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잔의 파문

by 김준완

어느 날 불현듯
사지 달린 짐승들이 까치발로 뒷걸음질 친다
밟고 지나간 자리마다 흙은 골을 드러내고
생명의 기척은 비명도 없이 함몰된다
가까이 다가가니, 식은 영혼들만 그림자를 잃은 채 서성인다
산 자의 온기를 탐하던 눈빛이 얼마나 가벼운 먼지였는지 확인한다

​삶에 체해 명치가 딱딱하게 굳을 때면
목덜미를 태울 듯 쓰디쓴 에스프레소 한 잔을 들이켜고 싶다
빠르게, 뜨겁게, 그리고 차마 삼키지 못한 채 어설프게

​채워질 리 없는 갈증은
이미 바닥난 잔 속에서 어떤 파문을 일으킬까
미련에 중독된 사람들은 이제 뒤돌아보지 않기로 한다
녹슬어가는 어제 대신, 아직 오지 않은 창백한 새벽만을 응시한다

​낡은 꽃잎들마저
제 무게를 잊고 무뎌지는 한적한 오후,
죽은 영혼들이 숨을 참으며 서 있는 발치마다
이름 모를 풀들이 악착같이 흙을 밀어 올리며 아우성친다

​살아가는 동안에는
숨이 먼저 나가고 말은 뒤에 남는다
죽어가는 동안에는
심장이 식어도 체온은 한참을 붙들려 있다

​사방에는
차마 죽지 못한 것들만 죽어 있다
살고자 하는 의지도, 죽으려는 용기도 없이
그저 관성대로 흐르다가
어느 순간,
아무 냄새도 남기지 못한 채
잠시 멈춰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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