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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김여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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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비스톤 Mar 30. 2023

그녀를 두 번째 만나던 날

정체를 밝히시오

   첫 만남 때 보다 예뻐 보였다. 실내조명 불빛 덕도 있겠지만 어깨 위로 풀어 내린 머릿결, 까만 치마에 흰 블라우스가 어느 영화에서 본 듯한 모습이었다. “잘 지냈어요?” 묻자, “네”하고 답하는 그녀. 첫 만남 때 보다 신경을 많이 쓴 듯 보였다. 나 역시 일주일 전부터 매일 세수하고 얼굴에 누나 로션을 발랐으니. 가게 분위기도 첫 만남 때는 대낮 커피숍이었는데 오늘은 해진 후 주점으로 바뀌었다. 테이블 위에는 병맥주 다섯 병과 과일 안주가 놓여있었고 그녀 뒤쪽 스피커에서는 재즈곡 ‘Misty'가 흐르고 있었다. ' 나를 봐요. 나 지금 구름에 매달린 듯 몽롱해요 '. 음악을 듣는 척 살짝 눈을 감았다.


  25살, 가슴속에서 청춘의 피가 펄펄 끓었을 때 나는 조금 특이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내 여자 친구를 결정하는 기준이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 그녀 앞에 앉아 눈을 감고 키스하는 상상을 해본 후 짜릿하면 OK, 밋밋하면 NO였다. 10초쯤 지나서 살며시 눈을 떴다. 그녀가 살짝 웃고 있었다. ‘그래, OK’. 음악 영향도 있었겠지만 나는 10초 동안 짜릿했었다.


  그녀 주량은 한잔이었다. 소주든 맥주든 막걸리든 한잔은 맛있는데 두 잔부터는 쓰다고 얘기했다. 그 맛있는 술이 쓰다고 하니 하는 수 없이 나머지는 내가 다 마셨다. “우리 좀 걸을까요?” “네.” 1985년 늦봄의 광안리 바닷가 파도 소리는 잔잔한 음악이었다. 그녀는 클래식을 얘기했고 나는 팝을 얘기했다. 밤바다에 음악 얘기가 녹아들어 갔다. 그녀의 목소리도 걷는 모습도 예뻤다. 맥주 5병 영향은 결단코 아니었다. 손을 한번 잡아볼까 망설이고 있을 때 그녀의 힘찬 목소리가 날아왔다. “스톤 씨, 우리 내일 남포동 가요. 생일 선물 사드리고 싶어요”.

(광안리 밤바다에 팝과 클래식이 녹아들어 흐늘거리고 있었다. 사진 출처 : Daum)


  그녀를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나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친구들 모임에 짠~~ 하고 둘이 함께 등장하는 상상을 하며. 고구마 같이 생긴 (엄마 말씀) 공대생이 예쁜 불어불문학과 여학생을 사귀게 되다니...  차창을 스쳐 지나가는 네온사인 불빛이 춤을 추고 있었다.



  다음날 오전, 우리는 미화당 백화점 앞에서 만났다. “남방 하나 사 드릴게요.” 그녀는 내 팔을 낚아채고는 도로변 옷가게로 힘차게 들어갔다. 하나하나 살펴보고 내 가슴에 대 보곤 했다. “어떤 게 맘에 들어요?” “다 맘에 드는데요”. 그녀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다른 가게에 가 봐요”. 나를 끌고 옆 가게로 갔다. 이것저것 보고 나서 “다른 가게 한 군데만 더 가 봐요”. “그래요 ". 미화당 백화점 입구에서 대청로까지 가는 도로변 양쪽에는 가게들이 쭉 들어서 있었고 옷가게는 군데군데 있었다. 결국 대청로가 보이는 오른쪽 상가 맨 끝에 있는 가게에 7번째 들어갔다.

  (당시 미화당 백화점과 상가 거리, 사진 출처 : Daum)


 슬슬 열이 나기 시작했다. 이 옷 저 옷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그녀. ‘그냥 이 옷 삽시다’라고 말을 해야 되는데 목에서 걸렸다. 그녀의 신중한 결정을 깨고 싶지 않았다. "스톤 씨, 길 건너편 가게에 한 곳만 더 가 봐요 " 생글거리며 말하는 그녀.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묻고 싶었지만 꾹 참고 길 건너편 가게로 들어갔다. 하지만 조금 후 나왔다. 그 옆에 9번째, 10번째 가게 문을 열었고 결국 미화당 앞 건너편 가게까지 오고야 말았다. 13번째 가게였다. 거기서도 안 샀다. “스톤씨, 서면으로 한번 가 볼래요?”

  순간, 참고 참았던 내 표정이 좀 일그러졌는지 생글거리던 그녀도 잠시 진지 모드로 바뀌면서 “아니면 오늘 본 것 중에 결정하시든지요...” “저는... 첫 번째 가게에 있던 남방이 맘에 들던데요 " "그래요? 다시 가봐요 " 결국 첫 번째 갔던 가게로 가서 13,000원짜리 남방을 샀다. 내 가슴에 대보고는 "이쁘네요 " 하는 그녀. 또 생글생글. 나도 미소 지으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심각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예쁘다 (그 당시 판단에는). 건데, 옷 하나 사는데 나를 끌고 13군데나 돌아다녔다 (사지 못할 뻔했다)’. 내 머릿속에서는 남자 친구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고 싶은 착한 천사와 자기 고집만 부리는 악마가 막 싸우고 있었다 (생활력이 강하겠네,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무릎에 놓인 남방을 가만히 만져보았다. 마치 경주를 치르 듯 가게를 오가던 그녀와의 장면들이 차창을 스치며 지나갔다. 몸이 나른했다. 흐늘거리는 네온사인 불빛을 따라 생각 하나도 스쳐 지나갔다.

‘얘를 계속 만나야 하나...’   





커버 이미지 : 당시 구매했던 남방과 비슷한 것 (사진 출처 :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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