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물을 길어 올리는 시간

서간문

by 김준완

〈기다림 〉

고독한 몸이 내는 소리를 듣기 위해
마음은 가끔 두더지 굴에 들어가
납작 엎드려 있어야 한다
숨을 죽이면
흙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들
딱딱하게 굳은 줄 알았던 뿌리들이
다시 물을 길어 올리는
낮고 팽팽한 박동 소리

장 그르니에의 저서 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여행한다.”
그 발견의 여정은 때로 화려한 풍경이 아니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자발적 유폐의 공간에서 시작되기도 합니다.

위의 시에 등장하는 ‘두더지 굴’은 그르니에가 고독 속에서 마주했던 그 ‘섬’과 닮아 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프란츠 카프카가 묘사했던 고립의 공간, 단편 굴을 떠올리게 합니다.

카프카의 굴이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강박적인 요새였다면, 내가 마주하는 굴은 비대해진 자아의 소음을 걷어내는 하나의 정교한 여과기입니다.

바닥에 몸을 낮게 밀착하는 행위는 삶에 대한 굴복이 아니라, 지표면의 분주함에 가려졌던 생의 미세한 진동을 온몸으로 수신하려는 태도입니다.

카프카가 굴속에서 들리는 정체 모를 소리에 불안을 느꼈다면, 나는 그 고요의 끝에서 전혀 다른 음을 듣습니다.
침묵이 밀도를 더해 숨을 죽이면, 단절된 줄 알았던 세계가 흙벽 너머의 생명력으로 다시 연결됩니다.
딱딱하게 굳어 생을 다한 줄 알았던 뿌리들이 어둠 속에서 은밀히 물을 길어 올리는 소리. 그 낮고 팽팽한 박동은 죽음 같은 고요 속에서도 생이 단 한순간도 멈춘 적 없음을 증명합니다.

이제 나는 이 굴속에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욕망을 내려놓습니다. 대신 ‘나로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라는 존재의 방식에 집중합니다.
그르니에가 말한 공허 속의 충만함이란, 나를 수식하던 모든 이름표를 떼어내고 투명해지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투명해진 영혼의 거울에 가장 먼저 비친 것은, 역설적으로 타인의 고통이었습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이들, 궁핍한 삶을 살아내는 존재들에 대한 깊은 안쓰러움이 내 안에 고입니다. 내가 굴속에서 느꼈던 막막함을 기억하기에, 이제 나는 그들의 침묵 속에 숨겨진 비명을 듣습니다.

굴속에서 길어 올린 박동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나의 투명함은 나를 비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궁핍과 그늘을 아무런 왜곡 없이 비추기 위한 준비라는 사실입니다.

결국 고독의 굴을 빠져나올 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길어 올린 그 미세한 박동이야말로 우리를 다시 살게 하는 동력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동력의 끝은 언제나 나를 넘어선 타인을 향한 따뜻한 환대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