꾸기 위해서다. 빛나는 미래를 맞으려면 인간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들을 모두, 똑같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     


                - ‘지성의 소리들에 귀 기울이기2’는 여기까지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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