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은 먹지 않고 점심은 급식으로 해결하는 내게 집에서 먹는 저녁밥은 따뜻함이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상투적인 인사로 반겨주지 않아도 집 밥이라는 존재감이 이미 날 환영해 주는 듯한 느낌으로 말이다. 저녁밥엔 꼭 자주 나오는 반찬이 있었다. 할머니가 손수 만든 시금치 무침이다. 사실 어릴 적 그 반찬은 나의 입맛에 맞지 않아 기피하는 반찬으로 여기곤 했다. 일단 고기와 라면이 제일 우선순위였다. 그 시금치 반찬은 자동으로 뒷전에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몸이 아픈 날은 그게 그럭저럭 괜찮았던 때도 있다. ‘맛있다’는 아니지만 살기 위해 먹었다 할까.
성인이 되어 할머니와 단둘이 살던 할머니 집을 떠난 시기가 있다. 집을 떠나 외방에서 일을 했다. 지치고 힘든 순간이 부단히 닥쳐왔던 것 같다. 다시 돌아갈 집이 존재하지만 그저 무턱대고 돌아갈 수만은 없기에 언제까지나 내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 한 저녁밥을 먹으러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대고 쉴 수 있는 포근함과는 별개로 어른으로서의 내 몫이 존재함을, 그래서 나도 독립적으로 한 번 살아볼 수 있음을 그땐 그렇게 단정 지은 것 같다. 땅과 땅을 구분 짓는 경계의 선을 넘어섬으로써, 집과 밖의 거리가 멀어짐으로써 더 명확해진 것은 아닐까 싶다.
왜 난 밖으로 떠나야 했을까. 시금치가 싫어서? 아니, 오히려 시금치가 그리웠다. 집을 벗어난 이후 힘들고 아플 때마다 종종 할머니가 저녁밥과 함께 올려준 시금치나물에 대한 그리움이 짙어졌다. 길을 지나가다 마주하는 행인과 같이 아무것도 아닌 양 여기던 시금치가 이제는 그토록 사무치게 먹고 싶은 음식이 되어 버린 것이다. 따뜻한 흰쌀밥에 시금치를 얹어 먹는, 닿을 수 없는 상상을 여러 번 하게 됐다. 어쩌면 마음만 먹으면 가서 먹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래, 아마 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행동하지 않은 건 시금치를 그리워하며 고향을 그리워한 까닭이라 생각된다. 밀폐된 향수병에 담긴 향기, 시금치가 내뿜는 고소하고 달달하고 담백한 그 향이 내게 발산된 것은 아닐까. 여러 대상과 장소를 생각하고 그리워했겠지만 그저 하나의 존재에 그 모든 걸 투영하여 마음속에 품으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위안하려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금치라는 기억의 조각을 떠올리기만 해도 부차적으로 떠올려지는, 그렇기에 그 대상이 점차 확장되고 나열되는 현상이 생기는 것으로 하여금.
시금치 하나에 할머니, 할머니 집에서 살던 동네, 동네에서의 여러 추억, 그 모든 강한 전파가 내게 강한 자극으로 전달된다. 단순한 기억의 느낌이 아닌 존재 자체를 입증하고 살아 있음을 말해주는, 그래서 결국엔 나를 완성해 주는 퍼즐 조각으로 흩어져 있는 것이다. 차곡차곡 하나씩 그 조각을 수집하다가도 때론 현실적으로 당면한 문제들로 인해 다시금 흩어지기도 한다. 생성되어 모아지고 다시 흩뿌려져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나무의 잎사귀들과 같이.
그렇게 신경도 쓰지 않던, 기피하던 시금치가 떠올리기만 해도 간절히 먹고 싶고 그에 따라 파생되는 추억까지 떠올리게 만드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언젠가 때가 되어 고향에 왔을 때 난 시금치를 먹지 않았다. 시금치를 그리워하며 뒤를 좇아가 도착한 곳에서 마주한 것들은 시금치 그 이상의 것, 다시 말해 내가 품은 추억 그 이상의 것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시금치는 그저 나를 이어준 끈이었을까.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 먹고 싶지만 이젠 먹을 수 없는 잔여물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그때의 향을 그리워하듯 먹지 못한 시금치로 남아 있다. 여전히 조각난 채로 흩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