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기린이 도토리를 줍기로 개미와 약속한 날
가장 높은 시선과 가장 낮은 보폭이
하나의 둥근 허기를 약속한 그날
달팽이는 도토리묵을 만들려고
먼저 도토리를 찾는 긴 여행을 떠났다
기린의 목이 구름의 기척을 살피며 외로움을 견디고
개미의 다리가 흙의 맥박을 짚으며 제 무게를 버티는 동안
달팽이는 제 몸보다 무거운 집을 끌고
도토리의 단단한 침묵 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약속은 지상에 머물고
욕망은 지평선을 넘는다
기린과 개미가 텅 빈 숲에서
서로의 눈동자만 애틋하게 들여다보고 있을 때
달팽이는 이미
도토리의 속살을 짓이겨
떫고 끈적한 저녁의 식탁을 차리는 중이다
가장 느린 자가
가장 먼저 목적지에 도착하는
이 기이하고도 슬픈 숲의 연대기
그들은 어긋났기에 비로소 서로의 빈자리를 사랑한다
〈 보라의 유언과 투명한 기다림: 어느 어긋난 여행자의 정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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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연대기는 늘 시차(時差)로 인해 완성됩니다. 구름의 기척을 살피는 기린의 높은 시선과 흙의 맥박을 짚는 개미의 낮은 보폭은 결코 같은 좌표에서 만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둥근 허기'를 약속하지만, 그 약속이 지상의 중력을 견디는 동안 욕망은 이미 지평선을 넘어 달아납니다. 우리는 늘 상대의 눈동자 속에서 길을 잃으며, 서로를 메우기 위해 철 지난 논리와 무력한 언어들을 수선하느라 아까운 하루를 다 소진하곤 합니다.
사실 우리가 만든 그 정교한 언어들은 연대를 위한 다리가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견디지 못해 쳐놓은 방어막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삶은 누군가를 닮거나 무언가로 수렴될 이유가 없을 만큼 매 순간 눈부시게 새롭습니다. 우리가 간극을 메우려 애쓰는 그 모든 언어 이전의 ‘나’는, 사실 어떤 이름표도 거부하는 거대한 흐름입니다. 어떤 날의 나는 형언할 수 없는 보라색으로 물들어 세상을 집어삼킬 듯 서성이다가도, 어느 순간엔 그 색의 질감이 사물의 윤곽에만 겨우 매달려 간신히 존재를 증명합니다. 그러다 찰나의 바람이 불면, 색채는 비로소 사물의 몸을 떠나 텅 빈 공간의 깊이 속으로 자취를 감춥니다. 존재가 이름을 잃고 투명해지는 순간입니다.
나는 이제 나를 찾기 위해 나로부터 한 걸음 뒷걸음질 칩니다. 이 거리는 외면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딛고 선 흙의 온도를 온전히 느끼기 위한 최소한의 여백입니다. 너무 가까워 보이지 않던 나의 뒷모습이, 그 서늘한 거리에서 비로소 고유한 표정을 짓기 시작합니다. 그곳에서 나는 신을 닮아가는 창조자처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문장들을 만지작거립니다. 진흙을 빚어 숨을 불어넣듯 언어를 만지지만, 그것은 소유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 안의 슬픔이 날개를 달고 사라질 수 있도록 길을 내어주는 일에 가깝다.
슬픔은 정직한 여행자여서, 내 곁을 충분히 서성인 뒤에야 비로소 가벼운 비행을 시작합니다. 슬픔이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차가운 허무가 아니라, 다시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는 깨끗하게 비워진 마음의 자리입니다. 나는 지금 그 마침표 뒤의 여백에 정박해 있습니다. 더는 언어로 언어 이전의 것을 포획하려 들지 않고, 다만 그곳에 머물며 다가올 기척을 기다립니다.
가장 느린 달팽이가 가장 먼저 도토리의 단단한 침묵 속으로 기어 들어가 떫고 끈적한 저녁의 식탁을 차리듯, 나의 머무름 또한 가장 치열한 움직임입니다. 그 식탁 위엔 거창한 논리 대신, 우리가 각자 견뎌온 시간의 떫은맛이 정직하게 놓여 있습니다. 어긋난 여행자들이 나누는 가장 깊은 연대는 각자의 고립을 존중하며 그저 묵묵히 서로의 배경이 되어주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나는 문장을 멈추고, 내가 빚은 이 세계가 스스로 숨 쉬기를 기다립니다. 그다음의 문장은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찾아오는 풍경이 내 손바닥 위에 가만히 내려놓을 이름 없는 빛의 파편들일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