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향과 바다 사이, 그 달팽이의 시간

by 김준완


모든 가을이 대단한 서사로 기록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가을은 그저 무심코 지나치는 바람의 결에 불과하지만,
붉게 상기된 사과의 달큰한 육질과
수평선을 핥고 온 비릿한 바다의 숨결 사이에서
길을 잃고 눈을 맞춘 달팽이를 만난 것은,
그녀의 생애를 조용히 뒤흔든 행운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의 세계는 조금 달라졌다.
머릿속에서 형체 없이 들끓으며
서로를 할퀴고 달아나는 추상적인 사유의 소음들보다,
달팽이가 기어간 자리에 남겨진 은백색의 점막
투명하고도 지독한 삶의 궤적을 바라보는 일이
더 오래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는 이제
달팽이의 느린 눈 맞춤 속에 담긴
정적의 무게를 가늠하는 법을 안다.
여린 뿔이 공기를 더듬을 때 전해지는
습하고 서늘한 기척을 기억하는 일은,
백 권의 책 보다 먼저 닿는 진실이었다.

사과향에 취해 비틀거리다
바다내음에 문득 정신이 드는 순간
그 아슬아슬한 감각의 유보 속에서
그녀는 깨닫는다.

가장 멀리 가는 것은
발 빠른 생각이 아니라,
온몸을 바닥에 밀착시킨 채
느리게, 흉터 같은 길을 남기는 존재의
끈적한 진심이라는 것을.

그 가을,
그녀는 비로소 생각의 감옥을 빠져나와
달팽이가 남긴 투명한 지도 위에서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을 더듬기 시작했다.

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