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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교실의 동명

by 마루


같은 반 친구가 있었다. 그 아이는 나와 이름이 같다. 학기 초에는 그 사실이 그렇게 크게 작용할지 몰라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냥 조금 신기할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불편함과 예민함의 감각이 커지게 되면서 별 거 아니라고 치부한 것에 대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름이 똑같은 이유로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호명을 할 때 미세한 시간 간격을 두고 같은 순간에 대답을 해버리곤 했다. 누가 먼저 대답한 것이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결과를 낳으며.

학교에서 가끔 처음 마주하는 사람이 우리 둘을 놓고 누가 몇 번 누구인지 학급번호에 따른 이름을 물어보기도 했다. 그게 뭐 어때서,라고 반응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그게 왜 불편함과 예민함의 감각이 싹을 틔워야 할 문제인지 반문하고 싶을 지경이다. 하지만 그때의 난 그랬다.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위축감과 부끄러움이 몸과 마음을 수축하게 만드는 듯 주위를 부유했다. 이름은 같지만 그 외에 모든 게 다 달랐으니까. 누가 이게 더 낫고 이게 더 별로인 문제라는 이야기가 아닌 그 자체로 다름에서 오는 비교인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부르기도 했는데, 키 큰 누구, 혹은 키 작은 누구. 가령 이런 식으로 이름 외에 것들로 부차적인 차이점을 두고 그걸로 구분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기분이 좋은 방식은 아니라는 점을 느꼈다.

때론 당당하고 시원하게 넘기지 않고 받아들이지 못한 탓도 있을 것 같은 미련한 마음이 든다. 소중한 이름이 있지만 그 외의 것으로 차이를 둘 수밖에 없는 아쉬움이 존재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그 상황 속 현상에 불과했다. 청소년기의 예민한 시기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미 완성되어 세상에 나온 육신과 외형이다. 도축장에 걸린 소와 돼지의 등급을 매기는 식의 평가가 위태롭게 나를 향해 있던 것은 아닐까. 외적인 상태만을 보고 평가를 당하는 도축장의 생명과 조금은 닮아있을지도.

결국 크게 다르지 않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평가당하며 사는 게 우리의 삶이니까. 삶 속에서 헤엄치는 인간이라면 누구든 그걸 피할 순 없다. 난 그걸 다른 형식으로 그때 경험했던 것일 뿐. 학생은 공부로써, 직장인은 직무로써 평가당하는 테두리 안에 늘 고통받는 환경에 놓여 있다. 나와 그 아이는 동명이인으로써 그 외의 것, 외형과 성격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다.

그때 느끼던 수치심과 불편함이 왜 그토록 일상에 침투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기도 하다. 이미 갇혀버린 1년의 시간 동안 눈을 뜨고 무엇을 바라봐야 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들의 평가에 낙인찍혀야 했던 한 생명이 있었다. 동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도축장에 걸린 그들의 등급이, 동명이인으로 한 교실에 앉았기에 구별된 개성의 평가와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낀다. 그때 그 아이도 그랬을까. 신경을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타격을 입지는 않았을지 염려 담은 안위를 보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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